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68화 (68/223)

< --  1-6. 강해지다.  -- >

처음의 감탄과 흐뭇함은 어디 갔는지 침중한 어조의 속삭임이 내 자존심을 사정없이 깔아뭉갠다.

이미 끝내자는 말을 들었음에도 너무도 분한 나머지 다시 한 번 검을 찔러간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평정을 그리 잃다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추상같은 한마디와 함께 검후의 검이 처음으로 공세로 전환되어 짓쳐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검 끝에 변화가 생긴다.

변화는 나도 모르게 일어난 것, 검 끝에 붉은 기운이 어린다. 보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붉은 덩어리가 멍울지다가 이내 검 면에 넓게 퍼져나갔다.

"사이한 기운!"

검후가 대경해서 외치는 음성이 사뭇 사납다. 나 역시 뭔가 잘 못 되어가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뻗어나가는 검을 회수하기에는 늦었다. 검을 가득 두른 붉은 기운이 가시처럼 돋아나고 검도 뭣도 아닌 기묘한 무언가가 검후를 베어갔다.

마주 부딪친 검후의 장군검과 내 기형검이 굉음을 토해내고 검후의 입에서 처음으로 외마디 신음이 튀어 나왔다.

"크윽!"

날카롭게 돋아난 가시들이 검후의 몸을 향해 마치 촉수처럼 뻗어나간다. 보기만 해도 불길한 느낌에 몸서리가 쳐지는 그 흉물스러운 모습에 검후 역시 놀라 검을 세차게 뿌리쳤다. 아무리 놀랐다 해도 그녀는 검후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듯한 그 검세조차 내가 감당하기엔 힘든 위력. 그녀의 공격을 뿌리치기 위해 몇 걸음이고 뒤로 물러섰다.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는 내 동작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기민한 게 그간의 수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스무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얼굴 가득 노여운 빛이 일렁인다. 분명한 분노이지만 달리 보면 대련 이후 처음으로 보이는 낭패스러운 감정.

그래. 바로 저것이 내가 원하던 것이다.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건방진 검후의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싶다. 그 잘

난 얼굴을 아래에 두고 짓밟아 주리라. 오만하게 지껄이던 그 주둥이에서 절박한 애원을 듣고 말리라.

"심마에 먹혀버렸구나."

가만히 나를 노려보던 그녀가 쓰게 내뱉는다. 얼굴에 떠오른 노기가 금세 안타까움으로 변하고 나를 동정하듯 바라본다.

제길.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라고.

이를 악물고 검에 집중하자 어느새 원상태로 돌아간 검에 다시 그 기형적인 가시들이 돋아났다.

"무엇이 그리 그대를 힘들게 한 것인가. 뭐가 그리 욕심이 나고 조바심이 나서 심마에 붙들린 것인가."

첫마디는 그저 안타까운 기색만이 가득했으나 말끝에 이르러서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추상과 같은 위엄의 꾸짖음이 된다. 그녀의 몸 주변에 바람이 휘몰아치다가 이내 빛무리로 바뀌어버렸다. 금빛의 서기와도 같은 그것을 보는 내 몸이 절로 뒷걸음질 치게 된다.

"그렇구나. 네가 품고 있던 그것은 처음부터 어둠에 속했던 것. 이제야 그 본색이 드러났구나."

한마디 한마디가 천둥처럼 들려오고 눈을 마주치기 두려운 금빛의 서기가 점점 짙어진다.

"어차피 한 번은 겪었어야 할 일. 하필 내가 있는 곳이라는 것이 너무도 공교롭도다."

몇 걸음인가 더 물러서던 나는 이를 악다물었다. 또다시 드러난 그녀의 교만한 모습, 산산조각내고 그 조각 하나하나 발로 짓밟아 으스러트리고 싶다. 저 거만한 얼굴 가득한 위선을 벗겨버리고 싶다.

"크흐으으으."

상처 입은 짐승과도 같은 숨소리가 잇새로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녀. 나는 힘차게 발을 내딛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녀의 얼굴을 향해 검을 베어갔다.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에 그녀 역시 소홀히 하지 못하고 검을 마주 베어온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이 아직 신경이 쓰이는지 검이 닿기가 무섭게 떨어져나갔다.

