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88화 (88/223)

< --  2-외전. 그녀들의 사정<검후편>  -- >

얼마나 그렇게 스스로를 지워가고 있을까, 침잠되었던 그녀의 정신이 깨어났다. 너른 바위에서 벗어나 다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보니 숲의 끄트머리다. 미약하게나마 그녀의 몸속에 남아있는 정기가 자신이 진의 경계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다른 곳과 다르게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숲의 경계에서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춰섰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진의 초입에 발을 내딛었다. 몇 걸음인가 걸으니 다시 자신이 서 있던 곳이다. 그녀는 다시 진의 초입에 들어선다. 몇걸음을 걸으니 다시 자신이 있던 곳. 외부에서는 실존하는 환상으로 침입자를 막는다면 나가는 이는 정해진 길을 따라가야 진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정해진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전이라면 그저 기운을 개방하고 진의 흐름을 가르고 나갔을 것을, 지금의 그녀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깨달음이야 저 높은 곳에 있건만 가진 기운이 너무도 미약하여 이런 하찮은 진에까지 발목을 잡히는 자신에게 절망한다.

다시 한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 몇 번이나 그렇게 진의 초입에서 헤맸는지 모른다. 그녀의 담담한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져 간다. 고운 미간이 조금씩 찌푸려지다가 끝내는 잔뜩 어그러져있다.

한참이나 진의 초입을 헤매던 그녀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다. 마음의 수양을 시작한 이후로 단 한번도 흘린 적 없던 눈물이 요 며칠사이 몇 번이나 흘러내리는지, 그녀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다.

"아아..."

억눌린 신음이 그녀의 잇새를 비집고 나온다. 마치 말하는 법을 잊기라도 한 듯 그녀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성을 토해낸다.

"아아아! 아아."

그리고는 마침내 무너져 바닥에 주저앉는다. 양손 가득 흙부스러기를 그러쥔 그녀가 그렇게 통곡을 한다. 목이 쉬면 눈물로 울었고, 눈물이 마르면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고통과 상실감이 그녀를 천갈래 만갈래 베고 지나간다.

쉬어버린 목에서는 흐느낌조차 없고, 이미 다 말라버린 눈가는 건조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한참이나 절망했다.

이제 와서 중요한 것이 무어랴.

수백년의 고련이 부질없어 이리 슬픈 것이냐.

그도 아니면 고이 간직해온 청백이 깨어져 이리도 비통한 것이냐.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의문에 그렇게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하루의 밤이 다 지나가고 다시 낯이 지나간다. 말없이 흙바닥에 주저앉아있던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눈길이 스스로의 허리춤을 바라본다. 곧게 뻗은 그녀의 장군검, 수백년의 세월을 그녀와 함께 해온 벗이 베어낼 듯 눈 가득 들어온다.

물끄러미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그녀의 손길이 아주 천천히 허리춤에 다가선다. 죽는 눈동자와는 다르게 그 손길이 애처롭게 떨리고 있다. 하지만 비록 떨리는 손일지언정 그녀의 손길은 허리춤에 매인 검에 확실하게 가까워지고 있다.

마침내 그녀의 손이 검을 그러쥔다. 그녀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검집을 벗어나 모습을 드러낸 검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그 날이 무디기만 하다.

결국 그 자태를 온전히 드러낸 검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일렁이는 눈길로 무딘 날이나마 자신의 목에 가져가는 그녀,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벗과 함께 스스로를 결말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벗은 그녀의 자결을 원하지 않는지 말없이 목가를 쓰다듬을 뿐, 도저히 날이 서지를 않았다. 이전이라면 기세만으로 예기가 더해지던 검날이 지금은 그저 뭉퉁한 쇠막대에 불과하다.

그녀는 미약하나마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는 한줌의 정기를 검 끝에 모은다. 아주 잠시나마 온몸에 활력이 감돈다.

우우우우웅.

검날이 운다. 그녀의 목가에 닿은 검날이 애처롭게 몸을 떨며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검을 잡은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간다. 천천히 스스로의 목을 파고드는 차가운 감촉과 통증을 느끼던 그녀의 눈이 더 없이 커진다.

힘없이 늘어진 그녀의 손끝을 벗어난 검이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바닥에 널부러졌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눈만 깜박이고 있던 그녀는 자신의 배를 어루만진다.

"아아..."

"아아..."

형준이 몸을 뒤척인다. 따뜻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입가에 살풋 미소가 어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의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정말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지.

하지만 하나를 잃었으니 하나를 받은 것일까. 힘을 잃고 연아를 얻었다.

