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외전. 그녀들의 사정<검후편> -- >
"근데 왜 저를 안지 않으십니까?"
그녀의 입이 열리고 튀어나온 것은 스스로도 깜짝 놀랄 질문,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은 내심을 숨기고 내친김에 하던 말을 마저 한다.
"제가 수백 년이나 살아온 노물이라 그러시는 것인지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던 자격지심이 얼핏 수면위로 떠오른다. 그녀 스스로 말하고도 흠칫했지만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는 그의 모습에 내심 안도하면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혹여 전날의 일로 그러시는 겁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껏 날을 세운 어조가 절로 튀어나와버렸다. 한번 터져나온 감정은 쉬이 수습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그날의 일은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이러는 것은 우리 연아까지 욕보이는 짓입니다."
말을 하다보니 이번만은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에 성난 기색이 역력해졌다.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도저히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벌써 그 일이 있고나서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건만 그는 아직도 제자리 걸음이다. 마치 2년이란 시간을 훌쩍 넘어서 그녀의 앞에 선 그의 얼굴은 지난 날처럼 죄책감에 가득 차있다. 그녀는 그런 그의 모습이 못내 가슴이 아펐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화가 났다.
"연아가 부끄러우십니까? 진정 그런 것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매서운 질책에 당황한 그가 강하게 부정을 표했다. 죄스러운 얼굴로 이내 고개를 숙이며 간신히 내뱉은 말이라는 게 자괴감이 가득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당신에게 감히 그럴 면목이 없어서..."
날카로웠던 눈초리가 부드럽게 휘고 분노 대신 안타까움이 그 자리를 대신 했다.
"저를 보십시오."
심장이 바짝 조여지는 그 서러움에 그녀는 그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지만 그의 얼굴을 단단히 고정한다. 코라도 스칠듯 가까이 얼굴을 들이댄 그녀가 속삭였다. 단호하지만 깊은 신뢰가 담긴 어조.
"저는 이미 당신의 내자입니다. 그날 마음을 그리 먹은 이후 단 한 번도 당신을 원망해본 적도 미워해본 적도 없습니다."
원망해본 적도 미워해본 적도 없습니다."
새까만 눈동 가득 떠오른 것은 안타까움이다.
"처음에는 물론 원망도 하고 미워도 했습니다. 죽이고도 싶었지요. 하지만 연아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게 부질없다 느꼈었습니다. 천명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날 제가 잃은 것은 허울뿐인 힘과 부질없는 청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얻은 것은 더욱 크답니다."
그의 눈가가 뿌옇게 흐려진다. 질끈 눈을 감으니 이내 흘러내리는 투명한 액체, 그 가는 줄기를 타고 그간 그가 느껴온 후회와 자책감, 고통이 흘러내렸다. 억눌린 신음성이 잇새를 비집고 나오고 결국 그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녀의 얼굴 역시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하다. 하지만 이내 다부지게 표정을 가다듬고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춘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그렇게 몇 번이고 그의 두 눈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한참이나 지나 그가 눈을 뜨자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과 연아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더 없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가슴 안에 품는다.
그녀의 품에 안긴 그는 서럽게 울었다. 자신의 가슴을 촉촉하게 적시는 그의 눈물을 느끼며 그녀 역시 눈물을 흘렸다. 가녀린 그녀의 품이었지만 그를 품에 담기에는 충분할 만큼 너른 가슴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끌어안고 흐느끼던 둘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준다. 정성스럽게 행여 닳을세라 서로의 상처를 보듬던 그들의 입술이 맞닿았다.
이미 슬하에 연아라는 아이도 있는 그들이건만 뒤늦게 나누는 첫키스의 감촉에 서로가 취하고 이내 둘의 숨이 거칠어진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온몸을 어루만지고 그녀의 손은 가만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그가 잠시 쉬어가기라도 할 요량인지 한참이나 머무른다. 그녀의 잇새로 달뜬 신음성이 비어져 나오고, 그의 얼굴이 위로 아래로 천천히 움직인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와버린 신음소리에 곱게 감은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작은 새처럼 가늘게 몸을 떠는 그녀를 본 그의 숨결이 더욱 거칠어졌다.
