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73화 (73/223)

< --  1-6. 강해지다.  -- >

정론이긴 하지만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그다지 신뢰가 가질 않았다. 전부터 간직해온 의문을 꺼냈다.

"그렇다고 하면 뭐 거절할 이유가 없지만. 먼저 한 가지 물읍시다."

건들거리는 내 태도에 서울지부장의 눈매가 치켜 올라가다가 이내 원상태로 돌아온다. 아마 지현의 눈치를 보고 있으리라.

"질문해라."

한자 한자 씹듯이 내뱉는 모양새를 보니 어지간히 심사가 뒤틀렸나보다. 어차피 아쉬운 건 저쪽이니 나는 꿇릴 게 없다.

"지난 괴수와의 전투 때 당신들은 어디 있었죠?"

전혀 생각지 못했던 질문인지 서울지부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금방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내가 그녀의 표정을 똑똑히 본 후였다. 게다가 주변을 살펴보니 유니온의 고위 인사라는 작자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굳어있다.

번인가 입을 오물거렸지만 뭐라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오래 전부터 간직해왔던 의심이 점차 커져갔다.

"분명 작전 전에 듣기로는 당신들도 토벌전에 참가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당신들을 전투에서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거죠?"

언제고 꼭 대답을 들으리라 생각했던 일이었던지라 나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우리는 별동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답은 서울지부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40대는 됨직한 거구의 남자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별동대라면 뭘 위한 별동댑니까?"

내 질문에 그는 얼굴을 붉히더니 버럭 역정을 냈다.

"검후의 체면을 보아 참고 있자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유니온이 당신에게 그것을 설명해야 할 이유가 뭐지?"

애초에 다혈질인 사람이었는지 그의 말에 유니온의 인사들이 앗차하는 표정으로 그를 만류한다. 나 역시 금세 사나운 얼굴을 해보인 지현을 진정시켰다.

"토벌대의 참가자라는 것만 해도 들을 자격은 넘친다고 생각하는데?"

저리 불쾌한 얼굴을 숨기지 않는 작자에게는 나 역시 곱게 대해줄 이유가 없저리 불쾌한 얼굴을 숨기지 않는 작자에게는 나 역시 곱게 대해줄 이유가 없다. 자연스럽게 반토막이 된 말의 끝에 남자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어대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 같았지만 나는 코웃음을 쳤다.

내 태도를 도발이라고 생각했는지 그가 몸을 움찔거리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만류하고 서울지부장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지금 중요한가? 우리 역시 직접적인 괴수와의 전투는 치르지 않았지만, 안개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케이. 걸렸다. 나는 그 허술한 논리에 지현을 쳐다봤다. 내 시선에 그녀가 한발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내 감각에 걸리는 다른 이능력자들은 없었다. 안개 속에 있던 인간들은 원정대가 전부다."

그녀의 말에 나는 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무엇을 꾸몄는지, 또 원정대가 괴수와 사투를 벌이는 시간에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거짓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들 스스로 구린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시 설명을 요구했다.

"그렇다는군요. 여기서 저 사람의 능력을 의심하는 분 계십니까? 만약 없다면 이제 진실을 이야기 할 차례라고 생각하는데요?"

내 말에 맞추어 지현의 기세가 날카로워진다.

"꼭 이야기를 들어야겠는가. 사정이 있어 말할 순 없지만 우리 또한 대한민국의 이능력자.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궁색하게 입을 놀리는 이는 또 다른 인물. 20대로 보이는 얼굴이지만 그 노회한 눈빛만 봐도 겉보기와는 다르게 나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네. 저는 꼭 그 이야기를 들어야겠습니다."

내가 강경하게 나가자 서울지부장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구조작전 건은 없던 이야기로 하지. 우리도 더는 부탁하지 않겠다."

그게 당신들의 선택인가? 나는 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장난하십니까? 뭐가 그렇게 구리길래 대답을 못하는 겁니까. 그리 말하면 내가 예 알겠습니다. 하고 갈 줄 알았나보지?"

이제는 숨길 것도 없는 적의를 한껏 드러냈다. 언제나처럼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대는 그들의 태도에 신물이 난다.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우리의 대답을 원하지 않았었나요? 부탁을 들어줄 필요가 없으니 우리는 대답할 의무가 없어요."

