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 강해지다. -- >
검후의 얼굴에 차가운 표정이 내려앉은 그 순간, 주변의 분위기가 바뀐다. 갑작스레 겨울이라도 찾아온 듯 한기가 휘몰아친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어 질러가던 주먹을 거두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검후의 손과 찔러가던 내 주먹이 마주친다. 그리고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 달려들었을 때보다 배는 빠르게 내 몸이 튕겨져 나간다. 가녀리기만 한 그녀의 손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지만 그녀는 검후. 측정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다.
충격이 컸지만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검을 쓰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약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온몸의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저 앞에서 냉기를 푹푹 풍기고 있는 그녀지만 어느 정도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인지 곧바로 달려들거나 하진 않는다.
"각오 단단히 하도록. 이번 공격은 꽤나 매서울 테니."
검후의 나직한 한마디가 천둥보다 더 크게 내 귀를 때린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낮추고 검후의 공격에 대비한다. 잔뜩 흘러나온 생명력이 내 온몸을 타고
흐른다. 그 어느 때보다 넘치는 힘이라 쉽게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녀의 강대한 힘을 목격한 후라 마냥 안심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쪽에서 준비를 하자 그녀가 양손을 쭉 뻗는다. 마치 무언가 밀어올리기라도 하는 듯한 자세라 의아해 하는데 그녀의 손이 모인 곳에서 하얀 덩어리가 뭉쳐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기 주먹만하던 덩어리가 점점 커져가다가 이내 수박만해진다.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납게 꿈틀대는 덩어리의 모습에 나는 진땀을 흘렸다.
"저기 좀 살살 하시는 게 어떠실지?"
절대 가볍게 볼 수 없는 파동에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죽는 소리를 한다. 내 말을 들은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말할 기운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힘을 모으는 게 좋을 텐데?"
가차 없는 한마디에 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곧 형성되는 붉은 방패. 전에 없이 두껍고 거대한 모습이지만 이것만으로는 검후의 공격을 막기엔 역부족이리라. 반투명한 방패 너머에서 검후의 자세가 바뀌는 것이 보인다. 모았던 양손을 교차하는 게 마치 무언가를 할퀴는 것과도 같다. 그녀의 손동작에 동그랗게 뭉쳤던 덩어리가 찢겨지고 갈라져 수십 가닥의 파편으로 나뉜다.
"간다."
그 나직한 한마디가 왜 이리도 크게만 들리는지. 잔뜩 자세를 낮추고 방패를 앞세운 내 다리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수십 가닥으로 찢겨진 하얀 파편들이 일제히 쏘아져 온다. 내가 들이민 방패의 크기는 내 온몸을 가리고도 남는 크기, 방패가 버텨주길 바라지만 아마 힘들겠지. 파편 하나하나에 실린 기운은 절대 만만해 보이지 않았다. 허벅지의 근육이 최고조로 부풀어 오른 그 순간, 첫 번째 파편이 방패와 충돌했다. 깡!
듣기 싫은 금속음이 터져 나오고, 어마어마한 충격에 내 몸이 휘청거렸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위력에 나는 자세를 재빠르게 낮추고 방패에 힘을 더욱 집중했다. 그리고 다시 충격, 뒤따른 파편들과의 충돌에 턱이 덜덜 떨려올 지경이다. 까가가가가가가강!
연달아 들려오던 금속음도 멎고,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발 밑에 길게 이어진 선을 보니 족히 15미터는 뒤로 밀려난 듯 했다. 별로 힘을 쓴 것 같지도 않았건만 이리 무지막지한 위력이라니, 새삼 검후의 힘에 감탄했다.
"피하면 더욱 간단했을 것을 무식하게 다 막다니."
막 한숨을 내쉬는데 바로 곁에서 들려온 검후의 한마디. 나는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놀라면 무조건 몸을 튕겨내는구나. 좋지 않은 습관이야."
그녀의 엄한 질책이 금세 따라 붙는다. 바로 코 앞에 나타난 검후의 미간이 한껏 찡그려져 있다. 무언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지라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검후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온다. 뻔히 다가서는 것을 보고서도 어찌 대응 할 수 없는 기묘한 손동작이 내 어깨를 살포시 집었다.
"그리 두터운 갑주 속에 웅크리고 있으니 동작이 둔해지는 게야."
