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80화 (80/223)

< --  2-1. 그리고 얼마 후.  -- >

서장과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내내 이능력자 범죄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하다. 일단 자세한 자료는 추후 인편을 통해 보내준다니, 봐야 알겠지만 내가 알기로는 독에 관련된 이능을 지닌 이는 많지 않았다. 게다가 3등급 내지 2등급 이상의 이능력자라니,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일전에 유니온과의 담판 때 보았던 중년 남자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겠지.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해도 유니온의 간부씩이나 되는 이가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할 리는 없다.

"다 도착했습니다."

생각에 잠겨있는데 동행한 경찰관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태워다줘서 고맙다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바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원에 나와 있는 그녀가 보였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에 도도하면서도 차분한 얼굴 선이 언제 봐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반쯤 감은 눈으로 뽀얀 가슴을 드러내놓고 있다. 그 가슴에 안긴 조그만 포대기가 꾸물거린다.

세상에는 검후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여인이자 나의 아내인 전지현이다.

"나 왔어요."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녀의 반쯤 감긴 눈이 나를 향하고 이내 보기 좋게 휘어 올라간다.

었다. 그녀의 반쯤 감긴 눈이 나를 향하고 이내 보기 좋게 휘어 올라간다.

"볼일은 잘 보고 오셨지요? 피곤하실 텐데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가까이 다가서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피곤할 게 뭐가 있어요. 별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그녀의 가슴을 물고 입을 오물거리는 아기의 모습에 나는 눈도 떼지 못하고 대꾸했다. 너무나 조그맣고 가녀려서 차마 품에 안기조차도 겁나는 아가의 모습이 너무나도 경이롭다. 감은 눈으로 입을 오물거리다가 이내 입을 벌리며 젖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한참 있다가 다시 입을 오물거리며 젖을 찾는다.

"어이구. 우리 연아 잘 있었어?"

자다 깨고 다시 자며 젖을 빠는 아가가 놀랄까봐 조용하게 속삭이니 연아가 고개를 뒤척거린다.

"아비의 목소리를 알아듣나봅니다. 저리 몸을 뒤트는 것을 보니."

나와 아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자애롭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나를 저런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추호도 하지 못했었다. 그녀는 존재만으로 사위를 압도했으며 홀로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검을 든 자들의 왕이었으며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였다.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나를 저리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 보고 있다. 연아를 갖게 되는 과정에 있어서 우여곡절이 많고, 지금 생각해도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참담한 일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저 미안함과 고마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또 옛날 생각을 하시는 게로군요."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찡그린다. 그 살짝 미간을 찡그린 모

습조차 곱기만 하다.

"설마 아직도 자책하고 있는 건 아니시겠지요?"

따사로운 미소를 거두고 조금은 엄한 얼굴을 해 보인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지금은 그저 미안하고 고마운 걸요."

내가 대꾸하자 그녀의 얼굴이 마뜩찮다는 표정을 떠오른다.

그날의 내가 벌인 일은 강간. 아무리 심마에 빠졌었다고 하나 용서받지 못할 행동이었다. 당시 그녀가 받은 상처와 괴로움은 내가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괴감에 빠진 나를 다독여 지금에까지 이르를 수 있던 것은 그녀의 덕이다.

나 역시 그런 그녀를 위해 평생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리라 마음먹었지만, 그녀는 그저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를 뿐이라는 말을 내게 수 없이도 해준다.'내가 그곳에 있었던 것도 순리요, 또 당신이 심마에 빠져 그리 된 것 역시 순리 일 테지요.

저는 가끔 생각한답니다. 지닌바 힘이 천하를 오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제게 주어진 천명은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 왜란 때도 그 이후에도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없었지요. 그저 일신의 재주를 갈고 닦았을 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인세와의 연이 끊어졌던 게지요. 하지만 연아를 얻고 당신을 만나 천명이 다시 내게 주어졌답니다. 강토에 다시 환란이 찾아왔고 지금의 저는 천명에 닿아 있습니다.'당시의 내 입장에서는 뜬구름을 잡는 소리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나 역시 과거의 그녀와 비슷한 힘을 얻고 알게 모르게 스스로의 힘을 사용하는 데 있어 두려워지고 있으니까.

