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81화 (81/223)

< --  2-1. 그리고 얼마 후.  -- >

"아.. 아직 시간이 이른데..."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는 모습이 참기 힘들만큼 사랑스럽다. 차가운 표정 이면에 숨겨진 여인의 모습은 마치 소녀와도 같다. 저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오직 나뿐이기에 특별하게 느껴진달까.

그녀의 말에 시계를 보니 저녁 7시. 이른 시간이긴 하다.

"잠깐 누워요. 오늘은 저녁 생각도 없고 그냥 뒹굴래요."

내가 다시 재촉하자 그녀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명의 스위치를 내린다. 그리고 들려오는 감질 나는 소리. 타올이 그녀의 몸을 스쳐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인다.

조명이 꺼진 방안은 어두웠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다. 밝은 대낮만큼은 아니지만 선명하게 보이는 그녀의 나신에 나는 침을 꿀떡 삼켰다.

검후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좁은 어깨에 곧게 뻗은 팔의 선이 가녀리다. 여린 목 아래 위치한 쇠골과 그 아래에 위치한 가슴은 수유 탓인지 조금은 커

랗게 부풀어 있다. 앙증맞은 배꼽과 가느다란 허리의 라인이 부드럽게 휘어 둔부의 아름다운 곡선을 그린다. 쭉 벋은 다리 역시 꾸준한 수련 탓에 탄탄하기 그지없다.

부끄러운 기색으로 서둘러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귀에 걸렸다.

놀랍게도 그녀는 잠을 잘 때 옷을 걸치지 않는다. 한창 기를 수련하던 무렵에 천지간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알몸으로 자던 것이 습관이 되어 옷을 걸치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니 내게는 행운이자 불행이랄까.

매일 같이 저토록 아름다운 여체를 본다는 것은 행운이지만, 지금의 나는 참아야 하니 또한 불행이다.

꿀꺽입이 바짝 말라 침이 넘어간다. 이불 속에 들어온 그녀가 그 가늘고 매끄러운 팔을 내 가슴팍에 올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새빨갛다.

그녀는 내가 의식적으로 그녀를 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딱히 뭐라고

하진 않는다. 역시 나를 지아비로 받아들인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날의 상처가 가시지 않았던 탓일까.

나는 애써 다른 생각을 떠올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보드라운 그녀의 몸이 품안에 쏙 들어온다. 이렇게 가녀린 몸으로 어찌 그런 무거운 이름을 지고 있었을까싶을 정도로 그녀의 몸은 여리여리 하다.

가만히 그녀를 품에 안고 있기를 한참, 품 안에서 몸을 꼼지락대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민아 그 아이가 왔다 갔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아'하고 얼빠진 대답을 한다. 그녀가 꼬물짝 될 때마다 몸에 전해져 오는 자극이 지나친 탓이다. 참자. 참아야 돼. 크윽.

"근래 들어 부쩍 자주 들리더이다."

그녀의 말에 나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나의 존슨은 성이 날대로 성이 났고, 나는 속으로 찬송가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아이가 마음에 당신을 품은 듯 합니다."

막 찬송가의 첫 구절을 머릿속으로 부르려던 찰나 들려온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민아가? 에이. 당신이 잘못 알았겠지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유니온의 계획으로 인해 만난 윤민아 그녀는 내게 있어 비즈니스 파트너와 같은 관계다. 지난 대담 이후 틀어질 대로 틀어진 유니온과의 관계를 그나마 붙잡고 있는 것이 그녀와 나의 관계랄까. 내 말에 지현이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본다. 깊디깊은 그 새까만 눈동자가 말없이 한참을 내 눈을 응시한다.

"민아하고 저는 처음에 엄청 사이가 안 좋았었어요. 그나마 이제는 웃으며 얘기할 정도는 되지만 그런 사이는 아니에요. 그 돌덩이 같은 애가 나를 좋아해요? 큭. 말도 안 돼요."

왠지 모르게 주절주절 거리는 내 말이 변명처럼 들린다.

억울해! 난 억울하다고! 그 석녀 같은 여자가 나를 좋아할 리가 없잖아.

내 말에도 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저 지긋이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그리고 민아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우리랑은 상관없잖아요."

슬쩍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그리 말하니 다시 그녀의 얼굴이 새빨게진다.