그녀의 차가운 한마디와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우그러지고 깨어진 적은 있어도 단 한 번도 벗겨진 적 없던 피바라기가 하나하나 해체되어간다. 먼저 그녀의 손이 닿았던 어깨의 갑주가 사라지는 걸 시작으로 금세 내 맨 몸이 드러난다.
"네 자신감과 용기의 원천은 아마 이 단단한 갑옷일 테지."
그녀의 말마따나 갑작스럽게 해체되어버린 피바라기 탓에 나는 패닉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녀의 강대한 힘이야 처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제대로 부딪혀보기도 전에 발가벗겨진 기분이다.
"자 어디 맨몸으로는 얼마나 버틸지 볼까?"
그녀가 기기묘묘한 동작으로 내 몸을 쓸어간다 싶더니 어느샌가 바닥에 내리꽂히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어어 하는 사이에 내 몸이 자세를 잡을 타이밍도 놓치고 뒤늦게 몸을 틀지만 이미 늦었다.
"커헉!"
피바라기를 두르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이 온몸을 덮쳐온다. 마
치 내장이 터져나가는 듯한 격렬한 충격에 숨이 턱 막히고 눈물이 핑 돈다.
"역시나 생각했던 그대로구나."
그 고통의 와중에도 선명하게 박혀드는 검후의 한마디가 내 자존심을 짓밟는다. 실망했다라기보다는 자신의 예상대로라는 그 어투가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이다.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내 몸은 그저 경련하듯 떨려올 뿐 움직일 생각조차 없는 듯 하다.
"낙법도 없이 그대로 내동댕이쳐졌으니 꽤나 아플 테지. 무리해서 일어날 생각 말고 누워서 들어라."
몇 번인가 일어나려는 시도 끝에 나는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금세 새까매지는 시야가 마치 지금의 내 심정과도 같다.
"힘은 가지고 있으나 활용하는 방법은 전혀 모르니, 어린 아이에게 절세의 보검을 쥐어준 것과 진배가 없다. 그간 네가 겪어왔을 전투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나 지닌바 힘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았다면 수고로움이 덜 했을 터. 그저 미련하게 들이받고 힘을 모아 질러대는 꼴이 눈앞에서 본 것처럼 훤하니, 한심
하기 그지없구나."
끝에 가서는 한숨까지 곁들인 그녀의 말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본이 없이 그저 주어진 힘만으로 되는대로 싸워왔으니 몸에 베인 나쁜 습관은 셀 수도 없다. 그 것들을 일일이 고쳐나가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지만 쉽지는 않은 일일 게야."
검후의 말에 나는 감았던 눈을 더욱 힘주어 감았다. 그녀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질수록 스스로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그녀는 2등급의 꽤나 고위의 능력을 가진 나를 철부지라 말하고 있으며, 그 힘을 알량하다 꾸짖고 있다. 수련도 없이 갑작스럽게 각성한 힘을 그저 무식하게 밀어댈 줄이나 알지 제대로 사용도 못하는 반편이라 호통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야 가진 힘이 특징적이니 가르치기가 어렵지 않겠지만, 너만은 내가 고민을 아니 할 수가 없구나. 그 지닌바 힘이 적지 않음에도 이리 맥을 추리지 못하니..."
끝에 가서는 숫제 혀를 차며 말하는 그녀의 어투가 내 가슴을 아프게 찔러온다. 그간 교만해졌던 내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고 순식간에 바닥에 나동그라진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흉하게 내동댕이쳐지긴 했으나 상대는 검후, 부끄러울 것도 자책할 필요도 없겠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다. 안개 속에서 헤맨 이후 마치 사지를 뚫고 나온 역전의 용사라도 된 냥 거들먹거렸던 내 자신이 수치스럽다.
한참이나 들려오던 검후의 말소리가 어느새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지만 나는 감았던 눈을 뜨지 못했다. 눈을 뜨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을 검후의 얼굴이라도 보일 것만 같아서.
그렇게 얼마나 차가운 바닥에 몸을 뉘이고 있었을까. 이제는 온몸을 짓누르던 고통도 사라졌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도 없으니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한창 머리 위에 있던 태양이 저 멀리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오래도 누워 있었구나. 털레털레 오두막을 향해 걸어가는데 누군가 내게 달려온다. 종종대는 뜀박질로 내게 달려와 안길 존재는 단 한명, 현지밖에 없지.
품에 쏙 안긴 현지가 내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내 주변을 맴돌다가는 그대로 오두막으로 사라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이었던지라 허탈하게 웃고 있
는데 문득 내가 부상을 입지 않았나 살펴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후가 비방이라고 처방한 손톱만한 환단을 먹은지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으니 효과가 나타났을 법도 하니까. 물론 저 멀리에서 문지방에 머리만 빼꼼 내밀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말이다.