"하악!"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그녀의 몸이 활처럼 굽으며 떨린다. 덜컥거리는 그 떨림이 잦아들고 그가 다시 그녀의 양뺨에 그리고 이마에 입을 맞춘다.
"괜찮아요? 정말?"
조심스러운 그의 질문에 그녀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기만 한다. 아직까지도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그 애처로운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저를 사랑하시나요?"
금방이라도 깨어질 듯 위태로운 질문에 그의 눈이 커지고 안타까움이 가득해진다.
"사랑해요. 이제껏 제가 저지를 실수, 죄. 앞으로 살면서 갚아갈게요. 당신도
연아도. 전부 제가 행복하게 해 줄게요."
진심이 가득 담긴 그 절절한 음성에 그녀의 눈가가 다시금 달아올랐다.
"아끼고 아끼고 죽도록 아끼겠습니다."
그의 고백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갔다.
"저도 사랑합니다."
그녀가 양손을 뻗어 그를 안았다. 목가를 부드럽게 감은 그녀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는 당신의 여자랍니다. 와주세요."
그간 그를 속박해왔던 고리들이 하나씩 깨어져나간다. 목을 조이고 사지를 옭아매던 죄책감의 속박이 사라지고, 가슴 벅찬 감동과 사랑이 그의 상처투성이 몸을 어루만진다.
"아흑!"
마침내 그가 그녀에게 들어섰다. 그녀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어리고 스스로도 알지 못할 충만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육신의 결합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진정한 하나 됨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가슴속을 가득 채운 교감에 그녀의 가슴이 터질듯 벅차올랐다.
저도 모르게 입가로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세차게 고개를 도리질 친다. 견디지 못할 그 충만한 감정에 몸을 뒤틀고 떨어댄다.
"흑. 사랑합.. 흑. 합니다."
그녀가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저도 사랑해요."
그때마다 들려오는 그의 속삭임과도 같은 고백이 너무도 행복해 다시 몇 번이고 사랑한다 말한다. 수 없이도 반복된 고백이지만 그도, 그녀도 질리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서로 사랑한다 속삭인다.
거친 숨결이 오고가고 그녀의 잇새로 삐져나오는 신음성이 점차 커져간다. 조금씩 떨려오던 그녀의 몸이 마치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파들거렸다. 그는 갑작
스러운 압박감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신음을 흘렸다. 곧 이어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한 뭔가가 그의 온 몸을 훑고 그의 중심에서 폭발했다.
"사랑해요!"
그녀의 비명과도 같은 한마디가 길게 이어졌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따사롭다.
"잘 잤어요?"
그녀가 막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다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던 그의 모습이었다. 잠이 덜 깼는지 한참을 멍하니 그 시건을 마주하고 있던 그녀는 이내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시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빼꼼하고 고개만 내민다.
"모..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달아오른 얼굴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꼭 안아버렸다.
"늦잠을 잤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아침 준비가 늦습니다."
가슴깨에서 웅얼거리는 그녀의 몸이 볓번인가 꼼지락거리고, 그는 다시 눈을 감고 나른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이집에 어디 출근하는 사람 있어요? 늦잠자고 아침 안 먹는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말하고 나시 정말 사실이 그런지라 작정하고 그녀를 꽉 끌어안으니 그녀가 도망이라도 치려는 듯 자꾸만 몸을 뒤척였다.
그의 눈에 보이는 하얀 목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침이라 기운차게 기립한 자신의 남성 탓인 듯 했다. 그는 갑자기 든 짓궂은 장난기에 더욱 몸을 붙였다.
깜짝 놀란 그녀가 그의 손을 풀고 침대를 빠져나가 후다닥 옷을 걸쳤다. 그의 손을 풀 때 펼친 것은 '잡이질'이라는 손기술의 오의고, 걸음마저 바른 걸음의 묘미를 담고 있다.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으로 옷을 걸친 그녀에게 그가 피식
웃으며 말을 건넨다.
