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90화 (90/223)

< --  2-2. 비상.  -- >

변이체와 조우했던 날로부터 며칠이 훌쩍 지났다. 용모는 김보성이라는 남자를 충동질한 황룡이란 자들에 대해 알아본다며 유니온의 부산지부로 가버렸고, 수현씨는 그날 이후 연락이 되질 않는다. 잠식을 보고 난 후라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아 염려가 되지만 딱히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없다. 그녀 스스로 이겨내는 수밖에.

청소부란 존재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밉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 애매한 존재, 어두운 일을 처리하는 사람답지 않게 유쾌한 성격이 도리어 기분 나쁜 사람이다.

한동안은 의뢰도 받지 않을 생각이라 집에서 가족들과 오랜만에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품에서 꼼지락 거리는 연아는 언제 잠이 들었는지 새근새근 꿈나라에 빠져있고, 그녀는 오랜만에 볕 좋은 날이라고 이불이니 뭐니 빨래를 너느라 바쁘다. 현지는 그 곁에서 그녀가 하는냥을 그대로 따라서 어설픈 조력자 노릇을 하고 있고.

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평화로운 광경이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그 풍경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넋을 놔버렸다.

마치 사이좋은 자매 같은 그녀와 현지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 같다. 현숙한 모습의 그녀와 맹한 표정이 어떻게 보면 또 매력적인 현지, 정말 담아두고 싶은 광경이라 휴대폰을 꺼내 조심스럽게 그들의 모습을 담는다.

찰칵하는 낮은 셔터음과 함께 핸드폰 액정에 평화로운 광경이 담긴다. 셔터소리가 거슬렸는지 몸을 움찔대는 연아를 다시 달래고 있는데 어느사이엔가 일을 마치고 다가선 현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마치고 다가선 현지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안고 싶어?"

연아가 깰까봐 낮은 음성으로 물으니 현지가 맹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요즘 들어서 조금씩 의사표현이 늘어가는 현지의 모습에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연아를 내밀었다.

반쯤은 백치와도 같은 현지였던지라 연아를 맏기는 것이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나 싶다. 게다가 나와는 다르게 지현은 현지에게 연아를 종종 맡긴다고 하니 그녀의 안목을 믿는

마음도 있고.

가만히 품 안에서 꼼지락대는 연아를 바라보는 현지의 표정이 미묘하다. 맹한 느낌은 여전하지만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는 느낌이랄까.

"이뻐서 그러는 겁니다. 아직 온전치 않은 아이이니 자신의 감정이 생소해서 그러는 게지요."

그녀가 다가와 내게 말한다.

"저리 하나 하나 배우다보면 언젠가 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겠지요."

자애로운 표정으로 현지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현지는 나아가고 있으니까. 누군가 자극하지만 않으면 사고를 칠 일이 없다.

정원 한켠에 마련된 벤치에 사이좋게 앉아 현지와 연아를 바라본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흘러갔으면 좋겠네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괴수고 나발이고 지금 같은 생활만 유지된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슬쩍 그녀의 손을 잡아 품으로 당기니 그녀가 수줍게 끌려

온다.

"현지가 봅니다."

가볍게 나를 나무라는 그녀지만 싫은 내색은 아니다.

"우리 그냥 이대로 살까요? 몬스터고 괴수고 신경 쓰지 말고 어디 한적한 곳에 숨어서 저희 네 식구 이렇게 살까요?"

그렇게 말하니 그녀가 조금은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입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설교를 시작하려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래서 싫어요?"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금세 어쩔 줄 몰라 한다.

"싫.. 싫은 건 아니지만..."

괜히 눈을 힐끔거리는 모습이 현지의 앞이라 더욱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요."

부끄러운 탓에 얼굴이 잔뜩 붉어졌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그녀다.

"알아요. 지금 말고 나중에라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우리끼리만."

먼 훗날 대한민국이 잠잠해지면 조용한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속마음을 내비치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다.. 당신만 있다면..."

얼굴을 잔뜩 붉히면서도 꽤나 사랑스러운 말을 한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니, 갑자기 불쑥 연아의 얼굴이 내 코앞에 나타난다.

얼결에 연아를 받아들자 현지가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킥. 현지가 심심한가 보네요. 들어가죠. 가서 다 같이 영화라도 봐요."

8월의 어느 평화로운 오후, 오늘도 여전히 집은 따사롭다.

"골치 아프게 됐네."

가족과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걸려온 한통의 전화, 김보성이 죽기 직전에 남긴 황룡이라는 자들에 대한 단서를 찾으러 갔던 용모의 전화다.

'그래. 이쪽도 꽤나 복잡해. 유니온의 간부가 잠식돼버린 것만 해도 큰일인데 외부인들까지 설쳐댄다니. 분위기가 꽤나 살벌하다고.'