내가 그리 말하니 그녀가 대답하기를,'인세의 난리와 지금의 환란은 다릅니다. 지금이라면 인세를 어지럽히는 괴수가 있으니 아마 당신과 제게 새롭게 주어진 천명은 그것과 관계되었을 터, 지닌바 힘을 두려워 마십시오.'

"안으로 드시지요. 아직 여름이라고 하나 물기를 머금은 공기를 연아에게 오래 쐬일 수는 없답니다.'

그녀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언제나처럼 내가 상념에 빠질 테면 떠오르는 그녀의 마뜩찮은 얼굴, 책망하는 얼굴로 나를 집 안으로 이끈다.

조금 찔금한 얼굴로 집에 들어서니 거실의 쇼파에 누워 무표정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현지의 모습이 보인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보니 코미디 프로그램이라도 보고 있는 듯 한데 현지의 표정은 무표정하기만 하다.

태연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현지를 보니 머리가 복잡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경찰서를 다녀왔는데. 저는 소파에 늘어져서 TV나 보고 있어? 어차피 뭐라고 해봐야 알아먹지를 못하니 나는 그저 한숨만 쉴 뿐이다.

"저 아이가 또 무슨 일이라도 벌인 겝니까?"

내가 한숨을 쉬며 현지를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내게 물어온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방으로 가요."

의아한 얼굴을 해보인 그녀지만 딱히 재촉하거나 하진 않았다. 현지가 그간 벌인 일이 워낙에 많았던지라 그녀 역시 그런가보다 하는 기색이다.

"먼저 몸부터 세욕을 하시지요. 저는 연아를 재우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비를 잔뜩 맞은데다가 몬스터의 노린내가 몸에 벤 듯해 찝찝하던 차다. 사양치 않고 바로 샤워를 한다. 개운해진 몸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오니 그녀가 연아를 재우고 있다.

"자장 자장 우리 자장자장 밭에 불이 붙고고개 넘에는 잠이 온다건너집 애기는 울기만 한다.

우리집 애기는 잘두 잔다.

"청아하고 고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불러주는 그녀의 모습, 나는 잠시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본다. 편안한 표정으로 연아를 토닥이며 곱게 불러주는 자장가가 마치 속삭임처럼 달콤하다.

지금에 와서도 그녀의 나이가 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수백년이 넘는 살아온 여인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모습은 20대 후반의 아름다운 여성이다. 하는 말에는 현기가 가득하고, 비록 악연으로 맺어진 부부의 연이지만 지금의 그녀는 한번도 불편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현명한 아내라니 내게는 과분한 인연이다.

"다 씻으셨으면 자리에 누우시지 왜 그리 빤히 바라보십니까."

한창 연아를 재우는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그녀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작게 질책한다. 나무라는 기색보다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언제나처럼 고문 목이 붉으스름하게 변해있다.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새어 나온다. 일이야 어찌 됐건간에 저런 아내를 얻은 나는 행운아다. 선녀의 옷을 숨겨 선녀를 마누라 삼은 나뭇꾼의 심정이랄까. 물론 내 경우는 훨씬 추잡스러운 경우지만.

"누구를 닮아서 이리 착한지..."

금세 잠이 들은 연아를 바라보는 눈빛이 자애롭다. 여느 어머니와도 같은 모습이지만 내 눈에는 더 없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리 와요."

내가 침대에 누운 채로 그녀를 부르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주춤 주춤거리며 물러서며 당황해서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저도 수욕 전이라, 먼저 수욕부터 하고 나오겠습니다."

이리 저리 시선을 피하다가 쌩하고 욕실로 사라진다. 홀로 남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곱게 잠이 든 연아를 바라본다.

앙증맞은 코와, 조그만 입술. 동그란 얼굴에 붉으스름한 뺨. 언제 봐도 사랑스러운 내 딸의 모습이다. 손발은 또 어떤가. 한입에 넣어도 쏙 들어갈 듯 조그만 손바닥과 발바닥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다. 괜히 손이 움찔 움찔 거리는 기분에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잘 울지도 않고 속도 썩히지 않는 연아지만 자다가 깨면 무섭게 울어댄다.