"속옷 안 입어요?"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기분좋은 소란스러움이 지나가고 평소와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다만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의 시선을 이리 저리 피하는 그녀만이 평소와 다를 뿐.
하지만 그런것도 잠시 자신이 정성스레 차린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는 그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걸리는 그녀다. 예전에 비해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딘가 백치와도 같은 현지의 입가에 묻은 밥풀을 떼어주며, 그녀는 이런 게 가족인가 하고 이유 모를 충족감에 미소 지었다.
평화로운 아침식사다 끝나고 그가 경찰서장의 요청으로 어디론가 나가버리자 그녀는 수련을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 기운을 갈무리하고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스스로를 침잠시키고 관조하니 전신에 흐르는 미약한 기운들이 하나로 뭉쳐졌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조금씩 되돌아오는 정기가 머지않아 예전의 경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바심이 날만도 했지만 그녀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었다.
지금이 전란에 휩싸인 시기도 아니고, 제 한 몸 지킬 힘은 지금도 차고 넘쳤다. 그저 막연하게 앞으로의 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하는 수련이었지, 결코 예전의 영화를 그리워해서 하는 수련이 아니었다.
평온한 마음만큼이나 안정된 기운들이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평온한 얼굴로 스스로를 관조하고 있던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으아아아앙!"
연아의 울음소리에 그녀의 걸음이 바뻐진다.
그녀는 검후 전지현. 그 이전에 한남자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어머니다.1500년대 말 태생, 전지현. 어미도 아비도 없이 검맥의 수련자의 손에서 키워져 8살에 왜란을 겪고, 수많은 난 속에서도 태백산의 한 자락에서 검만을 벗 삼아 살아온 여인.
그 강철과도 같은 부동심에 베어져간 악인만 해도 부지기수, 경지에 오른 이후 속세와의 연을 끊었지만 2012년 대한민국의 한복판에 나타난 '멸망을 지켜보는 눈'을 타도하기 위해 도맥의 전인 허준영과 길을 나섰다.
괴수와의 전투가 참패로 끝나고 그때 얻은 부상으로 대한민국의 이능력자 김형준과 연을 맺었다. 우여곡절 끝에 한 가정을 이루고, 부군을 얻고 아이를 얻었다.
스스로의 힘을 대부분 소실했지만, 누군가 그녀에게 그 힘이 아쉽지 않은가를 묻는다면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것이다.
"부질없는 힘을 주고, 연아와 그이를 얻었으니 나에게는 수지맞는 일이 아닌가."
지금 그녀는 수원시의 한 저택에서 여느 주부와 마찬가지인 하루를 보내고 있다.
"연아야. 자 어미 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 연아를 품에 안은 그녀의 미소가 더
없이 행복해 보이기만 했다.
============================ 작품 후기 검후편 끝났습니다.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이리 많은데 글실력이 너무도 허접함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다만 한순간에 제 글이 좋아지진 않을테니 먼 훗날에라도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읽어주시고, 코멘트와 선작, 그리고 쿠폰을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합니다.
다음 외전은 민아편이 되겠습니다. ㅎㅎㅎ 바로 연달아 연재할지 아니면 본 챕터 마무리 되고 다시 할지는 아직 고민중입니다.
*요즘 민영모님의 네임드 연재분 따라잡느라 열심히 읽고 있는데 뭐 이리 웃긴가요 ㅋㅋ빵빵 터집니다. 개그에는 네임드가 갑이고, 드립에는 짐승이 갑인거 같아요. 짐승은 보는 내내 그 찰진 드립과 시원한 전개에 감탄이 ㅋㅋㅋ 저도 저렇게 좀 시원하게 가야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혹시 짐승 안 보신 분 있으시면 한번
빵빵 터집니다. 개그에는 네임드가 갑이고, 드립에는 짐승이 갑인거 같아요. 짐승은 보는 내내 그 찰진 드립과 시원한 전개에 감탄이 ㅋㅋㅋ 저도 저렇게 좀 시원하게 가야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혹시 짐승 안 보신 분 있으시면 한번 보시기를. 킬링타임으로 강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