용모가 전화기 너머에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게다가 중국이라니. 그 떼놈들이 우리나라에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기어들어왔는지.'

황룡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중국의 이능력자 단체였는데, 역시나 예상대로 중국인들이 뭔가 수작을 부린 듯 하다.

"얘기만 들어도 머리 아프다. 나는 그런 일에 얽히고 싶은 생각 없으니, 이번만큼은 알아서들 하라고 해. 유니온도 그 정도 힘은 있잖아?"

지금의 생활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던지라 그리 말하니 용모가 바로 수긍을 한다.

'안 그래도 저번에 봤던 청소부 있지? 그 작자들 일 중 하나가 변이체를 기록하는 거라 당시 김보성이 남겼던 유언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그 정도면 중국 쪽 능력자들은 우리나라에서 철수 시킬 수 있을 거 같아. 너나 나나 이제 유니온 소속이 아니잖아? 협조라면 몰라도 이제는 그것도 정식으로 요청해야지.'

용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건 밥그릇 싸움 같아서 끼기 영 뭐하다."

아닌 게 아니라 중국의 이능력자 단체와 우리나라의 유니온의 파워게임 비슷한 느낌이라 끼어들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물론 기왕이면 중국놈들이 물을 먹었으면 좋겠다 싶지만 그렇다고 내가 적극 개입하는 건 또.

다른 건 몰라도 중국인들이 은원관계중 원한은 특히 철저한 편이니, 괜한 일에

얽혀서 앞날 피곤해지는 건 이쪽에서 사양이다.

대충 이야기를 듣고 용모와의 통화를 마무리했다. 사실 밝혀진 거라곤 중국인들의 개입뿐이라서 딱히 머리 아플 것도 없지만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든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과일을 깎아 내 앞에 내려놓던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네온다.

"전에 나가신 일의 사후 처리가 잘 되지 않으시나봅니다."

과연 경지에 이른 검사가 깎아낸 과일이라 그런지 빛깔이 남다르구나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대꾸했다.

"아. 그게 뒤에서 중국놈들이 좀 수작을 부린 것 같아요."

중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진다.

"그 간사한 작자들이 또 이 강토에 기어들어왔답니까."

전부터 느낀 것 같지만 그녀는 중국인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

은 듯하다.

"아. 별다른 건 아니고 저번 사건의 범인 있잖아요. 그 사람을 뒤에서 좀 부추긴 모양이에요. 황룡을 몸에 새긴 자들이 새로운 육신을 주겠다 라고 했다는 거 같은데. 감이 안 잡히네요."

내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뜬다.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아 아는 자들인가 물었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황룡이라면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

혹시 그녀라면 이번 사건에 대해 짐작 가는 바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 물으려다가 그냥 관뒀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데 깊이 알아 뭐하겠냐는 생각이 든 탓이다.

"아. 뭐 유니온에서 알아서 조치한다니 신경 쓸 거 없어요."

내가 그리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찮은 자들이니 큰 분란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이 과일을 드시지요. 오전에 장에서 사온 것인데 제 철이라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모양새라 한입 입에 베어 무니 그녀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다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나는 더 없이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곁에 있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나는 더 없이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곁에 있던 그녀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놀란 표정을 짓자 덩달아 긴장한 얼굴이다.

"왜 그러시는지요. 뭔가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신겁니까?"

염려를 가득 담은 얼굴에 멋쩍게 말했다.

"영언데요. 외국인인가봐요."

뜨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두고 더듬 더듬 말했다.

"아.. 아이 캔트 스피크 잉글리쉬."

한참을 혼자 떠들어대던 전화기 너머 남자의 음성이 잠시 멈춰 섰다가 소란스러워진다. 곁에 누가 있는지 뭐라 시끄럽게 떠든다.

'미스터 킴. 안녕하십니까.'

방금 전과는 다른 인물인지 이번에는 여자다. 약간은 어설픈 그 한국말에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아. 안녕하세요. 근데 누구신지?"

어설픈 한국말을 보니 분명 한국 사람은 아닌데, 외국인 중에 내게 전화를 할 사람이 있던가?'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미국의 '히어로즈

' 소속 캐더린 우즈라고 합니다.'

미국의 이능력자가 걸어온 뜬금없는 전화에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내 말에 저쪽의 캐더린이라는 여자가 어눌한 발음으로 대꾸한다.

'네. 미스터 킴에게 제안 드릴 것이 있어 잠시 만나 뵀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제안 말인지요. 저는 미국의 '히어로즈'와 어떤 접점도 없었습니다만."

'전화상으로는 말씀드리기 좀 그런데, 집으로 찾아가도 될까요?'

