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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라기-70화 (70/223)

< --  1-6. 강해지다.  -- >

무감정한 얼굴에 쓰라린 기색이 떠오르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는 그녀의 기색에 도리어 내 눈가가 뜨거워졌다.

"죄송합니다."

어느새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을 느끼며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다시 사죄를 했다.

"사과를 받고자 함이 아니다. 너는 그때 심마에 빠져 있었던 상태. 그 일은.."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두눈을 감는다. 그녀의 눈가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마침내 무겁게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한마디를 하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었는지, 그녀의 몸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인다. 놀라서 손을 뻗어가다가 이내 손을 거둬들였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 더러운 손을 그녀에게 댄단 말인가.

한참이나 자신을 추스른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이 끊임없이 일렁

이고 있다.

"비무라는 것은 언제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것, 설령 누군가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는 그런 것이다. 비록 대련이었지만 나는 그 일을 비무라 생각하고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 하는 말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그녀의 말. 나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순결을 잃었고, 천하를 눈 아래로 보던 강대한 힘을 잃었다. 그 상실감과 분노가 어떨지 상상조차 가지 않건만 그녀는 그 일을 없었던 일이라 하겠다고 한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몇 번인가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닫기를 수차례.

"그만. 아무 말도 말아라. 지금은 혼자 있고 싶구나."

힘겹게 쥐어짜낸 듯한 그녀의 말에 나는 차마 거부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한참이나 그녀와 떨어진 나는 뒤를 돌아 그녀의 모습을 쫓았다. 불현 듯 머릿속을 스쳐가는 불길한 기운에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자리를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눈을 꼭 감고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와 나 사이를 스산한 바람이 가득 채우고,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휘청거린다.

복잡한 심사로 걸음을 옮기던 나는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언제부터 나와 있었는지 모를 현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간 시선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마치 그 시선 끝에 내가 저지른 참담한 죄가 걸려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고 오두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당장 달려와 내게 안겼어야 할 그녀였지만 오늘은 그저 바라 볼 뿐이다.

그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그 사실을 깨닫고 불길한 예감에 나는 온 사방을 뒤졌다. 그리고 잔뜩 휘어지고 갈라진 고목 아래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를 발견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인을 압도하던 그녀는 더 이상 존재치 않았다. 그저 지친 얼굴로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는 그녀만이 있었을 뿐이다.

다시금 고개를 쳐드는 죄책감에 한참이나 그녀를 보다 이내 오두막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낯으로 그녀에게 먼저 다가선단 말인가.

그 뒤로 돌아오지 않는 검후를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기를 며칠, 그녀가 하루하루 야위어가고 있다. 초췌한 모습으로 그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 가슴속에 커다란 바윗덩어리라도 들어앉은 것처럼 마음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하루에도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드는 생각,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제고 그때로 돌아가 그녀가 겪은 일을 막고 싶을 뿐이다.

그날 내가 그런 유치한 승부욕이 발동하지 않았다면 심마에 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도 그 도도했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 와서 후회해봐야 변하는 것은 없겠지.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는 그녀만큼이나 나 역시 피폐해져간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현지만이 평소와 같은 모습일 뿐. 아니 그녀 역시 전과는 다르게 내게

달려들기보다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멀건 눈으로 날 바라보기만 한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나는 죄책감과 자격지심에 그녀의 눈빛이 꼭 나를 나무라는 것만 같아 현지의 시선을 피하고 만다.

그렇게 거북스러운 시간은 흘러가고, 꼭 한 달이 되는 날 검후가 돌아왔다. 잔뜩 지친 얼굴로 돌아온 그녀는 돌아오자마자 기절하듯 잠이 들어 이틀을 내리 깨지 않았다. 걱정스레 그녀를 바라봤지만 단지 지쳐서 잠에 들어있을 뿐임을 깨닫고는 그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볼 뿐이다.

"이 곳을 떠나려 했다."

이틀 만에 깨어난 그녀는 잔뜩 잠긴 음성으로 그리 말했다.

"하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이곳에 펼쳐진 진을 빠져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더구나."

그 말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은 담담할 뿐이었지만 듣는 내 입장에서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힘을 잃기 전에는 저 대단한 절진마저도 하찮은 눈속임이라 치부하던 그녀가 이제는 그 하찮은 것을 스스로 벗어날 힘조차 없다 말했다.

"목숨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하늘은 그조차 내게 허락하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상념과 생각들이 내 목을 조여 왔다.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눈을 떠라. 그대를 핍박하고자 온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내게 하는 말이 가관이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어느새 눈 앞이 뿌옇게 변하고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차라리 화를 내요! 당신을 망가트린 나를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다고 말하라고요!"

염치없이 스스로의 이기심을 드러내는 내 외침, 스스로를 추스르려 노력하는 그녀에게 나는 그렇게 외쳤다. 그녀가 그리 나온다면 차라리 내 마음도 조금은 나을 것을. 그녀의 우직한 태도에 나는 분노가 느껴졌다. 물론 그 분노는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겨냥하는 것. 자괴감과 죄책감에 온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내 고함에 애처롭게 눈을 감고 숨을 몰아쉬는 그녀,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에게 고함을 친단 말인가. 내가 무얼 잘했다고 그녀에게 이리도 언성을 높이는가.

날카로운 침묵이 주변에 내려앉고 내 가슴을 후벼 판다.

"... 고 싶지 않다."

