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 그리고 얼마 후. -- >
눈을 뜨니 흑단 같은 머릿결이 눈을 가득 채운다. 흐트러진 머리를 늘어트리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몽롱한 중에도 꿈을 꾸는 것 같다. 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차분함은 어디로 갔는지 입을 반쯤 벌린 채 잠이 든 그녀의 모습은 또 다른 신선함으로 내게 다가온다. 살짝 벌어진 입에 반짝이는 건 침인가? 새근새근 거리며 자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순간 넋을 잃어버렸다.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이라 무심코 한참을 보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을 즐거운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의 긴 속눈썹이 몇 번인가 파들거리다가 눈이 뜨인다. 그녀는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큭. 잘 잤어요?"
내 아침인사에도 대답도 없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몇번인
가 깜박인다. 그리고 조금씩 커져가는 눈이 더 이상 커질 수가 없도록 크게 뜨인다. 갑자기 이불 속으로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꼼지락거리더니 다시 얼굴을 내민다. 방금 전에 비해 훨씬 정리된 얼굴과 머리로 입을 여는 그녀의 얼굴이 온통 붉기만 하다.
"모..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꼭 안아버렸다. 품안에 쏙 들어온 그녀가 가슴팍에서 꼬물거린다. 평소의 낭랑한 어조는 어디 갔는지 잔뜩 우물거리는 말투가 사탕을 입에 문 아기와도 같아 웃음이 절로 나왔다.
"늦잠을 잤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아침 준비가 늦습니다."
서로 같은 침대를 쓰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나보다 늦게 일어난 그녀다. 그럴 만도 한 게 어제 우리는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 연아를 갖던 날 가졌던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라 정말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고 할까.
그 끔찍했던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조심스러워지는 건 당연지사, 어제의 일이 마치 꿈만 같다.
가슴 한켠에서 그간 나를 짓눌러오던 죄책감이 옅어지고, 그 자리를 그녀에 대
한 무한한 애정이 대신한다.
"이집에 어디 출근하는 사람 있어요? 늦잠자고 아침 안 먹는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자꾸만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니 결국 품에서 벗어나는 걸 포기했는지 버둥거림을 멈춘다. 잦아들었던 그녀의 움직임이 다시 시작 되길래 왜 그런가 했더니 아침이라 기운차게 일어난 나의 존슨 때문인 듯 하다.
갑자기 장난기가 고개를 들이밀어서 슬쩍 그녀에게 가져다 대니 그녀가 소스라친다.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금세 이불 밖으로 튀어 나가서 전광석화와 같이 옷을 걸친다. 검후라는 명성에 걸맞는 날렵하고 절도 있는 동작이라 나는 잠시지만 감탄해 버린다.
하지만 감탄은 감탄이고 할말은 해줘야지.
"속옷 안 입어요?"
그녀의 벌겋게 익은 얼굴이 울상을 짓는다.
아침식사를 하는 내내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그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고 밤새도록 텔레비전을 봤는지 졸린 눈으로 식탁에 앉은 현지만이 평소와 같은 모습이다.
그렇게 조금은 색다른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니 경찰서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일이 시급하긴 한지 제법 발 빠르게 자료를 제공한 경찰측의 상황에 눈에 보일 듯 선하다.
사건의 발생은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에 처음 시작. 1주일을 간격으로 계속해서 추가 범행 발생. 희생자의 수는 8명. 희생자의 시체 중 세구만 발견했고 다섯명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고 그나마 발견된 희생자의 사체도 독극물이나 산에 훼손되어 신원파악이 힘들었다고 한다.
첨부한 CCTV와 자료들을 보다보니 일전에 유니온과의 담판 때 만났던 중년남자가 자꾸만 떠오른다. CCTV에 비친 범인의 실루엣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남자와 비슷한 정도다.
"특이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연아를 재우느라 잠시 방에 남았던 그녀가 내게 다가와 물어온다.
"이거 생각보다 끔찍한데요? 범행 동기나 그런 건 전혀 모르겠고 그냥 단순 미치광이 살인 같아요. 발견한 사체들은 전부 독에 의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됐다는데 자료 사진이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에요."
내가 사진 몇장을 건네주자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다. 여느 여자 같으면 보기만 해도 기절할 만큼 목불인견의 참상이지만 그녀는 검을 쓰는 자들의 왕이다. 그저 미간을 찡그리며 짤막한 감상을 말한다.
"광인이군요."