난데없는 제안이라는 것에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용모와 중국쪽의 인물들에 대해 얘기하던 차라 그런 기분이 더욱 강해졌다.

"제 집은 어떻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미국측의 그 어떤 제안을 받을 입장도 아닙니다."

완곡하게 거절하니 캐더린이란 여자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일단 이 제안이 절대로 미스터 킴에게 이득일거라는 것은 장담할 수 있어요. 그러니 한번 들어보시고 결정하셔도 늦지 않을 거 같은데요?'

이게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싫다고 거절하는데도 무안한 기색 하나 없이 계속해서 부탁을 해온다. 돌리는 시늉 없이 계속해서 만날 것을 제의하는 그녀다.

'일단 만나보는 건 어떨까요?'

대체 얼마나 더 실랑이를 했을까. 그 집요함에 질릴 지경이다.

"아. 정말 끈질기군요."

내가 두손 두발 다 들었다는 투로 이야기하자 저쪽에서 다시 한 번 똑같은 어조로 제의해온다.

'저희가 편한 시간대에 찾아뵙도록 할게요.'

나중에 연락을 다시 하기로 하고 그렇게 전화를 마치고 나니 옆에서 멀뚱멀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미국이라는데 제의할 것이 있다고 한 번 만나보자는데요. 대체 나한테 뭘 제의하겠다는 건지."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당신은 아직 제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당신은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의 최강자중 한명, 게다가 검맥이라는 단체를 이끄는 장이기도 하지요. 다른 곳에서 접촉이 온다고 해도 이상할 일이 하나 없습니다."

그녀의 말을 듣다보니 그간 내가 자각이 없었다 싶긴 하다. 처음에는 힘도 잃은 그녀를 위로하고자 검맥을 다시 만들어보자고 했던 것이, 어느새 오십에 가까운 이능력자들의 조직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구성원 하나하나가 최소 3등급

이상의 이능력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 되어버렸으니, 이제는 단순한 친목단체라고 하기에도 뭐할 지경이다.

그저 유니온의 횡포에 대항하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다른 이들의 눈에는 또 다른 세력으로 보인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오히려 조금 늦은 감이 있습니다. 일단 만나기로 하신 듯 하니 제안이라는 것을 먼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습니다."

그녀의 구구절절 옳은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기왕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맥의 구성도 조금 다지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이전의 검맥이라면 그저 수련자들의 모임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난세와 다름없지 않습니까."

조금은 거창하게 들리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그녀의 수련을 받은 나와 용모, 수현씨등의 세명이 그저 농담처럼 검맥의 전인들이라 자칭하던 것이, 지난 성남 전투에서 처음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3등급 몬스터까지 총망라해서 습격해온 그 날의 활약 탓이랄까. 유니온의 횡포

에 그간 억눌려왔던 이능력자들이 수 없이도 접촉해오고 그중 알짜배기들만 골라서 받은 것이 지금의 50명이다.

과연 이정도 구성이라면 먼 훗날을 위해서라도 조직을 정비할 필요가 있을 법했다.

============================ 작품 후기 오늘은 출판사분과 수다 떨다가 글을 늦게 올립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출판하느니 차라리 조아라 같은 유료연재시장이 더 나을 듯 하기도 합니다.

검후의 내조가 부럽습니다. 제 마눌님은 제가 글 쓰는 것을 권장하면서도 시간을 주지 않는 매서운 분이라서요. 검후같은 여자분 있으면 언넝 잡으세요. 껄껄.

하지만 다들 아시겠지만 현실에는 없는 여자입니다. 낄낄.

요즘 코멘트와 조회수, 모든 것이 저조하네요. 힘내서 쓰려고 하는데 어깨가 쳐집니다.

ㅜㅜ 저에게 힘을 주소서. 독자님들의 선작과 추천, 코멘트 쿠폰은 제게 가장 큰 힘이 된답니다.

그리고 코멘트로 짐승 여쭤보신 분꼐 알려드립니다. 짐승은 자베트 작가님의 글입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 탈장르 고급 환상문학을 지향해서 '울부짖는 새벽'이라는 글을 연재중입니다. 아직 극초반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감사하게 출판제의는 여러번 왔네요. 하지만 제가 만족할만한 퀄이 나오기 전까지는 출판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습니다. 혹시 관심있으신 분들은 '울부짖는 새벽' 읽어봐주시면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의 피드백으로 대중적 공감대를 찾아 글을 다듬는 중이라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또한 이전의 '제 59구역'이라는 글을 '브레이크다운'이라는 제목으로 변경해서 리메이크하고 다시 연재 시작했습니다. 울부짖는새벽과는 다르게 가볍게 가는 퓨전(이번엔 정말 가볍습니다. ㅎㅎ)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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