가까스로 노기를 참고 있던 거구의 남자 곁에 있던 여자가 말하고는 표독스러운 눈빛을 보내온다.

그래. 새로울 것도 없다. 이들은 이런 이들이었다.

"분명 저는 원정대의 참가자로써 당신들의 해명을 원한다고 했을 텐데요."

내가 이리 나올 줄은 몰랐는지 주변에 둘러 선 유니온의 인사들이 술렁댄다.

"수백의 이능력자들이 사투를 벌일 동안 당신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적의는 보이되 힘은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건들거리는 태도로 실실 웃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거구의 남자를 도발했다. 다른 이들 역시 거구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심사가 뒤틀린 듯 했지만 이중에서 유치한 내 도발에 넘어올 사람은 저 사람 하나였던 탓이다.

"이..!

이!"

이를 악물고 몸을 떨어대는 남자를 사람들이 붙들고 소란을 떤다. 나는 그런 그에게 턱을 치켜 올리며 한마디 했다.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었는지 말해보라고."

내가 듣기에도 밉살스러운 말투라 저 남자가 어찌 나올지 기대가 된다. 내 명백한 도발에 남자가 움찔거리던 몸을 멈추고 표정을 굳힌다. 그가 조금은 진정한 듯 하자 주변에 있던 유니온의 인사들이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이렇게 나오면 시시한데... 맥이 빠진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갑자기 빛이 번쩍인다. 고개를 돌리니 진정되었다고 생각한 남자가 양손 가득 넘실거리는 진녹색의 기운을 쥐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잡어!"

급박하게 여기 저기서 이능 발현의 빛이 터져나오고 유니온의 인물들이 남자에게 달려든다.  하지만 이미 작정하고 있던 남자의 반응이 더 빨랐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 재미있지.

양손을 그러쥐고 앞으로 뻗은 남자의 손을 따라 진녹색의 안개가 뻗어왔다. 일그러진 형체를 유지하고 빠르게 달려드는 기운을 보던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쾅!

"크억!"

귀를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비명이 사방을 울린다.

남자의 폭주 탓에 소란스러워졌던 주변이 고요하게 가라앉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얼빠진 표정으로 나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독인가? 덩치답지 않게 좀스러운 능력을 갖고 있었네."

조롱의 말을 던지지만 그 누구도 내 말에 반박하지 않는다. 심지어 내 조롱의 대상인 거구의 남자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지.

남자는 온몸을 옭아맨 단 한줄기의 가시덤불에 꽁꽁 묶여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유물의 힘이자 나의 힘이기도 한 탐욕스러운 줄기들이 꿀럭대며, 뭔가를 집어삼키고 있다.

나는 장난스럽게 쥐고 있던 진녹색 기운을 흩어버리곤 나와 연결된 굵직한 줄기를 그러쥐었다. 꿀렁대며 나를 향해 넘어오던 뭔가가 강하게 움켜쥔 내 손아귀에 막혀 터질 듯 부풀어올랐다.

"그만 둬!"

꽤나 친밀했던 사인지 거구의 곁에 있던 여자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른다. 그만둬 정말?

"이거 놓으면 저 남자 죽을 텐데?"

장난스럽게 지껄이자 서울지부장이 한발 앞으로 나선다. 그녀라면 내 이능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테니 내 손아귀에 막힌 줄기를 통해 들어오는 것이 남자의 생명력이라는 것을 깨달았겠지.

"이쯤 해둬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여전히 명령조가 다분한 음성에 나는 피식 웃었다.

"먼저 시작한 건 당신들이잖아? 나는 단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라고."

내 말 한마디에 안색이 변하는 유니온의 인물들. 나는 그간 쌓여왔던 울분이 조금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유치하지만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홧병이 날 테니까.

아니. 어쩌면 갑작스레 생긴 힘을 자랑하고 싶은 치기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렇다면 저들이 어쩔 것인가. 내가 쥐고 있는 붉은 줄기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부풀어 올라있다. 어쩌다보니 인질 잡고 협박하는 모습이 되었다. 내가 악역이라도 된 기분이다. 내친김에 나는 비열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거 터지면 저 남자 죽어. 여기 잔뜩 부풀어 오른 거 보이지? 저 남자의 생명력이거든."

