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87화 (87/223)

< --  2-외전. 그녀들의 사정<검후편>  -- >

"자장 자장 우리 자장자장 밭에 불이 붙고고개 넘에는 잠이 온다건너집 애기는 울기만 한다.

우리집 애기는 잘두 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뺨을 복숭아빛으로 물들이고 잠이 든 연아가 입을 오물거리다가 이내 잠이 든다. 뭔가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조금씩 꼬물짝 대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다.

그런 연아를 바라보는 전지현의 얼굴이 더 없이 편안해 보인다. 자애로운 얼굴에 잔잔하게 어린 미소가 짙다.

속삭이듯 자장가를 부르던 그녀는 이내 잠이 든 연아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건너 침대에 엉망진창으로 뒤엉킨 자세로 잠이 든 김형준이 보인다. 그녀는 더도 모르게 웃음을 짓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자세를 바로 해주고, 이불을 정리해주니 자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그와 자신이 이렇게 한자리에 있음이 더 없이 새삼스럽다. 불과 2년이 채 안 되었을 그 무렵만 해도 이리 될 줄은 몰랐었는데. 깊게 잠이든 그의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눈빛에 아련함이 깃든다.

"윽."

그녀의 온몸을 꿰뚫은 붉은 촉수들이 빳빳하게 굳어간다. 촉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무의 가지처럼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가시를 돋아낸다.

양 팔이며, 다리며 사지를 꿰뚫린 그녀에게 참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었다.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사지를 뒤틀어보지만 온몸을 파고든 붉은 줄기들은 요지부동이다.

"크흐으으으."

기괴한 신음성을 내며 천천히 접근해오는 그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의 눈가가

씰룩인다.

처음 형준이 심마에 빠지자 내심 옳다쿠나 했던 그녀였다. 안 그래도 내심 그의 몸에 웅크리고 있던 요사스러운 기운을 염려하던 그녀였으니, 표면에 드러난 그 사이한 기세를 차라리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기회에 그 어둠을 걷어내어 그의 앞길에 이변이 없도록 하려 했었건만.

이제는 그를 심마에 벗어나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사지를 결박당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사지를 옭아맨 줄기를 통해 자신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 것이다.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붉은 줄기들이 탐욕스럽게 기운을 흡수한다.

"악!"

온몸이 꿰이는 고통 속에서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비명을 질렀다. 오랜수련으로 육신의 고통이야 어느 정도 초월한 그녀였지만, 수많은 인고를 통해 쌓아온 기운이 줄줄이 새어나가는 기분은 그녀가 참을 수 있는 그런 고통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조그만 틈을 통해 빠져나가는 듯 했던 기운들이 이제는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사지를 뒤틀며 저항을 해봐도 검붉은 줄기들은 게걸스럽게 꿀럭댈 뿐이다.

수백년간 홀로 오롯하게 존재했던 그녀의 눈가에 절망의 빛이 어른거린다. 대련을 처음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될 거란 상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그녀다.

평소라면 이렇게 무력하게 제압 될리 없는 그녀였지만 사실 그녀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지난 괴수와의 결전에서 입은 부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던 탓이다. 군의 폭격 당시 폭발의 중심에 가장 가까웠던 그녀는 당시 전력을 다해 괴수를 공격해가던 찰나라 스스로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었다. 그나마 허준영의 결계로 인해 한 목숨 건질 수는 있었으나 수백 년을 가다듬어온 그릇에 금이 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그 깨어진 부분들이 다시 단단해질 터였으나 그 이전에 지닌 기운을 모두 빼앗길 판국이니 그녀가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제 와서 후회하고 발버둥 쳐봐야 부질없는 것. 이미 갈취당한 기운이 반절을

넘어섰다. 남아있는 기운만 해도 강자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으나, 끔찍한 탈력감 탓에 그녀는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흉물스러운 웃음을 얼굴에 가득 떠올린 형준의 발걸음이 서서히 다가선다. 이미 그녀가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임을 알고 있는지 그 성큼 거리는 걸음이 거침없기만 하다. 그의 걸음마다 덩달아 흔들리는 붉은 줄기가 꿀렁대며 무언가를 열심히 그에게 실어 나른다.