그녀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희생자들은 전부 여성이었는데 가장 심하게 훼손된 부분은 얼굴과 유방, 생식기 등이다. 사진만 봐서는 변태 살인마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범행 주기는 딱 1주일, 범인이 이능력자라고 생각하면 여기에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경찰 측에서 보내온 자료는 그저 통계적인 데이터일 뿐이다. 간간히 수사를 한 사람의 주관적인 소견이 들어가 있겠지만 이능력자의 생리를 모르는 이의 의견은 그저 억측에 불과할 뿐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 자신의 능력에 잠식될 경우인가."
이능력자는 늘 몸에 시한폭탄을 두르고 사는 것과 같다. 자신의 힘이 강대하면 강대할수록 언젠가는 자신의 이능에 먹혀버릴 지도 모른다. 이능의 사용이 잦을수록 더욱 그 시간은 빨리 다가온다. 그것을 억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유니온에서 폭주 억제 시술을 받는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썬 독과 관련된 이능을 지닌 고위 이능력자가 폭주를 했다라는 가정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렇다고 했을 경우에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범행의 주기가 지나치게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능에 잠식되어버린 경우라면 무분별하게 닥치는 데로 주변사람을 잡아먹었을 텐데 이 때문에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독에 관련된 인물이라고 하니 자꾸만 떠오른 유니온의 중년 간부라 오히려 생각에 방해가 된다고 할까.
"경찰이 준 자료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으신지요. 유니온에도 한 번 협조를 요청해보지 그러십니까."
테이블 위에 늘어놓은 자료들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가장 필요한 건 희생자의 사체를 토대로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능의 소유자들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이럴 때는 뭐니 뭐니 해도 민아지.
내가 핸드폰을 찾는 시늉을 하자 그녀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내게 핸드폰을 내민다.
"고마워요."
사소한 것까지 이리 배려를 해주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민아한테 한 번 도움을 청해야겠는데요?"
휴대폰의 전화번호부를 찾고 있는데 한숨소리가 들린다. 난데없는 한숨소리에 고개를 드니 그녀의 얼굴이 조금은 어둡다.
"왜 그래요?"
이유를 물으니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아. 어젯밤에 침대맡에서 말했던 그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꽤나 민아를 신경 쓰는 것 같았으니 지금 내가 민아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탐탐치 않은 듯 했다.
"제가 말할 것은 다 어제 했으니 당신이 알아서 하시겠지요."
조금은 차가운 얼굴을 해보인 그녀가 내게 말한다. 나는 왜 저 말이 협박처럼 들릴까. 괜스레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휴대폰 너머에서 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무슨 일이냐?'
언제나처럼 인사고 뭐고 생략한 싸가지 없는 전화예절에 나는 마주 응수해준다.
"자료가 필요해."
뜬금없는 내 말에 민아년이 바로 물어온다.
"수원 경찰청이 예전에 협조 요청을 보냈다는 거 있지? 독을 이용한 연쇄 살인."
민아도 알고 있던 사건이었는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독에 관련된 이능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목록인가? 알았다."
말투만 빼면 이런 비즈니스 파트너가 없다. 쿵하면 척이니 대화가 편해서 좋다.
"응. 부탁해. 그리고 어제 들렸었다면서."
민아에게 묻고 나니 순간 한기가 느껴진다. 한기의 진원지를 찾아 고개를 드니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가 보였다. 아무런 질책도 없이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지만 왠지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현지를 보러 갔었다. 없어서 그냥 돌아왔지만.'
민아의 대답에 대충 대답을 하고 서둘러 통화를 마쳤다. 아직까지 나를 바라보는, 내 느낌상으로는 노려보는 그녀에게 괜스레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뭐. 알아서 하시겠지요."
그렇게 말하고 훽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민아를 신경 쓰는 정도가 내 생각보다 더 심한 듯 하다. 뭔가 큰 잘못을 한 기분이라 그녀를 따라갈까 하는데 초인종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김민식 서장 와이프랍니다."
그녀의 말에 어제 현지 때문에 실랑이가 붙었던 돼지 아줌마가 떠올랐다. 그 아줌마가 여긴 무슨 일이지?
"안녕하세요. 어제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싼티 나는 차림새는 여전했지만 태도만큼은 어제와 180도는 다르게 공손하기 그지없는 아줌마가 고개를 숙인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아줌마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는 손님을 별로 반기지 않는데요."
