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69화 (69/223)

< --  1-6. 강해지다.  -- >

심마에 빠져들기 전과 비할 수 없이 빠르고 날카로워진 공격이었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검에 가득한 요사스러운 가시들이 성가셨을 뿐. 상대하기 번거롭긴 했으나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그러던 그의 공격이 조금씩 매서워지더니 지금은 그녀에게도 버거울 정도로 기괴하고 날카로운 공격으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그를 심마에 벗어나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공격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천하의 검후가 수세에 몰리다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이마에 솟아난 땀방울들이 그녀가 처한 상황이 거짓이 아님을 알려준다.

형준의 기괴하고도 불길한 공격이 이어진다. 이제는 검뿐만이 아니라 수시로 뻗어 나오는 주먹질과 발길질 또한 위협적이다. 맨손이라 하여 무시했다가는 그 끝에 가득 뭉친 불길한 기운에 낭패를 당할 것이라 그녀는 어지러운 손발을 놀려 하나 하나 피하거나 막는 수밖에 없었다.

"크흐흐흐."

이제는 심마에 완전히 먹혀버린 듯 그 웃음소리조차 인간의 것이라 믿기 힘든 지경이다. 평소에는 장난기 가득했던 그 눈동자에 어린 것은 광기와 불길함.

빗깔마저 붉게 변해버린 그 섬뜩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본다.

다소 큰 동작으로 그의 공격을 막아가는 그녀의 동작이 평소의 검후답지 않다.

사실 아무리 형준이 지닌 잠재력이 거대하고 그 지닌 바 이능도 밝혀진 것 없는 미지의 것이라고 한들 몇백년동안 검 하나를 벗삼아 살아온 그녀를 이리 몰아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마에 빠진 탓에 격발된 잠재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은 뭔가 말이 되지 않았다.

'기운이 이어지지를 않는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둘 다 끝이다.'

그녀의 검에 서려있던 금빛 서기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그녀의 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던 탓이다. 평소라면 한달을 내리 검을 휘두른다 하여도 이리 기운이 끊길 일이 없는 그녀였지만 사실 그녀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지난 괴수와의 결전에서 입은 부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던 탓이다. 군의 폭격 당시 폭발의 중심에 가장 가까웠던 그녀는 당시 전력을 다해 괴수를 공격해가던 찰나라 스스로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었다. 그나마 허준영의 결계로 인해 한 목숨 건질 수는 있었으나 수백년을 가다듬어온 그릇에 금이 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그 깨어진 부분들이 다시 단단해질 터였으나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듯 보였다. 금방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뽑아내었던 기운들이 가닥가닥 끊어져 지금 그녀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부상이 없었다면 형준의 폭주를 막는 것이 이리 어렵진 않았을텐데 그녀는 자신의 안일함을 후회했다.

신의 안일함을 후회했다.

허준영과 자신, 수백년을 수련해온 두명의 절대강자가 주의 깊게 보고 있던 그였다. 겉으로 드러난 힘보다는 속에 갈무리된 기운이 더욱 거대했던 특이한 인물. 조금만 이끌어준다면 금새 자신들과 나란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다.

그런 그를 상대하는데 온전치 못한 몸을 하고도 무엇을 그리 자만했던가. 그녀의 얼굴빛이 점차 창백해진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유난히도 붉은 입술, 그 사이로 한가닥 붉은 선이 흘러 내렸다.

끊어지고 이어지고를 반복하던 그녀의 기운이 마침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 기운을 몰아 형준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그녀의 모습은 지금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

이성을 잃고 본능에 몸을 맡긴 형준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 챈 듯

보기 싫은 웃음을 짓는다. 평소 그의 얼굴을 꽤나 준수한 편의 얼굴인 그였지만 지금 웃음 짓는 모습은 추악할 정도였다.

마치 과거에 상대해보았던 사도의 악한과도 같은 모습이라 그녀의 안색이 더욱 침중해진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둘다 파멸할 판이라 어떻게든 수를 내보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간신히 검을 곧추세우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흉물스러운 웃음을 얼굴에 가득 떠올린 형준의 발걸음이 서서히 다가선다. 이미 그녀가 손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임을 알고 있는지 그 성큼 거리는 걸음이 거침없기만 하다.

그 걸음 끝에 서 있는 그녀의 검이 흔들린다.

맥에서 수련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었던 그녀의 검이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두려움보다는 안타까움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심마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은 탓이다. 그래도 근 시대에 보기 드문 강자인 그이건만 자신과의 대련에 어찌 승부욕이 없었을까. 지도라는 미명하에 그 승부욕과 자존심을 수 없이도 짓밟았으니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어둠이 기어이 그를 잠식한 것이다.

스스로 도의 끝자락이나마 잡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었건만 그녀는 깊이 후회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변하는 것은 없다.

심마에 먹혀버린 형준은 이미 지척에 이르렀고 그의 검에 넘실거리던 불길한 기운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킬 듯 닿아있다.

스물거리며 그녀의 온몸을 스쳐가는 소름끼치는 기운에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수백년동안 굳건했던 그녀의 정신이었건만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다. 스스로는 그 생소한 감정이 무언지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마치 간이라도 보듯 그녀를 어루만지던 촉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의 몸을 덮쳐왔다.