가만히 누워서 오늘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데 욕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잡티 하나 없는 새하얀 피부가 막 목욕을 마친 뒤라 그런지 불그스름하다. 채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늘어트린 채 수줍은 표정으로 주춤주춤 다가오

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행복감을 느꼈다.

저런 모습을 보고 누가 그녀가 검을 쓰는 만인의 왕이라고 상상이나 할까.

"베.. 베개가 젖습니다. 머리를 말리고 눕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옆자리를 팡팡 치며 손짓을 하자 그녀가 새빨간 얼굴로 냅다 화장대 앞에 앉는다. 샤워타올을 두른 그녀의 모습이 고혹적이지만 나는 삿된 마음을 품지 않았다.

연아를 가진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다시 그녀를 안지 않았다. 녀를 강제로 범한 것에 대한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리 한 것이었는데,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허락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이런 상태를 유지할 생각이다. 남들이 들으면 우습다 할지 모르지만 내가 그녀에게 지은 죄를 사죄하는 마음을 이렇게나마 지켜간다.

혈기 넘치는 몸에 아름다운 그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나는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참아낸다.

"현지가 또 사고를 쳤어요."

내가 그리 말하자 이리 저리 시선을 피하던 그녀가 눈을 마주 쳐온다.

"사고라니요? 아까 잠깐 나갔다 온 것이 다였는데 그세 사고를 쳤답니까?"

내가 그윽하게 바라보자 고개를 다시 돌리는 그녀다.

"네. 경찰서장 마누라의 차를 불태워버렸더군요."

내 말에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간 현지가 사고를 많이 치기는 했지만 직접적으로 이능을 사용해 사고를 친 건 드문 일이라 그녀 역시 놀라움이 큰 듯 하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몰경우한 사람이 이 부근에 살고 있었군요."

딱히 현지를 나무라는 기색은 보이지 않아 나 역시 고개를 흔든다. 그녀의 담대함은 이따금씩 나를 놀라게 할 때가 있는데 생명에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그녀는 어지간한 일에는 그저 웃어 넘기는 대범한 여자다.

나는 뒤이어서 서장과 나누었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번만은 얼굴을 궂힌 채 이야기를 듣던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어디든 주어진 힘에 걸 맞는 수양을 이루지 못한 이들이 사고를 치게 마련이지요. 아까운 생목숨이 그리 되었다니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안타까움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내게 앞으로 어찌 할것인지를 물어온다.

"글쎄요. 일단 자료가 와봐야 알겠지만, 이 일 내가 처리해야겠지요?"

말하기가 무섭게 나를 쏘아보는 그녀.

"그럼 지켜만 보려고 하셨습니까. 생목숨이 부질없이 스러지고 있는데 어찌 그러십니까."

그녀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여인이다. 어차피 나도 딱히 다른 할 일이 있었던 건 아니라 이 사건을 해결해보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맡으려고 했어요."

그녀가 정색하는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나는 그저 웃고 말았다. 놀림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못마땅한 얼굴을 해 보인 그녀에게 다시 손짓을 했다.

"머리 다 말랐어요. 누워요."

그녀의 얼굴이 다시 새빨게진다.

============================ 작품 후기 으어어. 두통이 심합니다.

이게 노블 일일 연재라는 게 쉽지가 않군요. 비축분이라도 만들어두면 나을 것을, 비축분따위 못 쟁여두는 토끼입니다. 인내심이 고자레벨이지요.

어쨋건 오늘도 일단 한편 들어갑니다. 사정 되는 만큼 연참모드 유지합니다.

그리고 독자님들께 한가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글이 다른 노블 글들처럼 템포가 빠르지 않습니다. 사실 친절한 글도 아니고요. 그러니만큼 저는 복선과 떡밥 회수가 느린 편입니다. 혹여 의문이 가거나 이해가 안가는 전개가 오더라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하고 기다려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립니다.

선추코쿠로 제 연참욕구를 불태워주소서.

*서평이벤트에 참가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네분께는 조만간 노블 이용권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벤트가 종료가 된 건 아니니 더욱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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