자신을 차마 죽지 못하게 한 연아의 존재에 새삼 가슴이 따뜻하게 채워진다. 그녀이 시선이 그와 아이를 훑어갔다.

그녀가 처음부터 마음으로 그를 따랐던 것은 아니다. 그저 아비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다라는 막연한 감정에서 시작된 그와의 관계는 지금에 와서는

스스럼없이 한 이불을 덮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말로야 원망하지 않는다. 사고였다. 늘 입에 달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랬겠는가. 잠든 그를 볼 때마다 수 많은 잡념에 사로잡혔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와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가에 어린 것은 오직 따스함뿐이다. 그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경험, 그저 막연하게 연아 덕이 아닐까 생각한 그녀다.

연아라는 존재를 통해서 느낀 경이로운 모든 것들은 그녀를 모든 미망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검후라는 허울에서 벗어났고, 세상에 경탄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악귀 같은 얼굴로 자신을 탐한 그의 존재만이 그림자처럼 웅크리고 있었지만, 역시 그의 헌신적인 노력 탓에 어느 정도 그 어둠을 걷어낼 수 있었다.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한 번도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은 그, 스스로를 죄인이라 생각하고 그녀의 곁에 한결같이 자리했던 그가 있기에 지금의 그녀가 있을 수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람.

자신은 이제 온전하게 그를 지아비로 섬기고 있건만, 그는 아비로써도 지아비로써도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런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겉으로야 쾌활하게 자신과 연아를 대하는 그였지만, 그 속에 도사린 죄책감과 자괴감은 늘 한결같았다.

언제쯤이나 스스로의 죄업에서 벗어날까.

"자장 자장 우리 자장자장 밭에 불이 붙고고개 넘에는 잠이 온다건너집 애기는 울기만 한다.

우리집 애기는 잘두 잔다.

"그저 그가 좋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바란다.

하루 하루가 평화롭다. 경기도에 웅크리고 있는 괴수 탓에 대한민국은 어수선하기만 하건만 그녀가 머무는 곳만은 더 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사랑하는 그이와 연아, 그리고 현지. 모든 일상이 그녀에게는 경이로움이다. 그저 검만이 전부인줄 알았던 자신이라면 몰랐을 그 안락함이 가져다주는 행복에 그녀는 하루를 감사했다.

난생 처음 가족이라는 것을 가져본 그녀는 그저 이 행복이 깨어지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요즘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이미 잃고 없는 정기야 어쩔 수 없지만, 한번 닦아둔 길이 어려울 리가 없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예전의 경지를 찾아가고 있다. 그가 의뢰나 다른 일로 자리를 비웠을 때에만 수련을 했던지라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만 해도 이미 대한민국에서 손꼽을 강자였지만, 그녀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기기묘묘한 일들이 워낙에 많이 벌어지는 근래이니 그가 없는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가족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랐다.

비움을 강조하는 맥에서의 수련과 달리 난생 처음 가져보는 열망 탓인지, 아니면 이미 한 번 가보았던 길이라 그런지 수련의 진척이 사뭇 빠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걷어낸 그녀의 얼굴이 남다른 각오가 서렸다.

"머리 다 말랐어요. 누워요."

그녀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변한다. 침대에 누운 채 그녀를 재촉하는 그의 모습에 수줍은 기색이 역력하다.

"아.. 아직 시간이 이른데..."

드물게 더듬거리는 말투에 그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잠깐 누워요. 오늘은 저녁 생각도 없고 그냥 뒹굴래요."

그가 다시 재촉하자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명의 스위치를 내린다. 그리고 천천히 옷을 벗어 내린다. 막 샤워를 끝낸지라 촉촉한 그녀의 피부가 드러난다.

좁은 어깨에 곧게 뻗은 팔의 선이 가녀리다. 여린 목 아래 위치한 쇠골과 그 아

래에 위치한 가슴은 수유 탓인지 조금은 커다랗게 부풀어 있다. 앙증맞은 배꼽과 가느다란 허리의 라인이 부드럽게 휘어 둔부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쭉 벋은 다리 역시 꾸준한 수련 탓에 탄탄하기 그지없다.

부끄러운 기색을 가득 띄우고 서둘러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따뜻하다.

그가 가만히 그녀를 품에 안고 있기를 한참, 그녀의 고운 음성이 들려온다.

"민아 그 아이가 왔다 갔었습니다. 근래 들어 부쩍 자주 들리더이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그가 그녀의 한마디에 눈을 크게 떴다.

"그 아이가 마음에 당신을 품은 듯 합니다."

"민아가? 에이. 당신이 잘못 알았겠지요."