하지만 내 검은 집요하게 그녀를 베어가고 찔러간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흉악하게 이를 들이미는 가시들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꿰어버릴 듯 길어지고 짧아지기를 수 차례. 그녀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더. 조금만 더. 그래. 조금만.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짓뭉개기 위해 나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갔다. 방금 전의 여유는 어디 갔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내 검을 뿌리치는 그녀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즐겁다.

"킥."

마침내 튀어나온 그 외마디 웃음소리에 검후의 눈썹이 꿈틀댄다. 그래. 아주 좋아.

맞부딪히는 그녀의 검이 점점 매서워지고 강력해지지만 나는 계속해서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 비치는 낭패감이 짙어질수록 내 검이 빨라진다.

갑작스럽게 세상이 느려진다.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고 날카로웠던 그녀의 검이 마치 멈춰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에 휘날려 올라간 머리카락들이 올올이 눈에 들어오고 그녀의 얼굴이 확대라도 한 것처럼 소녀스러운 이마에 돋아난 가는 솜털마저 눈 가득 담겼다.

"킥킥."

따뜻하다. 그리고 너무도 편안하다.

어미의 자궁에 들어선 아이의 기분이 이럴까. 너무도 포근하고 따뜻한 기분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그 따사로움에 모든 것을 잊고 마음의 평안을 찾는다.'킥. 잘했어. 아주.'

갑자기 들려온 장난기 가득한 속삭임과 박수소리만 아니었다면 나는 언제까지고 그 기분에 취해 있었으리라.

'소희?'

몇 번인가 들었던 익숙한 음성.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몇 번인가 그녀와 만났몇 번인가 들었던 익숙한 음성.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몇 번인가 그녀와 만났던 의식의 세계와는 달리 온통 새하얀 세상이다. 그리고 처음 보는 여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속이 비칠 듯 말 듯 한 새하얀 한복차림이 꽤나 고풍스러운 여인, 조그만 얼굴이 흐릿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여인이라고 하기에도 뭐하고 소녀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늘 말하는 거지만 이번 만남도 예상보다 빠르네.'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 나는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여인의 모습이라니. 새하얀 세상과 더불어 모든 게 낯설고 생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한 없이 익숙하기만 한 느낌이 기묘하기만 하다.

'당연하지. 여기는 네 의식의 세상이거든.'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내 의식?

'응. 전에 만났던 곳은 내가 주체고, 여기는 네가 주체가 되는 세상이야.'

그녀의 명료하기까지 한 말에도 나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할 뿐이다.

그 모습은 뭐야?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소리 내어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처럼 그녀가 즉각 대답해왔다.

'이게 원래 내 모습이야. 아직 뚜렷하게 실체화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금은 이것만 해도 감지덕지지.'

장난스럽게 몸을 한바퀴 돌려 보이는 그녀,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이지만 분명 즐거운 표정일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왜 여기에 있냐고?'

그 흐릿한 얼굴이 왠지 불길하게 다가오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네가 어떤 상황인지 기억이 안 나?'

장난기 가득한 그 음성에 도사린 불길함에 나는 몸서리를 쳤다. 어떤 상황이라니?

나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본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 탓에 꽤나 인상을 써야 했지만 나는 기억의 끝자락을 잡는 것에 성공했다.

나는... 검후와 대련중이었는데?

소희가 과장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너 대련 중이었어. 그리고?'

그리고라니? 그저 검후와 대련중에 평정심을 잃고...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영상 하나, 나는 소스라칠 수 밖에 없었다.

'킥. 이제 기억 나?'

그 끔찍하기만 한 기억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데 소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거린다.

'잘했어. 제 잘난 줄만 아는 건방진 년. 언제고 큰코다칠 날이 올 줄 알았어.'

검후는 나를 심마에 빠졌다고 했다. 등 뒤로 후광과도 같은 금빛을 두른 그녀가 노려보는 것이 거북해서 나는 그녀에게... 제길.

'왜 그래? 너도 원했잖아? 그 건방진 낯짝을 일그러트리고 싶다고 생각했었잖아.'

