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2. 비상. -- >
"으아아아아아. 이제 간신히 도착까지 두시간 정도 남았네요."
김형준이 넌덜머리를 내며 말했다. 이제는 아예 건너편의 좌석에 자리를 잡고 김형준과 대화를 하던 쥬디 창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지겨우셨죠?"
이미 몇 시간이나 대화를 나눈 이들이라 그런지 그녀의 말투도 한결 편안하다.
"지루하긴 했죠. 쥬디가 없었으면 아마 저 심심해서 죽었을 거예요. 쥬디가 내 구세주에요."
전세기에 탄 승객이라고 해봐야 그 하나뿐이고, 승무원들은 죄다 말이 통하지 않는 영국인들이다. 그 중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사람이 쥬디 창 하나였으니 그의 말이 딱히 과장은 아니었리라.
"풉. 그런 말 유부남이 쉽게 쉽게 하고 다니면 바람둥이라고 오해받아요."
진즉부터 지현과 연아를 사진을 보여주고 입에 침을 튀겨가며 자랑을 해댄 그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난 뒤라 그런지 농담을 건네오는 그녀의 태도에 한점 사심이 없어 보인다. 그 역시 사심 없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 마나님께서 들으시면 큰일 날 소리를 하시네. 그나저나 아쉽네요. 사는 곳이 좀만 더 가까웠으면 저희 집에 초대해서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진짜 많은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 그의 얼굴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간 대화를 나눠본 결과 이 쥬디 창이라는 아가씨는 쾌활하면서도 지적이고, 그러면서도 또 여성스러운 게 그냥 스쳐가는 인연으로 두기에는 아까운 여성이라는 게 김형준의 생각이었다.
항상 사건이나 따라다니며 지지리 궁상을 떠는 민용모가 떠올라 소개라도 해줄 생각에 이야기를 꺼내볼까 했지만, 원체 사는 곳이 머니 아쉬울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포기하기에는 아까워 끝까지 연을 이을 구석을 남겨둔다.
"영광인데요? 소드엠프레스와 소드베인의 마스터가 사는 집에 초대 받다니. 다
음에 한국에 들리게 되면 꼭 초대해주세요."
사실 그가 소개시켜주고 싶은 것은 지현과 연아보다는 노총각 민용모였지만 그는 그냥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만약 일이 잘 풀려서 그녀를 용모에게 소개시켜줄 수 있다면 생색을 단단히 낼 작정이었다.
덜컹.
그가 쓸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기체가 난기류라도 만난 듯 덜컥거리며 흔들렸다. 김형준이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엄살을 떤다.
"걱정하지 마세요. 운항 중에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난기류일 뿐입니다."
덜컹 덜컹.
그녀가 말을 하는 사이에도 기체가 진동을 한다. 평소 그녀가 겪어온 진동과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김형준의 안전벨트를 메어준다.
"일단은 난기류를 다 지나갈 때까지는 좌석에서 움직이지 마시고, 벨트 꼭 하고 계세요."
그녀가 김형준의 안전벨트를 단단히 고정하고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가는 그때 기체가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진동과는 차원이 다른 그 격렬함에 자신의 좌석으로 걸음을 옮기던 쥬디 창이 비명을 지르며 복도로 나가떨어졌다. 깜짝 놀란 김형준이 안전벨트를 풀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상하 좌우 할 것 없이 요동을 치는 기체 덕에 이리 저리 쓸려다니는 쥬디 창을 잡은 그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쳤는지 그녀의 고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가느다란 핏줄기가 보인다. 깜짝 놀란 김형준이 그녀를 좌석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어줬다. 기체가 요동을 치는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진 물건들 중 티슈를 찾은 그가 그녀에게 티슈 한 뭉치를 건네주자 그녀가 정신없는 와중에도 고맙다 말한다.
대충 자신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낸 그녀가 좌석의 옆에 비치된 인터폰을 조작하여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유창한 영어로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을 무렵, 창밖을 보던 김형준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쥬디! 쥬디!"
한창 기장과 대화를 하고 있던 그녀가 김형준의 외침에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니 그가 창밖을 가리키고 있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가던 쥬디의 시선이 창밖니 그가 창밖을 가리키고 있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가던 쥬디의 시선이 창밖의 날개에 닿았을 때, 그녀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한마디가 터져 나온다.
