< -- 2-2. 비상. -- >
완전히 갑주에 감싸인 김형준을 바라보는 쥬디 창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능력자라고 이미 들어서 알고 있긴 했지만, 그저 TV에서 보아왔던 초능력자로 생각했던 그녀의 상상과는 격이 다른 김형준의 모습.
"미스터 킴?"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에게 김형준이 말했다.
"기체가 비행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요?"
투구 탓인지 음성조차 한결 더 무겁게 바뀐 그의 말에 그녀가 얼떨결에 대꾸했다.
"엔진이 있는 날개 부분이요..."
그녀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김형준이 성큼성큼 비상문을 향해 걸어간다.
"꼭 붙잡고 있어요. 바로 갈 테니까."
비상문을 등지고 있던 터라 그녀의 귀에 들리는 것은 절그럭 거리는 둔탁한 발소리뿐, 하지만 그녀는 바로 들려온 굉음에 비상문이 열렸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9000피트 상공의 사나운 기압이 단박에 기내를 뚫고 들어와 사방의 잡동사니를 빨아들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잠시 휘청거린 김형준의 몸에서 검붉은 줄기들이 꾸역 꾸역 갑작스러운 바람에 잠시 휘청거린 김형준의 몸에서 검붉은 줄기들이 꾸역 꾸역 밀려나와 기내의 이곳저곳을 휘감는다. 으아. 아찔한데?
조금만 늦었으면 기압 차이로 발생한 돌풍에 빨려들어가 기체 밖으로 튕겨 나갈뻔 한 그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방을 옭아맨 붉은 줄기들이 실타래처럼 이곳저곳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지만 9000피트 상공의 바람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에 이를 악다문 그가 잠시 비상문 밖을 내다본다. 때마침 구름층을 벗어난 기체 덕에 그의 시야가 탁 트인다.
각오했지만 그 끝도 없는 높이에 긴장한 그가 주춤주춤 거리며 쥬디가 앉아있는 좌석을 쳐다보곤 이내 기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콰과과과과!
귓청을 때려대는 바람소리가 그의 귓청을 때렸다. 저도 모르게 헉하고 숨을 들이킨 그의 폐부로 차갑디 차가운 공기가 들이찼다.
기체에서 날아오른 그의 몸이 허공에 휩쓸려 날아올랐다. 잠시간 느껴진 아찔한 부유감에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에 온몸을 옭아맨 붉은 줄기들이 팽팽해진다.
"흐으으..."
저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호기롭게 나섰지만 시속 900키로미터에 가까운 속도로 9000피트 상공을 비행하는 기체 밖의 상황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참을 이리 저리 바람에 휘말려 날아다니던 김형준이 붉은 줄기를 붙잡고 기체에 달라붙었다. 기체의 요동과 돌풍이 워낙에 거셌던 탓에 그조차도 쉽지 않았지만 그는 간신히 기체의 상부에 올라설 수 있었다.
평소보다 더욱 촘촘하게 몸을 감싼 피바라기 덕에 간신히 버티고 선 그가 다시 한 번 붉은 줄기를 내뿜어 기체를 휘감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
도 기체에 떨어질 듯한 강풍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기체에 올라서서 뒤편을 바라본 그의 임에서 절로 침음성이 새어나왔다. 창을 통해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바글바글한 벌레 떼의 모습에 질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어디서 이렇게 들러붙은 거야."
그의 말소리가 바람소리와 전세기의 엔진소리에 파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기체의 꼬리는 말할 것도 없고 기체의 3분의 1이상이 벌레들에게 뒤덮여 있다. 강풍에도 끄떡없이 기체에 빼곡하게 달라붙어 있는 벌레들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다.
"자... 올라오긴 올라왔는데 어떻게 처리한다."
단번에 휩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혹시 기체가 망가질까봐 염려된 김형준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검붉은 줄기들을 움직여 벌레 떼를 건드려본다.
"역시, 쉽게는 되지 않네."
줄기에 닿은 벌레 무리가 한 뭉텅이 떨어져나가긴 했지만, 다른 무리들로 금세 메꿔진 틈을 보며 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김형준이 나가고 난 기내에 남아있던 쥬디 창은 한참만에 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내를 휘감은 돌풍이 금방이라도 그녀의 몸을 기체 밖으로 뱉어낼 듯 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비상문을 향해 다가섰다. 콰아아아아!
마치 폭포수라도 떨어지는 듯한 소음이 그녀의 귀를 사정없이 때려댔다.
"하으으으!"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녀가 오만 인상을 다 쓰며 비상문을 잡아간다.
"으아아아아아!"
비명과도 같은 그녀의 고함소리가 한참동안 이어지고 비상문이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닫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막을 찢을 듯 들려오던 바람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돌풍이 잦아 든다. 기체는 여전히 상하 좌우로 요동치고 있었지만, 바람소리와 돌풍이 사라지자 방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평온해진 기내의 광경이다.
그 몇 걸음을 옮기는데 온 힘을 다 했는지 다리가 풀린 쥬디 창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흑."
잠깐사이의 상황이 얼마나 그녀를 몰아붙였는지 고운 얼굴에 가득한 눈물과 콧물이 고운 그녀의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그녀가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고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김형준씨가 밖으로 나갔습니다."
흔들리는 기내에서 겨우 인터폰을 손에 잡은 그녀가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김형준씨가 뭘 어쨌다고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벌레를 처리하겠다고 기체 밖으로 나갔다고요!"