조각난 기억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하나씩 맞쳐져 간다.

나는 검후의 기운을 흡수하고, 그녀를... 범했다.

자괴감과 죄책감 후회,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휘몰아치다가 일시에 나를 들이받는다. 그 끔찍한 충격에 나는 비명처럼 고함쳤다.

'씨바아알!'

내 절규에도 뭐가 그리 신나는지 소희는 깔깔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비통한 심정에 나는 주저앉아 절규했다. 새하얗게 빛나던 세계가 어느새 음울한 회색으로 변하고 진흙과 오물 가득한 바닥이 나타나 나를 빨아드린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너는 도망갈 곳이 필요했거든.'

조롱과도 같은 음성이 내 가슴을 후벼 판다.

'그년을 사정없이 망가트리고 네 스스로 그걸 깨달았을 때는 늦었었거든.'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도려낸다.'깔깔깔. 그 도도한 척 하던 년이 눈물을 질질 짜던 꼴이라니! 수백년 묶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야!'

조롱하고 짓밟는다. 비웃고 상처를 들쑤신다.

하지만 나는 소희에게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지은 죄는 그녀의 조롱과 비웃음보다 훨씬 크고도 추악했다.

심마에 빠진 나를 제압하려던 검후를 도리어 제압해서 그 기운을 빼앗고 몸을 더럽히다니. 내 스스로가 한 짓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행이었다.

아무리 심마에 빠져 저지른 일이라고 하나, 엄연히 일어난 일이 무마되진 않으리라.

죄악감이 내 심장을 조여온다. 나를 끌어당기던 오물투성이의 바닥에 내 스스로가 침잠해간다.

처음에 느꼈던 그 평안과 따뜻함 따위 온대간대 없고 나는 그렇게 절망에 집어삼켜졌다.

"크윽."

검후의 입가를 비집고 올라온 신음성이 마침내 이사이를 뚫고 흘러나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황금빛 서기로 가득해 고결해보이기까지 했던 그녀의 모습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형준이 심마에 빠지자 내심 옳다쿠나 했던 그녀였다. 안 그래도 내심 형준의 몸에 웅크리고 있던 요사스러운 기운을 염려하던 그녀였으니, 표면에 드러난 그 사이한 기세를 차라리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기회에 그 어둠을 걷어내어 형준의 미래에 드리운 불길함을 해결하려 한 탓이다. 애초부터 그녀보다 하수였던 그였던지라 지금의 상황을 쉽게 보았던 그녀는 형준의 공격에 이를 악물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기운에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그였지만 금세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공격해온다.

심마에 빠져들기 전과 비할 수 없이 빠르고 날카로워진 공격이었지만 처음에는 아무런 위협조차 되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검에 가득한 요사스러운 가시들이 성가셨을 뿐. 상대하기 번거롭긴 했으나 위협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그러던 그의

공격이 조금씩 매서워지더니 지금은 그녀에게도 버거울 정도로 기괴하고 날카로운 공격으로 변해버렸다.

이제는 그를 심마에 벗어나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공격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천하의 검후가 수세에 몰리다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이마에 솟아난 땀방울들이 그녀가 처한 상황이 거짓이 아님을 알려준다.

이마에 솟아난 땀방울들이 그녀가 처한 상황이 거짓이 아님을 알려준다.

============================ 작품 후기

오랜만에 업뎃합니다. 이제 몸 좀 추슬리고 겨우 인났네요.

뎅기열로 간혹 사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고열과 오한 골통 두통정도로 끝이 났군요.

근 일주일 누워만 있었더니 체력이 급격히 저하됐지만 힘내서 비축분 만들었습니다.

그간 염려해주신 많은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분 한분 쪽지로 보내드려도 부족할 판이지만 한편이라도 더 써서 올리는 게 글쟁이의 쪽비도다는 나을 거라 생각되서 연참으로 보답합니다.

그간 휴재가 길었던 탓에 한번에 노출시간이고 뭐고 그냥 네편 업뎃합니다.

이런 저를 굽어살피사 포풍과 같은 선추코쿠로 힘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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