피식 웃으며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성이 딱딱한 민아였지만 그를 대할 때만은 뭔가 다름을 느낀 그녀였다. 하지만 그는 저토록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다.

"민아하고 저는 처음에 엄청 사이가 안 좋았었어요. 그나마 이제는 웃으며 얘기할 정도는 되지만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그 돌덩이 같은 애가 나를 좋아해요? 큭. 말도 안 돼요."

그 주절거리는 모습이 꼭 변명같아 그녀는 괜히 심술이 났다. 혹여 자신의 못난 질투가 겉으로 드러날까 말조차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가 한마디 한다.

"그리고 민아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우리랑은 상관없잖아요. 나는 당신밖에 없다니까요. 우리 연아하고. 그러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아요"

금세 그녀의 목이 빨갛게 물든다.

"따.. 딱히 신경 쓴 건 아닙니다."

그녀는 못난 질투가 표가 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래도 당신은 아니라 하지만, 제 감은 그 아이가 당신을 연모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뭔가 사연이 많은 아이 같지만 어두운 구석이 있는 아이니 후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염두에 두도록 하시지요."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두는 그녀다.

"알겠소이다. 내 염두에 두리다."

장난스럽게 자신의 말을 받는 그의 태도에 그녀가 샐쭉하니 투덜거렸다.

"놀리시면 싫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보니 스스로의 못난 꼴을 보인 것 같아 그녀는 급히 말을 돌렸다.

"그보다 아버님하고 어머님께 찾아뵌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너무 격조하면 서운하실까 염려됩니다."

급하게 돌린 화제였지만 그녀는 또다시 난관에 부딪쳤다.

"며칠 전에 전화가 왔어요. 날짜 잡혔으니 그날 식 치르라고 하더라고요. 세상

이 어수선하긴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경사가 더 중요하다고 이번에는 안 된다 하기 없다던데요."

피하고 싶던 문제라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런 것은 허례라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이미 당신과 내가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어찌 그런 허례허식에 목을 매시는 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싫어해요? 부부가 결혼을 하면 결혼식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수백년이나 살아온 노물인 저를 이렇게 대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어찌 그런 것까지 바라겠습니까. 사람이 과욕을 부리면 하늘이 벌을 내립니다."

가볍게 시작한 이야기가 사소한 의견충돌을 일으킨다. 그리고 다기 불거져 나오는 그들의 오랜 상처.

"그런 소리 말아요. 나야말로 전의 일을 생각한다면 당신 손에 죽어도 할 말이 없어요."

자책 가득한 그의 음성에 그녀의 눈초리가 매서워진다.

"그런 끔찍한 소리거들랑 하지를 마십시오. 악연이어도 연이 닿았고 지금은 이리 마음으로 그대를 섬기는데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그런 소리를 하실 때마다 저는 너무도 괴롭답니다."

그녀 딴에는 매섭게 말한다고 했지만 눈가가 금세 뿌옇게 변해버린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내가 실언했어요. 다시는 그런 소리 안 할게요."

금방이라도 흐느낄 것 같은 모습을 한 그녀를 보고 그가 난처한 기색으로 사과한다. 그가 한참을 이런 저런 말로 달래자 그녀가 조금은 진정한 모습을 해보였다============================ 작품 후기 검후편은 다음편이 마지막입니다. 다음편은 어쩌면 수위씬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혹시 몰라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기를 빼앗긴 검후의 노화가 왜 이뤄지지를 않는지 여쭤보신 분이 있네요. 그녀는 기운을 전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태반을 빼았겼다고 나오지요. 그리고 작중에도 여러번 언급되지만 그녀는 지금도 2등급 능력자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또다시 몸이 안좋아집니다. 요즘 쉬지를 못해서 그런지 뭐 이그럼 저는 이만. 또다시 몸이 안좋아집니다. 요즘 쉬지를 못해서 그런지 뭐 이리 골골대는지 ㅜㅜ선작과 추천 코멘트 쿠폰으로 저에게 힘을 주소서.

그리고 검후편이 마무리되면 민아 편으로 넘어갑니다. 민아편이야말로 못한 이야기가 정말 많아서 ㅎㅎㅎ그럼 전 이만!

그리고 격려해주시고 지적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비평과 악평이야 지난 글에서 어마어마하게 받았던지라 크게 신경은 쓰지 않는데. 제 의도와는 다르게 글을 보시는 분들의 시각에서 조금 충격을 받았었지요. 말씀대로 기성작가에게도 있는 일인데 저같은 허접글쟁이야 뭐 당연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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