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 강해지다. -- >
용모가 돌아가고 난 후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뭔가 바깥소식 중에 걸리는 것이 있나 했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어찌 그렇게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십니까."
요 근래 들어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엄한 표정이다.
"저와 연을 맺은 것을 후회하십니까."
잔뜩 굳은 얼굴로 매섭게 쏘아대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용모의 앞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떳떳히 밝히지 않았던 것을 그녀는 책망하고 있었다.
"지난 일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이미 저는 마음으로 그대를 지아비로 섬기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어가 그리 마음에 짐이 되는 것인지요."
그녀의 말에 한 점 부끄러움이나 후회가 없다. 나는 그것이 더욱 부끄러워져 고개를 깊게 숙였다.
저는 이미 마음으로 그대를 따르고 있건만, 어찌 그리 못난 모습을 보이시려는 겝니까. 아이가 슬퍼합니다."
그녀의 강인함이 내게는 불가해하기만 했다. 힘을 잃고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순리라고 여기고 있다.
그것이 저 옛날의 여성상 탓인지 그녀 개인의 성향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비록 내가 그녀가 살던 시대를 살아보진 않았지만, 예전의 여인이라면 보쌈을 당해도 그냥 살아가지 않았던가. 시대 착오적인 발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있어 그녀는 불가해한 존재다.
"나는 당신만큼 강하지 않아요."
꼴불견이다. 이런 내 모습은.
내가 다시 존칭을 사용하자 그녀의 얼굴에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해졌지만 내 말을 자르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내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그 어느 여자보다 현명해 보였다.
"나 때문에 원치 않은 임신을 한 당신을 볼 낯이 없고, 한 순간에 강대한 힘을 통째로 잃어버린 당신에게 면목이 없어요. 괜찮다고 말하는 당신을 볼 때마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요."
못났다. 정말 못났어.
"심마에 빠졌다고 하나 당신에게서 빼앗은 힘이 지금도 내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고, 당신의 몸 안에는 또 다른 생명이 있어요. 나에게 그 일은 과거가 아닙니다."
말을 하다 보니 스스로의 말에 심장이 베어가는 느낌이다.
"괜찮다 말하지만 가끔 당신이 멍하니 있을 때마다 저는 어찌 할 바를 모르겠어요... 그럴..."
복받치는 감정에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발음이 엉망이다. 갑자기 그녀가 내게 안겨왔다.
검후라는 별호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못난 내 품을 다 채우지도 못할 만큼 가녀리기만 하다.
"그리 보이셨다면 멍하니 있지 않겠습니다. 이미 주어진 천수 이상을 검후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살아왔던 저입니다.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무인으로 살아
온 저는 이제..."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한자 한자 진심을 담아 내게 말을 건넨다.
"여인 전지현으로 살아보렵니다."
어색하게 늘어져 있던 내 손이 그 진정 어린 말에 나도 모르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담담하게만 들렸던 그녀의 음성이었지만 뒤 늦게 발견한 그녀의 가는 목가가 온통 새빨갛다.
멀뚱멀뚱 우리가 하는 냥을 말없이 지켜보는 현지 앞에서, 그날 나는 그렇게 한 여인의 지아비가 되었고,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아..."
얼빠진 소리를 내는 서울지부장 신은혜의 얼굴이 보기 드물게 넋 나간 표정이다. 그녀만이 아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표정이 전부 똑같았던
지라 딱히 그녀의 얼굴을 보고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이의 행사에 일절 관여치 않았으면 좋겠구나."
오직 나와 검후 지현, 현지만이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저... "
한참 만에 정신을 수습한 서울지부장이 뭐라 말을 하려는지 입을 열었지만, 지현의 말이 더욱 빨랐다.
"듣지 않겠다. 나는 협상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통보를 하러 온 것. 협상을 원한다면 그대와 격이 맞는 사람과 하거라."
