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93화 (93/223)

< --  2-2. 비상.  -- >

지현에게 현지를 지켜볼 것을 당부하고 서재의 컴퓨터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뉴스를 하나하나 클릭해 확인했다.'미국을 불바다로 만든 괴수 ? 드래곤'

'늪지대가 되어버린 런던, 거인 그랜델에 의해 초토화!'

'도쿄 전체가 보랏빛 독무에 휩싸여, 괴물은 야마타노오로치라고 밝혀져!'

'생존자 하나 없는 북경! 거대한 붉은 뱀의 정체는?'

신화 속에서나 봤을 법한 괴물들의 이름이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금빛 괴수 드래곤에 의해 워싱턴의 전 지역이 불바다가 되었고, 대지는 뜨겁게 달아올라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워싱턴에 위치한 백악관을 비롯한 주요시설들은 이미 대파되었으며 미 대통령의 생사조차 불분명...'

역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미국이었다. 런던은 템플러들이 초기에 나서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한 반면, 미국은 손 쓸 새도 없이 그대로 도시 전체가 녹아내렸다.

잠시 이런 저런 뉴스들을 더 둘러보다가 이능력자들의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역시나 수십개가 넘는 글들이 새롭게 갱신되어 덧글이 줄줄이 달리고 있었다. 이런 저런 글들을 클릭해서 확인해보니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와 다를 것이 없다. 게시글보다는 댓글들이 흥미로웠다.'어쩐지 우리나라에만 괴물이 나타난 게 좀 이상했음 ㅎㅎㅎ'

'그나저나 미국 어떻게 함. 백악관도 완전 녹아버렸던데...'

'일본 봤음? 자위대 완전 개 발리고 있던데 ㅋㅋㅋ 쪽바리들 쌤통이다.'

'위에님 누구임? 일본이 밉다고 해도 미친 거 아님? 이 사이코패스 같은 님아.'

대체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일어났던 재앙이 이제야 다른 나라에도 일어났다고 모두들 은연중에 좋아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간혹가다가 동정론이 보이긴 했지만 대다수의 이능력자들이 그간 우리나라만이 난리가 났던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무분별하게 댓글로 나타나고 있었다.

한참을 더 커뮤니티를 뒤적거리다가 인터넷 창을 꺼버렸다.

혹시나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민아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전화를 받지를 않았다.

"뭐라도 찾으셨는지요."

서재의 문을 열고 지현이 내게 말을 건네온다.

"아뇨. 뉴스랑 다 똑같은 이야기뿐이에요."

어깨를 으쓱해 보이니 그녀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의견을 나눴지만 별다른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간다. 세계 각국에 이변이 일어난지도 벌써 한달이란 시간이 지났다. 당장이라도 세계가 멸망할 것 같은 위기감이 팽배했다가 이내 느슨해진다.

괴수들은 처음의 파괴 이후에는 더 이상의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첫 등장 이후 일산에 웅크리고 있는 '멸망을 지켜보는 눈'과 같은 양상이다. 우리나라야

이런 상황이 꽤 오래 유지되었던 차라 이미 익숙한 광경이고, 어차피 따지고 보면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니 사람들의 동요도 크지 않았다. 물론 해당국가야 다르겠지만 내가 사는 곳은 한국이니만큼 뉴스를 보지 않는 이상 그들의 생각이 어떤지 알 방법이 없었다.

일반인들의 경우에야 전과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세계 각국의 지원요청. 재앙 이후 안정화에 들어간 대한민국의 상황을 반영하여 각국의 지원요청이 쇄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일산의 괴수야 별다른 움직임도 없고, 몬스터들의 습격에 대한 대비는 완벽하다 말할 수 있을 만큼 되어 있다. 그런 우리나라의 고위이능력자들의 지원을 요청하는 공문이 수백통이나 도착했다고 한다.

덕분에 나 역시 유니온과 정부의 거듭된 연락을 받아야 했는데, 우리나라의 괴수도 몰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나라에 대한 지원이라니, 하도 어이가 없어서 거절한 것만 수십번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제대로 못 지켜놓고 이제 와서 누굴 돕는다는 건데."

내가 짜증스럽게 말하자 수화기 건너편에서 민아가 바로 대꾸했다.

'좋은 기회다. 1등급 몬스터라고 설정된 놈들 중에서 상대적으로 약체로 평가받는 영국의 몬스터다. 지금이 아니라면 1등급 몬스터를 상대로 예행연습을 할 기회는 오지 않아.'

그녀가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며 나를 설득한다.

'네가 걱정하는 도시의 안전은 각 나라에서 협조를 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유니온의 주도하에 벌인 전투에서 이미 데이터를 얻은 영국의 능력자들은 4등급 미만은 아예 작전에 포함을 시키지 않기로 했다. 그 인력을 대한민국으로 뽑아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그녀의 말에 입으로는 안 된다 하면서도 조금씩 마음이 움직였다. 어차피 이렇게 웅크리고 있어봐야 달라질 것은 없고, 언젠가는 저 일산의 괴수를 처리해야 한다는 건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 바에야 상대적으로 약체로 평가받는 영국의 거인과의 전투를 통해 실전경험을 늘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게다가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각국의 중상위 능력자들이 대한민국의 방위계획에 협조를 한다니 사실 나쁜 거래도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대로라면 유니온의 계획에 또다시 끌려다니는 느낌이라 넙죽 받아들일 수도 없다.

