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92화 (92/223)

< --  2-2. 비상.  -- >

그녀가 유일하게 나에게 쓴 소리를 하는 부분이 내 게으름에 대한 것이다. 그녀 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 하지만 수동적이고 낙천적인 내 성격을 바꾸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이번에도 아무 생각 없이 캐더린의 말에 이리 저리 끌려다니기만 하는 것을 보고 못 미더운 부분이 있어 끼어든 모양이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내가 천성적으로 게으른 탓이니 괜스레 얼굴만 붉힐 수밖에.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캐더린과 그녀가 대화에 한창이다.

처음 봤을 때까지만 해도 캐더린의 모습은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지현을 존경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듯 지현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 새라 경청하고 있는 모습이 들뜬 기색이 역력하기만 했다. 이제는 나에 대한 영입제의는 뒷전이고 그저 한마디라도 더 지현과 대화를 나누려고 애쓰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다.

그렇다고 딱히 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라, 그저 아이돌의 말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 하는 소녀 팬과도 같은 모습이다.

"그러니 우방국이라면 당연히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신음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 말고, 한 팔 거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치적인 면보다는 도의적인 면을 짚어가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캐더린이 들뜬 표정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곤란한 기색을 표했다.

"아무래도 대한민국 본토의 '유니온'이 달가워하지 않으니까요. 타국의 이능력자들이 대한민국에서 활보하는 것 자체를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납득이 가는 말이지만 왠지 모르게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지현에게 매달리고 있는 캐더린의 모습은 자연스러웠지만, 이상하게 그녀가 정작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같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야 그런 점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렇게 대화에서 떨어져 나와 가만히 지켜보니 뭔가 답답한 느낌이다.

하지만 찾아온 쪽에서 저리 나오는데 내가 나서서 추궁할 건덕지도 없고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밖에.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면 저쪽에서 꺼내겠지. 내 입장에서야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결국 별다른 언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캐더린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일부러 나서서 내색하진 않았다.

"그럼 저희가 드린 제안은 천천히 생각하시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녀를 배웅하고 나니 지현이 내게 다가왔다.

"혹시 제가 나서서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니신지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으니 그녀가 안심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듣다보니 나서게 되었지만, 저 제안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당연히 거절하라고 할 줄 알았던 그녀가 내게 의견을 묻는다.

"의외네요? 당신이라면 일언지하에 거절하라고 할 줄 알았더니."

솔직한 심정을 내비치니 그녀가 고개를 흔든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인들 다르겠습니까. 다만 제의를 받아들이더라도 당장 눈앞의 환란은 해결해야지요."

알 수 없는 그녀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리니, 그녀가 부연설명을 해준다.

"예로부터 이 나라는 무를 천시하고 그 대우가 격에 맞지 않았지요. 이제 와서 새삼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위정자들의 생각은 저들 밥그릇에만 간신히 미치고 있으니, 당신이 이 나라를 벗어난다 하여도 저는 따르겠습니다. 저야 당신과 연아만 있으면 어디인들 다르겠습니까."

그녀의 말대로다. 지금 같은 난리통에도 당장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이능력자들을 통제하는 것은 책상에 앉아 팬대를 굴리는 인사들이다. 유니온이야 같은 이능력자들의 단체라고 하지만 그 곳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 합당한 대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연봉이라니.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을 비정규계약직 노동자라고 생각한다면, 미국의 이능력자들은 정규직 사원이라고 말할 정도의 차이다. 이런 대우를 받고도 이 나라에 남아있는 이능력자들의 수가 적지 않음이 새삼스러울 지경이다.

캐더린의 제안은 내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연봉제니 이런 저런 혜택이니 그런 것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에 끌린다고 할까. 능력과 의무에 합당한 권리를 준다는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뭐 당장 결정할만한 사안도 아니고요. 잠시 생각을 더 해보지요."

새삼 대한민국의 현실이 떠올라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싫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는군요."

살짝 웃으며 하는 말에 책망인가 하여 바라보니 그건 또 아닌 듯 부담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녀가 있다.

그렇게 캐더린이 돌아가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당장이라도 다시 연락할 것처럼 떠난 그녀는 도통 연락이 없었는데, TV를 보다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워싱턴의 한 가운데에 나타난 괴수는 온 도시를 불태운 뒤에 시내의 한복판에 자리를 잡고 미동조차 하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의 수도로 수 많은 시설들이 결집되어 있던 이 도시는 지금은 불길이 채 꺼지지 않은 지옥과도 같은 광경입니다.'

화면에 비친 아나운서의 뒤편에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온통 불바다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화염과 시뻘겋게 흘러내리는 용암 따위가 온통 버무려진 모습이

다.'미국 정부에 의해 '드래곤'이라고 명명된 괴수는 현 시점 대한민국에 나타난 '멸망을 지켜보는 눈

'과 마찬가지로 1등급 몬스터라는 소식입니다.'