"What the hell is that!"
이륙때까지만 해도 새하얗던 전세기의 날개가 시커멓기만 하다. 오래된 고철에 달라붙은 녹과 같은 것들이 잔뜩 뒤덮인 날개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낡아 보인다.
쥬디의 비명에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은 김형준은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인터폰을 통해 뭐라고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이 전부 딱딱한 영국식 영어인지라 가뜩이나 영어에 약한 그는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새된 목소리로 기장에게 상황을 보고하던 그녀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터져 나온다.
"꺄악!"
김형준 역시 헛숨을 들이켰다. 검은 얼룩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쏴아아아 하며 퍼져나가다가 창까지 뒤덮어버린다.
격렬한 진동의 와중에도 뚜렷하게 보이는 검은 얼룩의 정체에 쥬디의 비명이 길게 이어졌다. 창가를 까맣게 뒤덮은 얼룩들이 꿈틀거린다. 흉물스럽게 열 개의 다리를 꾸물거리며, 집게와도 같은 주둥이를 깨작거리는 얼룩의 정체는 흉측한 벌레였다. 역겨운 배를 창에 바짝 붙인 채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끔찍하기만 하다.
쥬디의 비명과 기체의 진동음으로 사방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김형준이 창가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바퀴벌레와도 비슷한 생김새지만 다리는 5쌍이고 주둥이에는 날카로운 집게가 돋아 나있다. 5센티가 될까 말까 한 조그만 놈들이지만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맹렬하게 주둥이를 들이민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김형준은 저 벌레들이 평범한 벌레들이 아니라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만피트 상공에서 비행하는 기체에 달라붙어있는 벌레 떼라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안전벨트를 풀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요동치는 기체 속에서도 수월하게 균형을 잡은 그는 반대편의 창을 열고 상태를 확인했다. 남은 날개 역시 검은 얼룩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날개의 3분지 2정도는 하얀 빛깔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꾸준하게 영역을 넓혀가는 벌레들을 보자면 남은 날개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새까맣게 뒤덮이리라.
"저.. 저게 뭐에요!"
쥬디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온다.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평범한 벌레는 아니에요. 지금 고도가 어떻게 되죠?"
그는 격렬한 기체의 진동 속에서도 요령 좋게 이리저리 균형을 잡는다. 묘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그를 바라보느라 조금은 진정이 되었는지 그녀가 바로 대꾸한다.
"지금 9천피트 상공이고 항속은 890km정도에요."
역시 그의 예상대로다. 9천피트의 상공에서 890km로 비행하는 항공기의 날개에 붙어서 살아남을 벌레는 지구상에 없다. 그 혹독한 환경에서도 살아남는 벌레라니, 이런 벌레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면 지구는 진즉에 벌레들의 세상으로 변했으리라.
"잘 들어요. 지금 저 밖에 있는 벌레들은 그냥 평범한 벌레가 아니에요."
그의 말에 뭣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뒤 늦게 알아들었는지 눈이 커다랗게 뜨인다.
"펴... 평범한 벌레가 아니라니요?"
김형준의 시선이 양쪽 창을 훑어간다.
"제 짐작이지만 아마 맞을 거예요. 요즘 세상이 괴물이니 뭐니로 난리인 거 알죠?"
괴물이라는 말에 와락 겁을 먹은 쥬디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쪼끄만 놈들이긴 하지만 저 놈들도 그런 괴물들 중 하나예요. 어쩌다가 이쪽
에 들러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때마침 기내의 비상등이 점멸하며, 산소호흡기와도 비슷한 것들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다. 기체의 진동이 점점 심해진다. 좌석에 꼭 붙어 있는 그녀조차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밀려나올 듯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대로라면 목적지까지 도착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일어날 것 같은데, 그 전에 착륙할 곳은 없나요?"
그가 영화 속에서 보았던 비상착륙장면들을 떠올렸는지 그렇게 물으니 그녀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이 멘체스터 공항이에요. 다른 곳에 착륙이라니, 기체가 견디지 못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김형준의 시선이 다시금 창밖으로 향한다. 기체의 요동 속에서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그가 벌레들이 가득 달라붙은 창을 바라보다가 손바닥을 내민다. 두터운 유리 너머에서 벌레들이 턱을 아그작대며 그의 손을 물어뜯기라도 할 듯 아우성을 친다.