재미있지도 않은 사실을 세상에 다시없을 농담이라도 되는 냥 키득이며 지껄이니 유니온의 인물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들 입장에서는 거구의 남자가 저렇게 쉽게 당한 것부터 모든 상황이 예상과는 다를 것이다.

"자. 대답해봐. 무슨 짓을 꾸민 거냐."

그들이 고민 하는 동안에도 남자의 생명력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다 곧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잠시 그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던 나는 힘을 거두어 들였다. 줄기 끝에 모였던 생명력이 다시 원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악당 흉내를 내기는 했지만 정말 악당이 될 생각은 없었다. 다혈질 아저씨에게

본때를 보여준 것만 해도 내게는 만족스러운 결과였지만.

이능을 거둬들이자 남자가 몸을 휘청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남자가 쓰러지기 전에 부축해서 그가 바닥에 나뒹구는 일은 없었다.

"나 아직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고."

내가 다시 재촉했지만 그들은 그저 경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을 장난스럽게 바라보는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지현의 시선을 느꼈다.

혹시라도 다시 심마에 빠져들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빛이라, 나는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제야 조금은 안도한 눈빛으로 마주 미소를 지어보인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왜 그랬어요? 그런 성격 아니잖아요."

부산지부를 빠져 나오자마자 바로 물어오는 지현의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간 쌓인 게 너무 많았거든요. 특히 서울지부장이라는 여자는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뭐 애꿎은 아저씨 한명만 험한 꼴 봤지만."

말하다보니 절로 키득거림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이런 내 태도를 딱히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다시 의문을 표하진 않았다. 그저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많았나 하고 생각하는 눈치다.

"근데 그보다 대답 안 들어도 되겠어요?"

원래는 말이 많지 않은 그녀였지만 스스로 여인의 삶을 살겠다고 말한 이후부터는 조금은 말이 늘은 그녀다. 내가 존칭을 하는 것을 어찌나 싫어하던지 서로 편한데로 말하기로 합의를 보는 것이 꽤나 힘들었었다.

나는 그녀의 대답에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알고야 싶죠. 근데 지금 그들을 힘으로 눌러서 대답을 듣는다고 그게 진실일까요. 당신도 봤잖아요. 저들은 틈만 나면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라고요."

내가 그리 대답하자 그녀는 바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지금 아니어도 앞으로 들을 기회는 있잖아요. 이제 시작이에요."

나란히 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시간이 적지 않게 흘렀지만 여전히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모습에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이제 시작이다. 누구에게도 끌려다니지 않고, 그저 나만의 길을 가리라.

============================ 작품 후기 드디어 1부 완결입니다.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2부에서는 본격 형준깽판물이 될 예정이.. 려나요?

전개가 자연스럽지 않았는지 많은 분들께서 지적을 해주시는군요. 2부를 쓰면서 천천히 수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검후의 돌변에 대해 거부감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변을 해보자면 검후는 수백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 당시의 여인들의 가치관이 지금과 같을까요?

정조관이야 더욱 절절했겠지만 이미 품에 안은 생명을 무시할 정도로 모질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해서 그리 전개했었는데, 아마 연애감정도 없이 덜컥 저런 상황이 오니 다들 강간으로 치부하시는 군요. 사실 강간이란 말이 맞습니다. 주인공은 두고 두고 그 죄업을 갚아갈테니 좀 지켜봐주십시오.

일단 검후와의 에피소드는 저 뒤에 외전으로 연재가 되어있으니 그 부분을 읽어주세요. 거부감이 드시더라도 소설일뿐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작위적으로 스토리를 꼬은 듯한 느낌이라는 의견은 잘 고민하여 더욱 매끄러운 전개로 일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과 선작, 추천, 코멘트, 쿠폰을 주신 분들 전부 감사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선추코쿠는 글쟁이의 좋은 영양분입니다. ㅎㅎ이미 지난 휴재분은 채웠지만 당분간은 연참모드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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