비록 힘을 잃은 그녀였지만 절대자의 경지에까지 올랐던 그녀의 기세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그녀가 힘을 잃었는지 조차 모른다. 서릿발과도 같은 그 위엄에 서울지부장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이 현지라는 아가씨 역시 나 검후의 보호 아래 있는 아이니 그대들의 밥그릇 싸움에 끌어들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으리라."
우리는 지금 유니온의 총본부가 되어버린 부산지부에 와 있다. 일전부터 유니온과의 관계를 정리할 필요가 있었던 차라 수련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들린 것이다.
주변을 둘러싼 수 많은 이들은 최하 2등급 이상의 고위 이능력자이며 대한민국 유니온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이라 할 수 있다. 나 홀로 왔다면 이런 거창한 환영인파는 없었겠지만 나와 함께 한 이는 전 세계를 통 털어서도 몇 되지 않는 1등급 이능력자 검후다. 맨발로 뛰어나와 영접해도 과하지 않은 대접일 테지.
"그럼 앞으로 마주 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전부터 유니온과 나와의 관계를 들어온 그녀의 말이 한마디 한마디 얼음짱처럼 냉랭하다. 그간 거들먹거리며 다른 이들을 깔아보던 이들이 지현의 말에 반박조차 못하고 있다.
나는 그저 그녀의 뒤에서 가만히 그들이 하는 냥을 지켜보고 있을 뿐. 여자 뒤에 숨어서 그 위세를 빌려 으스대는 얼간이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미 이곳에 오기 전에 그녀와 입을 맞춰둔 상태였다. 그들을 압박하는 데 필요한 것은 검후의 이름 하나면 족하니 그저 자기에게 맏겨 두라는 말에 그대로 따르는 중이기도 하고.
설령 이들이 나를 우습게 본다고 해도 상관없다. 악연으로 얻게 된 힘이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힘 중 태반을 흡수한 상태, 지금이라면 이들 전체가 달려들어도 두렵지 않다. 곁에 있는 일행들도 저 한 몸 지킬 힘은 있다.
지현 같은 경우에도 스스로 지닌바 힘을 거진 다 잃었지만 지금의 힘만 해도 대인전투에서는 최소 2등급 이상의 힘을 발휘할 것이다. 거력을 이용해야 하는 대몬스터전은 모르겠으나 인간과의 전투라면 지금 상태로도 여기 있는 그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다. 이미 그간의 대련을 통해 입증 된 사실이다. 현지 역시 반 백치상태긴 하지만 지닌 힘만으로는 고위 이능력자. 아마 조금이라도 자극했다가는 부산지부 자체가 불바다가 될 것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생각을 마쳤는지 서울지부장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검후께서 그리 하라면 저희 입장에서는 반박할 여지가 없지요. 김형준씨와 이현지 양에 관련된 모든 일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유니온의 인사들은 온건파도 있고 급진파도 있다. 독단일 게 뻔한 서울지부장의 말이지만 검후의 위명이 대단하긴 대단한지 이견을 보이는 이들은 하나도 없었다.
나와 지현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소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의 모습에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건방지구나. 흥정을 하려면 격에 맞는 상대를 찾으라고 이야기 했을 텐데."
역시나 그녀가 먼저 나섰다. 처음 이곳에 오기 전부터 내가 나설 일도 없을 거라 못 박았던 만큼 적극적으로 유니온의 인물들을 압박하는 모습이 매섭기 그지없다.
기운을 잃은 그녀의 기세는 전과 같이 인외의 경지로 보이진 않았지만 좌중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해보였다.
"검후라는 이름이 그대에게는 우스운가 보구나."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유독 서울지부장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있다.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휘청거리는 게 그녀에게만 지현의 기세가 몰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그게 아니라..."
힘겹게 입을 여는 그녀의 모습이 일전에 봤던 한 없이 건방졌던 모습과는 천지차이다. 그녀가 쩔쩔 매는 모습을 보면서 저열한 만족감이 피어오른다. 표정을 관리하려 하지만 자꾸만 입가가 치켜 올라갔다.