기억도 나지 않는 먼 옜날 검을 처음 잡은 이후로 흔들린 적 없었던 그녀의 평정심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나간다. 추악하게 변해버린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 끔찍스러울만큼 강한 음심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는 절망했다. 심마에 빠진 이들이라면 의례 보이는 본능만이 남아있는지 불룩하게 불거진 그의 바지춤이 혐오스럽다.

마침내 그녀에게 다다른 형준의 손길이 그녀의 몸을 수 없이 스쳐간다. 그리고 그녀의 옷가지가 하나 둘 찢겨나간다. 사지를 결박당해 반항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녀는 그에게 강제로 범해졌다.

그녀의 고운 두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을 잡은 후 언제나 자신을 무인이라 여겨왔었고 스스로를 여인이라 생각했던 적이 없는 그녀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비통한 눈물과 상실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헉. 헉."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자, 그의 시뻘건 눈동자를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조금씩 옅어지는 붉은 기운에 그가 어쩌면 정신을 차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하고 생각한 그녀다.

일찍이 심마에 빠진 이들이 색욕을 드러내는 것을 몇 번인가 보았던 그녀였지만 그때 보았던 추악한 눈길 아래 자신이 깔려 있게 될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 게다가 그는 자신의 청백한 몸을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몇백년간 정련해온 기운까지 갈취해가고 있다. 반항조차 하지 못하게 온몸을 꿰뚫고 있는 붉은 줄기들이 지금도 꿀럭이며 그녀의 정심한 기운을 게걸스럽게 빨아드리고 있었다. 몇백년간의 고련했던 그녀의 강대한 기운이 그렇게 허무하게 타인에게 넘어간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몸이 더럽혀졌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전부였던 기운을 타인에게 갈취 당했기 때문일까.

그래. 지금 와서는 무슨 소용이랴. 그간 지켜왔던 청백과 수백년의 고련이 부질없다. 어차피 이리 될 운명이라면 왜 그리도 발버둥을 쳤었을까.

모든 게 덧없고 덧없구나... 그녀의 양 뺨을 타고 진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지독스러운 무력감과 상실감이 그녀의 텅빈 가슴을 채워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녀는 말라버린 눈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음을 느끼고 눈을 떴다. 항상 그녀의 몸에 웅크리고 있던 강대했던 기운, 수백 년을 쌓아온 정기의 그 굵은 줄기는 대체 어디 갔는지 끊어질 듯 말 듯 미약하게 남은 체다.

벌써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몸을 추접스럽게 탐하는 그가 보였다. 그녀는 메마른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대부분의 힘을 거세당한 자신이 슬픈건지, 수백년간 지켜온 청백지신이 깨어져서 슬픈건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아니, 이제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비탄서 슬픈건지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아니, 이제는 분노인지 슬픔인지, 비탄인지 모를 자신의 감정에 멍하니 하늘만 바라볼 뿐이다.

수많은 의문과 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져간다. 지독스러울만큼 메마른 눈으로 짐승처럼 헐떡이는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 눈을 감았다.

지금은 다만 쉬고 싶을 뿐이다. 어서 이 지옥같은 상황이 끝나고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무인 '검후'가 아닌 인간 '전지현' 그렇게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그가 있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죄송하다는 말만을 수 없이 반복하는 그를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네가 왜 울지? 정작 울고 싶은 건 난데. 서럽게 꺽꺽거리며 죄송하다는 그 얼굴이 추악하다.

네가 왜 서럽지? 정작 슬픈 건 난데.

그녀는 입을 열었지만 다시 닫아버린다. 원망과 지독스러운 증오가 그녀의 입을 통해 당장이라도 빠져나갈 듯 아우성을 친다.

가까스로 스스로를 다스린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어떤 말로도 사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죄송합니다!"

바닥에 머리를 찧어가며 외치는 그의 사죄가 왜 저리 처절할까. 정작 아픈 건 그녀인데.

"일어나라."

그녀 스스로 말하고도 소스라칠 정도로 무감정한 한마디가 불쑥 튀어나온다.