조그맣게 들려오는 그녀의 음성에 나는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그녀의 얼굴이 나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다. 잔뜩 지친 기색이긴 하지만 올곧기만 한 그 눈빛에서 나는 원망이나 증오 따위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가 나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이번만은 나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아이를 아비 없는 자식으로 낳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말에 내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인다.

"그래서 돌아온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검후가 돌아온 이후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 천하를 내려다보는 강자이자 엄격한 스승이었던 그녀는 이제 내게 여자일 뿐이다.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지 말거라."

물론 그녀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가끔 보이는 여성스러운 모습에 나는 아직도 이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했다.

가만히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날 이후로 마음을 잡지 못해 방황하던 그녀는 어느 날 목숨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또 하나의 생명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몇백년 전의 사람인 그녀에게 어린 생명을 품고 목숨을 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저를 원망하지 않아요? 제가 밉지 않아요?"

내 말에 그녀가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정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몇 번이나 말했다. 그날 일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벌써 수십 번이나 물어온 질문이다. 그녀의 대답은 매번 한결같다. 수련을 이끌어가던 이로서 내 심마를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의 실수. 그녀는 나를 원망하지 않았다.

"게다가 지아비를 미워하는 여인은 없다."

스스로 말하고도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이 일전의 그녀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짐작대로 수백년 전의 여인인 그녀는 의외로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어 한번 마음을 정하자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악연으로 묶인 인연이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끔 보이는 이런 모습에 내 심사가 복잡하기만 하다. 비록 수백년전의 인물이었지만 그녀는 아름다운 여인이다. 여지껏 봐왔던 모습만 봐도 그 처신이 얼마나 올곧은지는 의심할 여지도 없었고, 이따금씩 보이는 여인으로써의 매력도

나무랄 곳이 없었다.

다만 갑작스러운 임신 사실에 내 스스로가 혼란스러울 뿐. 물론 후회한다거나 짐이라는 생각은 아니다. 그저 나를 돌이켜보아 내가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그것만이 의문일 뿐.

"세상에 준비 된 부모라는 것은 없다. 그저 살면서 배워가면 될 것이니라."

현명한 그녀는 이미 그런 내 기색을 알아차리고 엄하게 말한다. 그녀의 말에 나는 스스로를 반성했다. 골백번은 나를 때려죽여도 할 말이 없는 그녀가 이 상황에 저리 초연한데 내가 뭘 잘했다고 이런 고민을 하나.

"미안해요. 사실 지금도 실감이 잘 가지 않아서요."

감히 범접할 수 없다 생각했던 그녀가 나를 지아비라 부른다. 물론 지금은 그 강대한 힘 중 태반을 잃은 상태고 그저 평범한 여인에 가까운 그녀였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승이라 생각했던 그녀를 여인으로 대한다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았다.

"그보다 언제까지 그런 말투를 쓸 것인가."

그녀의 말에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여인에게 그리 말을 높이는 경우는 없다 말하는 그녀 스스로의 말투가 에러임을 알고는 있을까.

"그게... 워낙 갑작스러워서. 쉽게 고쳐지지를 않아요. 천천히 고쳐가도록 할게요. 그것보다 ... 도 아직 말투 고치지 못했잖아요."

이미 꽤 시간이 지났건만 그녀를 지칭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나는 에둘러서 그녀에게 말했다.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와락 붉어진다.

"나도 고치려고 노력중이...."

말 끝을 어찌 마무리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하던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 여요."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잊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 웃음 소리에 그녀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내 마음 한 구석에 저열한 욕망이 눈을 떴다. 감히 범접치 못하고 손도 댈 수 없던 위치에 있던 그녀는 1등급의 이능력자 '검후'다. 비록 그 힘을 잃었다고는 하나 그녀가 내 여자라고 생각하니 추악한 정복욕이 내 안

에서 꿈틀거렸다.

"그보다 그 힘 어떻게 복구가 안 될까요?"

스스로의 추악한 내면을 숨기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고자 했던 말이건만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간다.

미친.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을 꺼낸 거냐.

가벼웠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게 가라앉는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어설픈 가면을 쓴 그녀의 얼굴이 애써 담담한 척 한다.

"지금이야 방법이 없지만 앞으로 수를 찾아봐야지."

여인 '전지현'은 자신의 갈 길을 정했지만, 무인 '검후'는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잔뜩 굳은 표정에 나도 모르게 사과를 한다.

"미안해요."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은 반복한 말이지만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힘이야 다시 찾으면 될 일. 비록 태반의 기운을 잃기는 했지만 내 스스로의 깨달음은 그대로 있으니 언제고 다시 예전의 경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 수가 없으면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말처럼 들렸다. 처음에는 무거웠던 어조가 끝에 가서는 그나마 평온해진다.

"경지에 든 이후로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을 찾았다. 나 자신은 모르고 있었으나, 겨울바람이 참을 잊고 있었고 한 낯의 햇살이 따사로움을 잊고 살았다. 어쩌면 이것이 순리일지도 모르겠구나."

그녀는 진정 강한 사람이었다. 여인으로써도 무인으로써도. 그리고 인간으로써도.

============================ 작품 후기

한 편 더! 슈퍼하게 폭참!!!

추천과 코멘트 잊으시면 아니되옵니다!

*검후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외전격으로 나옵니다. 김형준의 범죄로 인해 너무 거부감 가지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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