"죄.. 죄송합니다. 조건이 아니라 부탁이 있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지난 과거가 치유되는 느낌이다. 약간 한심한 생각이지만 마누라 잘 얻은 덕을 보는 기분이랄까.
가만히 그녀가 유니온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대충 서울지부장의 말을 들어볼지 의견을 묻는 듯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들의 모습에 사람들이 뜨악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떠보였다.
"말하라. 들어줄지 말지는 듣고 결정하겠다."
그녀가 이미 기세를 거뒀는지 서울지부장이 숨을 몰아쉰다. 잠깐 사이에 꽤나 지친 듯한 모습에 과연 기운을 잃어도 그녀는 검후다 싶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몸을 추스르던 서울지부장이 잠시 내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
었다.
"서울 생존자 구출 작전을 도와주십시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던지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서울지부장의 설명이 빠르게 이어진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생존자는 최소 200만명 이상입니다. 이미 군부에서 구조작전을 진행할 거라는 정보가 있지만, 그쪽 사람들 엉덩이 무거운 거야 유명하니 시일이 늦지 않을까봐 걱정입니다."
답지 않게 옳은 소리를 하는 서울지부장이다. 지현이 설명을 계속하라 턱짓을 했다.
"그간 군부의 독단 덕에 많은 피해를 입었고, 지금도 테러리스트로 몰리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그들이 밉다고 저희의 의무를 져버릴 수는 없지요."
듣다보니 전부 옳은 말이다 싶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아무래도 신뢰가 가질 않았다.
"군부의 구조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2주 뒤. 저희는 당장 3일 뒤에
출발합니다."
그녀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군부의 작전이라면 이미 용모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흡수한 이능력자들과 군대를 대대적으로 투입한다던데, 그들의 작전은 구조보다는 소탕과 탈환에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 때를 기해서 유니온이 보관하고 있던 영상을 민간에 공개할 생각입니다."
이번 말은 지현보다는 나를 향해 있었다. 세속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그녀야 여론이니 뭐니 신경쓰지 않지만 나는 달랐다. 죽어라고 고생했더니 테러리스트라고 몰아붙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영상이라면?"
내가 미끼를 물었다라고 생각하는지 한창 굳어있던 서울지부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일전의 괴수전 때 유니온의 직속 타격대가 촬영한 전투영상이다. 전투의 처음과 끝이 전부 기록되어 있으니 우리가 뒤통수를 쳤다는 군부의 헛소리도 이제 끝장이란 소리지."
지현보다는 나를 상대하는 것이 만만했는지 조금은 편해진 음성으로 말을 건네 온다. 서울지부장이 내게 평대를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지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 진작부터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그 여론 때문에 하위 이능력자들의 신병이 군부로 꽤 많이 넘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
내 말에 서울지부장의 고개가 가로저어진다.
"군부에 흡수된 이들 태반은 유니온의 지령에 의해 그리 결정한 것.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군부가 유니온에게 주도권을 뺐길까봐 걱정이라면 잠시 그들이 착각하게 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네 눈에 우리가 어찌 보이는지는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 입장에서야 누가 됐든 간에 괴수와 몬스터만 처리하면 된다."
============================ 작품 후기 연참한 거에 비해서 순위가 멸망이라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연참은 계속됩니다.
한편 더 투척하고 시간 되면 한편정도는 더 올려보겠습니다.
그리고 검후와의 관계에 대해서 호불호가 많이 갈릴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큰 거부감들은 없으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그간 걱정 많이하던 부분이라.
다음편에서 설정전개 마무리 하고 바로 씽나는 전개로 찾아뵙겠습니다. ㅎㅎㅎ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서평 이벤트 많이들 참여해주세요. 말이 서평이지 악평이던 비평이던 내가 이능력자다가 읽으신 감상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써주시면 됩니다.
굳이 서평의 형식이 아니라 감상의 형식이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피드백은 이 글의 좋은 단백질원이 됩니다. 도와주세요!
그럼 글쟁이는 체력 보충하러 잠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