"잘 들어요. 저는 아시는 것처럼 이능력잡니다."
뜬금없는 그의 말에 그녀가 영문을 몰라 그저 듣고만 있는다.
"지금은 저 벌레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하늘은 제 영역이 아니니 쥬디의 도움을 받고 싶어요."
그가 그렇게 말하는 사이에 그의 손바닥이 붉은 기운을 내뿜는다. 검붉은 기운이 꿀렁거리며 너무도 여상스럽게 창을 통과해 건너편의 벌레들에게 닿는다.
쩌저적.
실제로 들릴 리는 없겠지만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에 쥬디의 입이 떡 벌어진다. 김형준이 뿜어낸 기운이 창 밖에서 덩굴이 자라듯 뭉치더니 그 줄기에 닿은 벌레들이 바짝 말라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다시 다른 무리에 의해 금세 그 자리가 메꿔지긴 했으나 놀라운 광경이었다.
"보시는 것처럼 벌레를 죽이는 건 쉬워요. 하지만 제가 힘을 잘 못 쓰면 기체가 망가질 수도 있어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태연한 표정으로 창밖에 이리 저리 검붉은 기운을 쏘아대는 김형준, 그런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경이로움이 떠올랐다.
사실 벌레들이 달라붙었고 기체의 진동이 심하게 오고 있을 뿐, 상황은 심각하지 않았다. 기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도 기체의 상태는 정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공포에 질렸던 건 여자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던 벌레에 대한 공포와 혐오 때문이기도 했다. 게다가 수천 피트 상공에서 벌레의 습격이라 말도 안 돼는 상황에 당황했던 이유도 있었고.
그런데 김형준이 태연하게 쏘아대는 붉은 기운에 이리저리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벌레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녀는 빠르게 침착함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럼 제가 뭘 도와 드리면 돼죠?"
언제 공포에 질려있었냐는 듯이 침착한 어투로 물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김형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벌레들이 제 눈 안에 있어야만 제가 기체를 손상시키지 않고, 처리할 수가 있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요? 제가 저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고요."
그의 말에 간신히 침착을 찾았던 그녀의 얼굴이 뜨악해졌다.
"미.. 미쳤어요? 지금 저 밖에 나갔다간 죽는 다고요."
그녀의 말에 김형준은 짧게 미소 지었다.
"걱정해주는 거예요? 걱정 하지 않아도 돼요."
그가 입을 열자 검붉은 기운이 그의 주변에 일렁이기 시작했다. 걸쭉한 액체처그가 입을 열자 검붉은 기운이 그의 주변에 일렁이기 시작했다. 걸쭉한 액체처럼 그의 몸 이곳저곳에 들러붙은 기운이 조금씩 단단해지며 형체를 이뤄간다.
"저는..."
발끝의 투박한 전투화부터, 거대한 견갑까지. 그의 모습이 흡사 갑주를 두른 기사와도 같은 모습으로 변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붉은 갑주를 물 샐 틈 없이 두른 기사의 모습, 투구와도 같은 것을 뒤집어 쓴 모습에 얼굴만 간신히 드러나 있다.
그 경이로운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본 쥬디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인다. 그런 그녀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보인 그의 입이 달싹거린다.
"할 수 있어요."
그 말을 끝으로 그의 얼굴마저 붉은 투구 뒤로 완전히 가려진다.
============================ 작품 후기 교통사고건은 후일 후회가 남지 않도록 잘 궁리해서 처리하도로 하겠습니다. 염려해주시고 조언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오늘이 제 생일인데 이쪽은 비가 겁나게 쏟아지네요. 몸도 안좋고 나가기도 뭐하고, 결혼 후 첫 생일이라고 마눌님은 들떠 계시고 참으로 애매한 날입니다.
껄껄껄벌써 32짤이라니. 40도 금방이겠어요. ㅜㅜ여튼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 드리고, 이 우울한 와중에 또 쿠폰다발 투척해주신 이름 모를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코멘트와 선작 추천을 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드리고요^^
여튼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 드리고, 이 우울한 와중에 또 쿠폰다발 투척해주신 이름 모를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코멘트와 선작 추천을 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드리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