격앙된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아나운서의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얼마나 멀리서 찍었는지 건물이 장난감처럼 보이는 화면의 저 편에 거대한 금빛 괴수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딱 봐도 그간 영화등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드래곤의 모습이라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다음 소식입니다. 재앙은 워싱턴에만 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런던의 한 가운데에 나타난 거인에 의해 현시각 도시가 무차별로 파괴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특수한 힘을 지닌 단체가 거인과의 전투를 벌이고 있지만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화면이 바뀌고 또 다른 도시가 나타났다.

"일본의 도쿄에서도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괴물과 자위대가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현 시각 계속해서 세계 가국에 신화속의 괴수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각국의 정부와 특수한 힘을 지닌 인물

들이 최선을 다해 각국의 도시를 방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오고 있습니다만, 낭보는 전해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화면이 빠르게 바뀌어가며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들을 비춘다. 홍수라도 난 것처럼 물에 잠긴 도시와 반대로 불길에 휩싸인 도시, 또는 늪지대처럼 변해버린 기괴한 도시의 모습들이 화면에 나타났다가 사라져간다.

화면에 나타난 도시의 공통점은 단 하나, 거대한 괴수가 도시를 휩쓸고 있는 것이다.

TV의 채널을 돌려보아도 온통 같은 소식이다. 마치 2년전 괴수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무렵의 대한민국과 마찬가지다. 다만 무대가 대한민국이 아닌 세계 각국이라는 점이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혹시 몰라 캐더린이 남긴 번호를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화기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익숙한 전자 안내음이 들려왔다. 그녀도 본토의 소식을 듣고 바로 한국을 뜬 것인지 전화기가 꺼져있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다시 채널을 돌리는데 갑자기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현지가 TV화면을 노려보고 있다. 지독스러울만큼 무표정한 얼굴에 기이한 열기가 감도는 얼굴, 그녀의 주변에 시뻘건 화염이 넘실거리고 있다.

"현지야!"

다급하게 달려가 화면을 가리고 그녀의 좁은 어깨를 붙잡았다.

"현지야. 진정해. 그냥 TV일뿐이야. 네가 좋아하는 TV라고."

수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녀를 감싸 안는데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겁에 질려서인지 그도 아니면, 괴물에 대한 적의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 가녀린 몸이 덜컥거리며 휘청거린다.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힘을 주어 끌어안고 몇 번이고 등가를 쓰다듬어준다.

"현지야. 괜찮아.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TV라고 그냥 TV."

그녀의 주변에 가득한 화염이 나와 그녀에게만은 옮겨 붙지 않았다. 그래도 얼굴이 화끈할 정도의 열기는 마찬가지라 진땀을 흘리며 한참이나 그녀를 달랬

다.

"진정해.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이제 좀 진정이 되나 싶게 열기가 잦아들다가 갑자기 다시 치솟는다. 새빨간 화염이 더욱 거세게 타오르고 이제는 세간에 하나씩 불이 옮겨 붙기 시작한다.

깜짝 놀라 TV를 바라보니 언제 찍었는지 모를 예전의 몬스터 습격사건들이 화면에 흘러나오고 있다. 마침 발치에 굴러다니던 리모콘을 주워 화면을 꺼버린다.

"괜찮아.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얼마나 그렇게 그녀를 달래고 있었을까. 연아를 품에 안은 지현이 보였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연아를 단단히 끌어안은 그녀의 모습에 눈짓을 하니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시금 밖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현지가 뿜어내는 화염의 열기라도 느꼈는지 연아가 울음을 터트린다. 으앙하고 악을 쓰며 울어대는 연아의 울음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온 사방에 옮겨 붙기 시작했던 불길이 거짓말처럼 사그라 든다.

"그래. 괜찮아. 아무 것도 아니야."

마치 연아의 울음소리에 놀란 현지가 힘을 거둬들이기라도 한 상황이라 어안이 벙벙했지만 나는 그녀를 달래기를 멈추지 않았다.

기이한 열기로 일렁이던 눈동자가 다시 원래의 맹한 빛을 찾은 건 그 뒤로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어떻게 된 거에요?"

이제는 완전히 진정되어 맹한 눈으로 게임기를 가지고 놀고 있는 현지를 보며 지현이 나에게 물어온다.

"아. TV 뉴스를 보고 있는데 괴물들이 좀 나왔어요. 세계 각국에 이상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1등급 괴수들이 나타났다는 속보가 나와서, 현지가 그걸 보고 좀 놀란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녀가 깜짝 놀라 다시 물어온다.

"1등급이라면 우리나라에 나타난 존재랑 같은 것들이잖아요."

그녀의 얼굴이 금세 심각해졌다.

"네. 미국쪽은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하고, 일본이고 영국이고 다른 나라들도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던데요."

당장 TV만 틀어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현지가 그 난리를 떤 마당에 이제 와서 TV를 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작품 후기 휴재가 길었습니다. 그간 제 글에 부족한 점들을 깨닫고 제가 얼마나 허접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리며 오늘부터 다시 연참모드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저녁을 기해 연참 달리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휴재중에도 쿠폰을 투척해주시고 코멘트를 달아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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