간신히 진정된 그녀의 음성이 다시금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가 왜 기체 밖으로 나가요!"
황당하다는 투로 물어오는 기장의 어투가 사납다. 영국 왕실과 정부의 요청에 의해 김형준을 안전하게 영국으로 모시고 갈 의무가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이리라. 이능력자라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시속 900km이상의 속도로 9000피트 상공을 비행중인 비행기에서 뛰쳐 나가다니.
"모르겠어요. 바깥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이대로 있으면 뭔가 위험한 일이 생길 거라고 했어요."
"기체의 모든 상태는 양호합니다! 진동이 심하긴 하지만 곧 있으면 공항까지만 가면 될 텐데 왜 그런 짓을 해요! 그 사람 미친 거 아닙니까! 아니, 미스 쥬디는 왜 그걸 보고만 있었어요!"
기장의 질책에 그녀가 재빨리 대꾸했다.
"그게 지금 기체에 달라붙은 벌레들이 그냥 벌레들이 아니래요. 그대로 두면 분명 무서운 일이 생길 거라고."
"아니. 그래서 지금 강제로 비상문을 열고 허공에 다이빙 했다는 말이잖아요!"
기장의 비명과도 같은 말에 그녀가 김형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렸다. 신비로운 붉은 갑옷을 몸에 두른 채 자신 있게 말하던 그의 모습,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체 밖으로 몸은 던진 그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아니요. 뭔가 수를 낸 거 같아요. 기장님도 아시잖아요! 그 사람 싸이퍼라고요!"
"하느님 맙소사. 미스 쥬디. 지금 저 밖이 얼마나 혹독한 환경인지 모릅니까? 당신 덕분에 제가 영국의 VIP를 하늘에서 버린 파일럿으로 기록될 판이에요. 객실에서 둘이서 약이라도 한 겁니까. 아니 이 하늘에 무슨 벌레가 있고, 그게 또 무슨 그냥 벌레가 아니라는 헛소리를."
기장과 대화를 하던 쥬디는 이제는 자신이 뭔가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혹시나 해서 창 밖을 바라보니 새카맣게 바글거리던 전세기의 날
개가 새하얗기만 하다.
"저.. 저기 그게 아니라, 분명 그가 그랬다고요."
그녀가 자신감을 잃은 어조로 이야기를 하는데 기체의 요동이 잦아든다. 상하 좌우로 떨리던 기체의 움직임이 점차 진정이 되다가 끝내 안정을 되찾는다.
좌우로 떨리던 기체의 움직임이 점차 진정이 되다가 끝내 안정을 되찾는다.
"봐요. 난기류를 지나 기체는 다시 안정을 찾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당신은 미치광이 초능력자 한명을 허공에서 등 떠민 꼴이라고요."
기장의 말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우물거리던 그녀의 눈이 크게 뜨인다.
"일단 그래도 초능력자라고 했으니 죽지 않았기를 바라야죠."
기장의 말에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손에서 인터폰 수화기가 툭하고 떨어졌다.
"미스 쥬디? 제 말 듣고 있어요? 김형준씨를 어떻게든 기내로 다시 들여보...."
인터폰에서는 끊임없이 기장의 음성이 들려왔지만 그녀는 그저 눈을 비비고 또 비빌 뿐이다.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떠보았지만 창 밖에 보이는 비현실적인 존재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참이나 창을 바라보던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아악!"
"제기랄!"
힘겹게 강풍에 저항하며 벌레들을 떨어트리던 김형준의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지상에서라면 어렵지 않게 쓸어버릴 수 있는 하찮은 벌레들이, 비행중인 기체 위라는 위험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김형준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기운들을 총 동원해가며 벌레들을 떨어트려보았지만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 모를 또 다른 벌레 무리가 그 자리를 메꾼다.
그래도 그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가며 벌레들을 쓸어댄 결과, 새까맣게 바글거리던 기체의 우익은 다시 제 빛깔을 찾을 수 있었다. 다만 날개가 하얗게 변한 만큼, 전세기의 동체 후미라던가 하는 부분은 더욱 빽빽하게 벌레로 들어차버렸지만 말이다.
"음?"
기체에 매달려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리던 김형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창 벌레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그의 눈에 작은 점하나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뜨인 탓이다.
"으헉!"
막 그 점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찰나 기체가 다시 구름층을 통과하는지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다. 기체가 향하는 방향을 등지고 있던 그였던지라 예상하지도 못한 상황에 그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래서야 감각이고 시야고 소용이 없을 지경이라 그는 몸을 바짝 낮추고 기체에 달라붙었다. 아무리 1등급에 해당하는 강대한 힘을 갖고 있으면 뭐하는가. 9000피트나 되는 상공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을리 없는 그였다.
그 덕에 지상에서 싸울 때와는 다르게 빠르게 피로를 느끼던 그는 잠시나마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체력을 회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숨을 몰아쉬고 있었을까. 갑작스럽게 구름이 사라지며 시야가 트인다. 바짝 숙였던 몸을 일으키던 그가 헛숨을 들이켰다.
"저게 뭐야!"
============================ 작품 후기 으아아. 이번엔 저희 어머니가 뎅기열에 걸리셨습니다. 덕분에 주말 내내 병원에서 병간호 하고 있었네요. 정말 굿이라도 해야 할지 뭔노무 일이 이렇게 많은지 요즘 들어서.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생일 선물 대신 쿠폰과 추천이라니 감사드릴 뿐입지요 ㅎㅎㅎㅎ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싸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