오두막이 가까워지자 발걸음이 점차 무거워진다. 저 안에 있을 검후와 용모, 수현씨의 얼굴을 어떤 낯으로 봐야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어느새 다시 달려 나온 현지가 내 손목을 잡아 오두막으로 이끈다.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따르다보니 벌써 저녁때가 되었는지 저녁 준비가 한창인 검후가 보인다. 앞치마를 두른 채로 이리 저리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스스로가 더욱 한심해진다.
"혼자 궁상이란 궁상은 다 떨더니. 그래, 이제 좀 괜찮은가?"
한참 국거리의 간을 보고 있던 검후가 나를 발견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 낯빛만 보고 말을 꺼릴 만도 하건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바로 물어온다.
"뭐, 제가 형편없는 실력이라는 것 정도는 깨달았지요."
자조를 가득 담아 그리 말하니 검후의 대답이 가관이다.
"그래. 지금이라도 알았다니 다행이구나. 수련의 시작은 그렇게 자신을 아는 것부터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말하는 모양새가 진심이 가득하다. 딴에는 칭찬이랍시고 하는 것 같아 차마 뭐라고 대꾸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뿐이다.
내가 소파에 몸을 파묻자 용모가 쓴 웃음을 짓는다. 그 역시 제법 강자 축에 든다는 자부심이 있었을 텐데 오늘 가장 먼저 나가떨어졌으니 충격이 클 것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수현씨는 몸에 입은 데미지가 채 회복이 되지 않았는지 파리한 안색이다.
하나 같이 우울한 얼굴이라 오두막에 들어서기 전에 어떤 얼굴로 그들을 대해야 하나 걱정했던 내가 우스울 지경이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 심정일 텐데 말이지.
검후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람들에게 식사를 권한다. 못난 생각으로는
그녀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지만 그녀에게 악의가 있었던 건 아니니 꾹 참고 식탁에 앉는다. 다들 입맛이 없는지 수저가 깨작거리며 식탁을 느릿느릿하게 움직일 뿐이다.
현지는 아까까지는 그렇제 잘 따르던 검후의 곁으로 가지 않고 내 곁에 바짝 붙어있다. 검후가 공기위에 반찬을 올려줄 때마다 심통이라도 부리듯 반찬을 떨궈낸다.
"네가 나한테 당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미워진 게지."
검후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이다. 자꾸만 아까 일을 끄집어내는 그녀 탓에 밥먹는 내내 용모나 수현씨, 그리고 내 몸이 몇 번이고 움찔거려야 했다.
"그래. 아까 나뒹굴 때 보니 얼굴도 제법 부딪히던데 밥 씹는 데는 지장이 없는가?"
한참 깨작거리며 간신히 밥을 먹는 시늉만 하던 수현씨에게 묻는 검후의 말이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여자 치고 꽤나 흉하게 나뒹굴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역시나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다.
처음에는 워낙에 강자인 그녀이니만큼 약자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해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싶다. 표정이 풀어질만 하면 얘기를 꺼내는 그녀의 모습이 이제는 밉살스러워질 지경이었으니까.
"자. 식사 중에 꺼낼 이야기는 아니지만, 다들 얼굴이 가관도 아니라서 미리 얘기하겠다."
기하겠다."
조용히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은 검후가 우리를 쭉 둘러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애로운 미소로 일행의 식사를 돕던 그녀가 지금은 냉기가 풀풀 날리는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다.
============================ 작품 후기 부활절 연휴라 글 쓸 시간이 많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없네요 ㅜㅜ유부남독자님들은 아시겠지만 휴일에 시작되는 마눌님의 압박. 나들이라도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의 연속에 글 쓸 시간이 평일보다 더 없네요. ㅜㅜ글만 겨우 간신히 올리는 지경이라 리리플은 꿈도 못 꿉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부르는 마눌님의 '워 크라이'가 끊이질 않네요 ㅜㅜ
원래 제 마눌님이 본디 서울 태생으로 호는 '익덕' 장팔사모를 귀신같이 다루는 분이신지라 하루 하루 업뎃이 위태롭습니다.
조아라 수익도 마눌님 계좌로 들어가는데 엉엉 ㅜㅜ독자님들 선추코쿠로 제가 마눌님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소서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