뭐 좋은 인연이라고 반기겠는가. 냉정하게 쏘아주니 아줌마가 그 투실투실한
얼굴에 땀을 흘리며 비굴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뇨. 어제 제가 너무 경우 없이 군 것 같아서요. 다시 사과드리러 왔어요. 김기사 뭐해. 전해드리지 않고."
그녀를 뒤따라 온 어제의 그 김기사라는 작자가 양손에 가득한 뭔가를 내민다.
"이게 뭡니까?"
"아. 빈손으로 오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어제 일에 대해 사과도 할 겸 준비해왔답니다."
딴에는 사람좋은,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저 간사한 웃음을 지어보인 아줌마가 김기사를 재촉한다. 양손에 든 것이 꽤나 무거운지 건장한 김기사도 조금 버거운 듯 한시라도 빨리 짐을 내려놓고 싶은 모양새다.
"일단 주시는 거니 받긴 할게요."
오는 선물 마다 않는 나인지라 선물을 받아들여 소파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현지를 불렀다.
"그거 최고급 한우하고 송로 버섯이에요. 몸에 좋은 거니 꼭 챙겨드세요."
어제와 딴판인 아줌마의 태도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김민식 서장한테 한소리 들었겠지 싶어서 그냥 하는 꼴을 보고만 있다. 당장 내가 도시를 뜨면 문책 받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다. 최소 좌천 심하면 파면이다. 그러니 이리 굽실거리는 태도로 안절부절 못하는 거겠지.
어제 일을 생각해보니 만약 상대가 내가 아니었다면 저 아줌마가 이리 사과하고 할 일도 없었으리라. 자연스럽게 내 얼굴이 차가워진다.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온 현지에게 한가득 짐을 전해주니 곁에 있던 김기사가 주춤거린다.
"그.. 그거 엄청 무거울텐데 아가씨한테는."
제딴에는 염려라도 해주는 모양새지만 우리 현지가 그냥 아가씨인가. 무려 3등급 이상으로 측정된 이능력자다. 그 강화된 육체라면 놀란 눈으로 현지를 바라보고 있는 김기사와 아줌마를 번쩍 들고도 남는다.
무거운 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가는 그녀의 모습에 뜨악한 표정을 지은 그들에게 나는 축객령을 내렸다.
"주시는 거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용건 더 없으시면 이만 가시죠. 쉬는 중이라서."
조금은 싸가지 없는 말투로 나가줄 것을 부탁하니 그들이 우물쭈물 거린다. 아마 내가 차후에라도 어제의 일을 트집잡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겠지.
"어제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가봐요."
조금 불쾌한 경험이긴 했지만 나중에는 현지가 차를 폭파시키는 바람에 이쪽이 더 심한 짓을 해버린 경우다. 그런 사소한 일 가지고 나중에 복수니 뭐니 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는지라 아줌마에게 그리 말해주니 금세 얼굴이 밝아진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 커다란 머리통을 정신없이 위 아래로 흔들며 말하는 탓에 보는 내가 어지러울 지경이다. 손짓으로 눈치를 주니 그들이 몇 번인가 더 인사를 하다가 사라진다.
그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몸을 돌리는데 아직까지 곁에서 한가득 짐을 들고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고 있는 현지가 보였다. 말 없이 눈만 껌뻑이는 현지를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기 언니 옆에 가져다 놔."
주방에서 뭐가 그리 바쁜지 부산을 떠는 그녀를 턱짓으로 가리키니 현지가 털레털레 걸음을 옮긴다. 현지는 대체 언제 치료되려나.
============================ 작품 후기 딴짓좀 하다보니 업뎃이 늦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ㅎㅎㅎ. 검후나 다른 여캐들과의 에피소드는 조만간 외전으로 몰아서 정리할 생각입니다.
외전으로 등장했으면 하는 캐릭들이 있으시다면 코멘트로 부탁드립니다.
혹여 잊으셨을까봐 말씀드리면 지금 잊혀져간 캐릭터들이윤민아, 김희선, 김도연, 오피스텔 꼬맹이들, 동창생들등등입니다.
외전으로 나올 경우에는 하드코어 수위로 묘사가 될 예정입니다. ㅎㅎㅎㅎ스토리상 자주 나오긴 하겠지만 집중적인 조명을 원하는 캐릭터들이 있으시면 코멘트 부탁드립니다.
선추코쿠는 항상 글쟁이의 좋은 단백질원입니다!
스토리상 자주 나오긴 하겠지만 집중적인 조명을 원하는 캐릭터들이 있으시면 코멘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