"고개를 들어라."

그녀의 말에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를 보는 그녀의 눈매가 지독하리만큼 건조하다.

"얼굴을 내게 보여라."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속까지 괜찮은 것은 아닐터, 끝내 그 말끝이 파르르 떨려온다. 이내 뿌연 습막이 그녀의 눈가를 가리우고, 그것을 마주 한 그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사과를 받고자 함이 아니다. 너는 그때 심마에 빠져 있었던 상태. 그 일은.."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두눈을 감는다. 그녀의 눈가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마침내 무겁게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고였다..."

그 한마디를 내 뱉는 순간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참담함에 그녀의 다리가 휘청거린다. 그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어오다가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 역시 다가서는 그의 손길에 놀라 몸을 떨었다.

그 뒤로 그녀는 자신이 뭐라 말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 보니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가슴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공허함에 그녀는 가슴을 세게 그러쥐었다. 젖가슴을 움켜진 자신의 손아귀에서 오는 통증보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마음을 베어가는 고통이 더욱 크다.

잘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를 마주하고 있는 동안 몇 번이나 살심이 고개를 쳐들었는지 모른다. 그녀 스스로를 다잡지 않았다면 수백년을 함께 해온 검으로 그의 목을 베었겠지. 지금 이 순간조차 그녀는

'그럴 걸 그랬구나.'

하고 수 없이 되뇌지만 이내 고개를 떨었다.

그 뒤로는 정처 없이 주변을 떠돌았다. 그가 남아있을 오두막에는 차마 돌아가지 못한 그녀는 식음을 전폐하고 그저 걷고 또 걸었다.

한 걸음에 떠오르는 그의 추악한 얼굴, 다시 발을 내딛으면 떠오르는 애처로운 자신이 있다. 걸음마다 온갖 생각들이 그녀를 휘감고 다시 사라져간다.

그저 걷고 또 걷다보니 이제는 뭐가 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지친 그녀는 저 멀리 보이는 너른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햇빛은 참으로 밝구나 하고 생각했다.

해가 지고 다시 떠오른다. 어둠이 깔려들고 다시 걷힌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리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 스스로도 시간이라는 것을 잊고 그 자리에 이었는지.

이제는 원망도 미움도 아련하게 멀기만 하다. 그저 스스로에 대한 후회만이 가득할 뿐. 시간이라도 돌릴 수 있다면 하고 수 없이 생각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허황되고 부질 없는 바람일 뿐임을 잘 알고 있다.

온몸에 가득했던 정기의 태반이 사라지고, 남은 기운마저도 탁하기만 하다. 정명했던 눈동자는 뿌옇게 흐려져 생기 하나 없고, 아름다웠던 외모는 시들어간다.

스스로 죽어감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그녀는 스스로를 죽음으로 이끌어 갔다.

============================ 작품 후기 외전격인 그녀들의 사정입니다. 논란이 많았던 검후의 이야기와 민아의 이야기. 그리고 잊혀졌던 여캐들이 총 출동합니다.

주인공과 오버랩되는 그녀들의 인생을 한번 서술해보려 합니다. 더 이상 미루기에는 못 다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요.

외전이 끝나는데로 본편은 호쾌하게 진행합니다. 이미 흑막이고 뭐고 많이 깔아뒀으니 주인공은 그런 거에 개의치 않고 날뛰겠습니다!

Kug란 사이트에 추천이 올라왔다는 제보를 받고 들어갔다가 상처만 받았습니다. ㅜㅜ30개가 넘는 리플중에 좋은 평은 단 몇개더군요.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실이 고전무협씩 색공 전개와, 의미없는 갑질에 대한 언급이더군요.

스스로 모르던 부분들이라 지금도 긴가민가합니다만, 제 글을 돌아볼 필요가 있겠군요.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리며, 선작과 추천 코멘트 쿠폰은 언제나 제게 힘이 됩니다.

첨언. 출판글인 아름다운세계가 1차 교정 마무리되어 2차 교정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은 격려 부탁드립니다. 또 서평이벤트와 설문조사에 많은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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