검후의 고운 두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을 잡은 후 언제나 자

신을 무인이라 여겨왔었고 스스로를 여인이라 생각했던 적이 없는 그녀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이 비통한 눈물과 상실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헉. 헉."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탄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자, 그의 시뻘건 눈동자를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조금씩 옅어지는 붉은 기운에 그가 어쩌면 정신을 차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하고 생각한 그녀다.

일찍이 심마에 빠진 이들이 색욕을 드러내는 것을 몇 번인가 보았던 그녀였지만 그때 보았던 추악한 눈길 아래 자신이 깔려 있게 될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 게다가 그는 자신의 청백한 몸을 더럽히는 것도 모자라 몇백년간 정련해온 기운까지 갈취해가고 있다. 반항조차 하지 못하게 온몸을 꿰뚫고 있는 붉은 줄기들이 지금도 꿀럭이며 그녀의 정심한 기운을 게걸스럽게 빨아드리고 있었다. 몇백년간의 고련했던 그녀의 강대한 기운이 그렇게 허무하게 타인에게 넘어간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자신이 흘리는 눈물이 몸이 더럽혀졌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자신의 전부였던 기운을 타인에게 갈취당했기 때문일까.

그래. 지금 와서는 무슨 소용이랴. 그간 지켜왔던 청백과 수백년의 고련이 부질없다. 어차피 이리 될 운명이라면 왜 그리도 발버둥을 쳤었을까.

모든 게 덧없고 덧없구나... 그녀의 양 뺨을 타고 진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검후는 이제는 말라버린 눈물이 더 이상 흐르지 않음을 느끼고 눈을 떴다. 항상 그녀의 몸에 웅크리고 있던 강대했던 기운, 수백 년을 쌓아온 정기가 그 굵은 줄기는 어디 갔는지 끊어질 듯 말 듯 미약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를 이 외딴 곳에서 정양하게 한 부상, 금이 간 그릇이고 뭐고 간에 이제는 그 그릇에

담을 것이 거의 사라져버렸다.

벌써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시간이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몸을 추접스럽게 탐하는 그가 보였다. 그녀는 메마른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그에게 화가 나는가?

아니다. 스스로의 방심이 불러온 일이라는 것임을 잘 안다.

억울한가?

억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원망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잃어버린 힘이 아까운가?

넘치던 활력이 사라졌지만 아직은 실감나지 않는다.

그러면 더럽혀진 청백이 한스러운가?

슬픈가?

안타까운가?

수많은 의문과 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져간다.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수백년간 힘들게 쌓아온 기운을 송두리째 그에게 빼앗기고 순결했던 몸조차 더렵혀졌다지만 분노보다는 허무함만이 느껴졌다.

어쩌면 지나친 충격이 그녀의 현실감을 빼앗아가버린 탓일 수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경지에 오른 이후 항상 굳건했던 부동심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무인 '검후'가 아닌 인간 '전지현'이다.

메마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죄송합니다!"

바닥에 닿을 듯 머리를 숙였다.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것마저 염치가 없다 느

껴질 만큼 엄청난 만행을 저지른 나였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수십번, 수백번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은 해보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보인 것은 만신창이가 된 나신으로 힘없이 내 아래에 깔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검후의 모습. 내면의 세계에서 이미 스스로가 저지른 만행에 절망하고 몸부림 친 나였지만 다시 한 번 죄악감에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에 통제권을 빼앗긴 몸은 마지막까지 멈춰 서지 않았다. 결국 몇 번째일지도 모를 파정을 하고 나서야 그녀의 몸에서 떨어질 수 있었다.

"어떤 말로도 사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죄송합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녀에게 사죄하고 머리를 숙였다. 그녀의 용서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은 죄책감에 하는 행동일 뿐. 끝까지 이기적인 내 스스로에게 차라리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다.

"일어나라."

수백번의 죄송하다는 말에도 한마디 대꾸가 없던 그녀의 음성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감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원래부터 표정이 무표정하던 검후였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마치 현지의 그것과도 같은 비정상적인 얼굴이다.

"고개를 들어라."

참담한 일을 겪었음에도 그녀의 음성은 차분하기만 하다. 고개를 들라는 그녀의 말에도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내가 무슨 염치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본단 말인가.

"얼굴을 내게 보여라."

차분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음성이 파르르 떨려온다. 아무리 수련이 깊다 하나 여인의 몸으로 그런 일을 겪었으면 충격이 클 터. 비록 떨리는 음성이지만 낮은 어조에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무감정한 얼굴에 쓰라린 기색이 떠오르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듯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는 그녀의 기색에 도리어 내 눈가가 뜨거워졌다.

"죄송합니다."

어느새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을 느끼며 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다시 사죄를 했다.

"사과를 받고자 함이 아니다. 너는 그때 심마에 빠져 있었던 상태. 그 일은.."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두눈을 감는다. 그녀의 눈가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마침내 무겁게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작품 후기 자 한편 더 들어갑니다! 중간중간 선추코쿠 까먹지 마시고 계속 달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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