"나는 당신밖에 없다니까요. 우리 연아하고. 그러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말아요"

내가 어찌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짓을 다시 할까. 이미 지난 과오만 해도 평생을 갚아도 갚지 못한 죄를 지었거늘.

목까지 빨갛게 물들은 그녀가 우물쭈물 입을 연다.

"따.. 딱히 신경 쓴 건 아닙니다."

당황한 얼굴로 주춤거리는 그녀의 모습, 이 또한 나만이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녀를 안은 내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잔뜩 붉어진 얼굴을 보이기 싫었는

지 내 품에 얼굴을 파묻은 그녀가 웅얼대는 음성으로 다시 말한다.

"그래도 당신은 아니라 하지만, 제 감은 그 아이가 당신을 연모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뭔가 사연이 많은 아이 같지만 어두운 구석이 있는 아이니 후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염두에 두도록 하시지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야 민아 고년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지만 일단은 듣는 시늉이라도 해보였다.

"알겠소이다. 내 염두에 두리다."

내가 고풍스러운 그녀의 말투를 따라하며 짐짓 놀리듯 하니, 품속에서 조그맣게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리시면 싫습니다."

하트 직격! 심장이 벌컥대며 뛰어댄다. 가끔 보이는 이런 여성스러운 모습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정말 이 여자가 수백년을 검을 든 자들의 왕으로 군림해온 그 여자가 맞나 싶다. 이런 모습을 숨기고 어찌 수백년을 홀로 외로이 살아왔을까.

비록 악연으로 시작한 관계였지만 지금의 내게 있어 그녀는 더 없이 소중한 존재다. 모든 과오를 묻어두고 이리 나를 대하는 여자를 세상에 어떤 남자가 사랑하지 않고 베길까.

"그보다 아버님하고 어머님께 찾아뵌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너무 격조하면 서운하실까 염려됩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일간 찾아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라 바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며칠 전에 전화가 왔어요. 날짜 잡혔으니 그날 식 치르라고 하더라고요."

내 말에 품속에서 꼼지락 거리던 그녀의 몸이 굳는다.

"세상이 어수선하긴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경사가 더 중요하다고 이번에는 안된다 하기 없다던데요."

바짝 굳은 그녀의 몸이 다시금 익어 오른다.

"그런 것은 허례라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이미 당신과 내가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어찌 그런 허례허식에 목을 매시는 지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녀가 임신을 한 사실을 알고 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을 갖고 그녀와 내 관계가 조금은 부드러워지자 나는 바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배가 부풀어 오른 그녀를 이끌고 나타난 나를 본 아버지와 어머니의 놀란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찌 어찌 설명을 드리고 결혼을 승낙 받았으나 부모님은 그녀가 그저 고아로 지낸 27살의 아가씨인 줄 알고 있다. 차마 당신들의 며느리가 우리 조상님들보다 더 전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유니온에서 준비해 준 그녀의 새로운 신분증에 적힌 프로필을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부풀어 오른 배 탓에 식을 뒤로 미루다보니 어느새 연아가 태어나고도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제는 꺼릴 것도 없으니 식을 올리자는 데 그녀는 저리 싫다고 질색을 한다. 여느 여자 같았으면 본인이 더 호들갑을 뜰 문제를 저렇게 매번 피하기만 하니 나로서는 갑갑할 지경이다.

"아니.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싫어해요? 부부가 결혼을 하면 결혼식 하는 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이번만은 나도 양보할 수 없던 문제라 그렇게 그녀를 채근하니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다.

"수백년이나 살아온 노물인 저를 이렇게 대해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어찌 그런 것까지 바라겠습니까. 사람이 과욕을 부리면 하늘이 벌을 내립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강한 여자다. 무인으로써, 인간으로써 존경할 정도로 대범하고 강한 사람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여인으로써는 자신이 없는 모습을 이따금씩 보이곤 한다.

자신이 없는 모습을 이따금씩 보이곤 한다.

내가 그녀에게 저지른 과오로 인해 그녀를 대하는 데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녀는 스스로 노물이라 말하고 자신이 여인으로써 행복한 것은 치태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아내로서, 또 연아의 엄마로서의 역할에는 최선을 다하니, 그녀의 마음은 도통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런 소리 말아요. 나야말로 전의 일을 생각한다면 당신 손에 죽어도 할 말이 없어요."

딴에는 그녀를 편든답시고 한 말인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이 매섭게 변한다.