"아니. 솔직히 내가 유니온이랑 뭘 해보려고 해서 잘 된 적이 있었나? 터놓고

말해서 너희들 요청이라면 넌덜머리 난다고. 이번 일도 이렇게 좋은 면만 이야기 하고 있지만, 사실 가서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

솔직한 심정을 터놓으니 민아가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 내 입장에서야 노느니 실전경험을 쌓아서 괴수와의 전투를 준비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긴 하겠지만, 유니온과 연관되는 것은 절대 사절이다.

'이쪽에서도 의도치 않았던 일들이었다.'

한참만에 꺼낸 이야기가 민아 답지 않은 변명이다. 괜스레 마음이 약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이를 악다물고 매몰차게 대답했다.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나는 생각 없으니까 이만 끊어."

더 이상 통화를 계속했다가는 내 우유부단한 성격이 사단을 일으킬 것 같아,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벌써 몇 번째일지 모를 민아와의 통화다.

"여전히 같은 요청을 하는지요?"

연아를 품에 안은 지현이 내게 묻는다.

"네. 영국쪽의 거인이 상대하기 만만하니까, 괴수전에 앞서 경험이나 다지라네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틀린 말도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괴수와 싸우자니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고,  이 기회에 다른 나라의 강자들과 손발을 맞춰보는 건 어떠신지요."

그녀는 나름 타당하다 생각했는지 내게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이 어떤지 묻는다.

"그건 맞는 말인데요. 내가 유니온의 인간들하고 얽혀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어서요. 지금도 무슨 꿍꿍이일지 어떻게 알아요. 이렇게 말해놓고 어떻게 뒤통수칠지 불안해서 싸울 수나 있겠어요?"

스스로도 비약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전에 휘둘렸던 악감정이 지금에 와서 고개를 쳐들었다. 힘이 없는 동안 억제시술이니 뭐니 무던히도 끌려다녔던 시절의 기억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그녀 역시 내 속마음을 눈치 챘는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달랜다.

"이제 검맥의 수장이신 당신께 무슨 해꼬지라도 하겠습니까. 그저 아쉬우니 부

탁을 하는 게지요."

하긴 일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위상이 달라진 상태다. 고작 4등급의 이능력자였던 과거의 내가 1등급이라는 타이틀을 땄으며, 수직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검맥의 사람임을 자처하는 사람만 50명이 넘는다. 이제 와서 유니온이 함부로 대하기에는 내가 너무 커버렸지.

"끄응."

괜히 감정만 앞세운 것 같아 입으로 앓는 소리를 내니 그녀가 다시 나를 달랜다.

"같은 괴수의 반열이지만 다른 것보다 약체라니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당신 수련도 벽에 부딪친 참이니 이 기회에 한번 실전을 겪어보시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괴수와는 원한도 있고, 처리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인데 이런 좋은 예행연습기회를 차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다음에 여쭤보시지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들은 누가 지원을 가는지."

은근슬쩍 내가 그들의 요청을 수락한다고 기정사실화 시키는 그녀였지만, 나는 모르는 척 대답했다.

"그럴게요. 근데 당신은 걱정도 안 되요?"

남편을 사지로 몰아넣는 아내라니.

"위험할 게 무어가 있습니까. 사실 지난 괴수와의 전투에서도 갑자기 솟아오른 불기둥만 아니었다면 저나 허준영 그자가 몸을 빼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겝니다. 그러니 당신도 위험하다 싶으면 그 한 몸 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테지요.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믿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입매가 제멋대로 치켜 올라가는 걸 눌러내리느라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푸들거린다.

"그러니까 영국으로 가는 지원병력에 나도 참여할 거라고."

불과 몇 시간 전의 통화까지만 하더라도 넌덜머리를 내던 내가 갑자기 요청을 수락하니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

"왜 대답이 없어? 나 가지 말까?"

조금 무안한 감이 없잖아 있어 그렇게 유치한 말장난을 하니 민아가 뒤늦게 대답해온다.

'아. 그럴 리가. 잘 결정했다. 유니온도 정부도, 그리고 영국의 모든 기관도 지원을 아끼지 않을 거다.'

"우리나라 정부랑 유니온은 못 미덥지만. 일단 나 말고 파견가는 지원병력은 누구야?"

'우리나라에서는 1등급 이능력자인 너 하나고, 다른 나라는 여력이 되지 않아 어떻게 될지 정해지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럼 그렇게 나한테 매달린 게 나 말고 보낼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거야?"

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물으니 그녀가 대꾸한다.

'원래는 2등급 이능력자 셋 정도를 보내려고 했었는데, 네가 간다면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으니까.'

대외적으로 이미 1등급이라고 알려진 내가 파견을 간다면 그것 하나만으로 생색을 충분히 내고도 남을 지원병력이다.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라 알았노라 대답하고 언제 출발할지를 물으니 그녀가 가능하면 빨리 출국하는 것으로 티켓을 잡아 연락을 다시 준다며 전화를 끊었다.

============================ 작품 후기 연참을 약속해놓고 잠수를 타다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지난 주말에 마눌님 심부름을 다녀오던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그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측면추돌인데 가해차량이 그대로 도주하는 바람에 꽤나 처리가 복잡해진데다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느라 입원해있느라 늦었습니다.

제 차는 거의 반파됐고, 에어백이 6개나 있는데 하나도 안 터지는 바람에 제 어금니 세개가 부서지고 나름 부상을 당했습니다. 덕분에 통증이 심해서 글 쓰는데 집중이 하나도 안되네요. 나쁜 놈이 뺑소니를 치는 바람에 사건 해결이 늦어질 뻔 했으나, 어이 없게도 제 차 측면에 번호판이 음각으로 뙇! 찍혀 있어서 현재 차량 수배중입니다.

어쨋건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교통사고라는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으니 휴재를 양해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