"그런 끔찍한 소리거들랑 하지를 마십시오. 악연이어도 연이 닿았고 지금은 이리 마음으로 그대를 섬기는데 어찌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그런 소리를 하실 때마다 저는 너무도 괴롭답니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동자가 금세 뿌옇게 변한다. 그간 어찌 그런 강철 같은 모습만 보이며 살았나 싶게 속은 여린 그녀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내가 실언했어요. 다시는 그런 소리 안 할게요."

몇 번이나 다독이지만 그녀는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친다. 자꾸만 빠져 나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꽉 끌어안고 내 쪽으로 끌어당기니, 그녀의 발버둥이 조금씩 멈춰간다.

그렇게 품에 그녀를 안고 있기를 한참,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아직도 화 안 풀렸어요?"

그렇게 말하니, 그녀가 고개를 도리질 친다.

"그.. 그게 아.. 아니라."

품에 안긴 그녀의 뒷목이 이상하게 붉다.

"저.. 저... 저기 다.. 당신의... 나.. 나... 남성이..."

그녀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의 존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서 그녀를 찌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자꾸만 찌르는 나의 존슨 탓에 엄청 당황한 듯 했다. 나 역시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꿋꿋하게 그녀를 앉은 손을 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간신히 평정을 찾은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데 그녀가 물었다.

"근데 왜 저를 안지 않으십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라 몸이 굳었다. 그녀가 물은 것은 나의 치부를 들추고 다시금 수면 위로 띄어 올리는 것.

"제가 수백 년이나 살아온 노물이라 그러시는 것인지요."

내게 있어 그녀는 사랑하는 아내 그 뿐이다. 수백년을 살아왔다든지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하지만 뭐라 대답하기가 곤란해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뭐라 대답한단 말인가. 당신을 강제로 범했던 나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당신이 허락하기 전에는 안지 않기로 했겠다고.

"혹여 전날의 일로 그러시는 겁니까?"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날을 잔뜩 세우고 날카롭게 나를 찔러온다.

"그날의 일은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이러는 것은 우리 연아까지 욕보이는 짓입니다."

정말 화가 난 표정으로 말을 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어깨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줄 뿐이다.

"연아가 부끄러우십니까? 진정 그런 것입니까?"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노여움을 보이지 않던 그녀가 무섭게 화를 내고 있다. 나는 서둘러서 말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당신에게 감히 그럴 면목이 없어서..."

내 말에 등을 보이고 있던 그녀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노여움과 안타까움을 가득 담은 그 시선에 나는 눈을 회피했다.

"저를 보십시오."

그녀의 손길이 내 얼굴을 잡고 도망가지 못하게 고정한다.

"저는 이미 당신의 내자입니다. 그날 마음을 그리 먹은 이후 단 한 번도 당신을 원망해본 적도 미워해본 적도 없습니다."

올곧은 검은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처음에는 물론 원망도 하고 미워도 했습니다. 죽이고도 싶었지요. 하지만 연아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는 모든 게 부질없다 느꼈었습니다. 천명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날 제가 잃은 것은 허울뿐인 힘과 부질없는 청백일 뿐입니다. 그리고 얻은 것은 더욱 크답니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그 상처를 이겨냈고, 그리고 나를 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오직 한가지만을 담고 있다. 무한한 신뢰.

나도 모르게 눈앞이 뿌옇게 바뀐다. 질끈 눈을 감고 있으니 따뜻한 감촉이 눈가를 쓸어간다. 그 촉촉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에 몸을 움찔거리니 정성스러운

입맞춤이 두 눈을 옮겨간다.

"저는 당신과 연아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눈을 뜨니 더 없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 작품 후기 자 다음편은 어찌 될까요.

검후와 주인공의 이야기는 꼭 짚고 넘어갔어야 했죠. 물론 저런 말이 당시의 검후의 심정을 전부 대변하진 않겠지만 남은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 이쯤에서 지금은 그냥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인정해주세요!!!!

둘 사랑하게 해달라고요!!!!

과연 제가 다음편을 붕가로 채울까요. 아니면 넘어갈까요. 그건 저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열화와 같은 선추코쿠에 따라 다음 편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ㅋ

그럼 다들 또 봬요!

*설문조사 진행중입니다!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시어 참여해주세요! 서평 이벤트도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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