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64화 (64/223)

< --  1-6. 강해지다.  -- >

현지가 다른 사람을 따르다니, 갑자기 기분이 복잡해졌다. 뭔가 시원하면서 섭섭한 기분. 나만을 따르던 강아지가 다른 사람에게 스스럼 없이 달려갔을 때의 느낌이랄까. 그녀가 내 애완동물은 아니지만 우습게도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으니 식사부터 하자꾸나."

검후가 현지를 이끌고 통나무로 만들어진 큼직한 식탁으로 간다. 현지를 자리에 앉힌 그녀가 모두에게 손짓을 한다. 그 손짓을 따라 식탁의 한켠에 자리를 잡으니 놀랍게도 검후가 앞치마를 둘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라 당황스러운 마음에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좁은 주방을 오고 간다. 내 놀라운 심정을 다 안다는 듯이 다른 일행들이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 역시 그런 그들을 마주 보다가 수현씨와 눈이 마주 쳤다.

"저는 요리를 못해요."

생긴 건 천상 여자인 수현씨가 얼굴을 붉히며 변명을 했다. 딱히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그런가보다 했더니 검후가 순식간에 재료를 썰고 다듬어 음식

을 만들어 버린다. 과연 검후라는 이름답게 재료를 다듬는 칼질이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

그 평화롭지만 당황스러운 광경을 지켜보기를 잠시, 먹음직스러운 나물과 찌개 따위가 식탁에 올라왔다. 못내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라 검후를 바라보고만 있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탁에 앉는다.

있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탁에 앉는다.

"잘 먹겠습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검후의 요리를 몇 번이나 먹어본 듯 태연하게 수저를 잡아 식사를 시작했다.

"여태까지 검후께서 요리를 하신 거야?"

결국 참지 못하고 용모에게 물으니 검후가 대답을 대신 한다.

"누가 하든 어떤가. 그냥 한 끼 감사한 마음으로 떼우면 그만인 것을."

검후가 여상스럽게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이었던지라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검후께서 손수 요리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이라서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산중에 홀로 살던 여인이 요리를 스스로 하는 것이야 이상할 게 아니고, 그저 나 혼자 먹던 음식들을 조금 더 많이 했을 뿐이거늘 그게 그리도 이상한가?"

그녀는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이다. 솔직히 검후의 요리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긴 하지만 그 매력은 도도함과 당당함, 그리고 범접치 못한 분위기에 있던 것. 그런 그녀가 여느 여자들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는 모습은 신선함을 넘어서 내게는 충격이었다.

"아니요. 이상하다기보다는 그냥 의외라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일행들은 식사에 열중하고 있다. 코끝을 간질이는 향긋한 냄새에 나 역시 뒤늦게 식사에 동참했다.

검후가 만든 음식은 굉장히 맛있었다. 흔히 만화를 보면 나오는 장면들 중 하

나인 검의 달인이 손을 댄 음식은 그 생기가 사라지지 않는다더니, 별 다른 양념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음식 하나 하나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정신을 놓고 식사를 하고 나니 배가 터질 듯이 불러왔다. 인심 후한 검후께서 계속해서 밥을 얹어준 탓에 지금 나는 배가 남산만하다고 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로 포만감이 넘치는 상태다.

식사가 대충 끝이 나자 수현씨가 익숙한 동작으로 그릇들을 수거해 설거지를 한다. 나 역시 도울 것이 없나 주방을 기웃기웃 하는데 검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체신머리없이 주방에 기웃거리는 모습은 보기 좋지 않으니, 이리들 와서 않게나."

보면 볼수록 의외의 모습을 보이는 검후다. 다소곳하게 차를 준비하는 모습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내 머릿속의 그녀는 당당한 커리어우먼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오늘 보여준 모습만 보면 꽤나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진 그녀였다. 그 당당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멋대로 만든 이미지였지만 왠지 환상이 깨는 듯한 느낌이다.

떨떠름하게 자리에 앉아있는데 검후가 차를 건네준다. 그 모습이 어찌나 낯설

던지.

"이 아이는 어떻게 된 건가."

식사를 끝내고 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온 현지를 보며 검후가 입을 열었다.

"난리통이 된 서울에서 만난 아가씨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생존자인 줄 알았는데 저희와 같은 이능력자더군요. 아마 각성할 당시 좋지 못한 일들이라도 겪었는지 줄곧 저런 상태입니다."

내 말에 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보기에도 화기가 머리끝까지 차 있어. 기운도 불안정하고. 무인이 그런 상태라면 내 손 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자네들은 나와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이니...."

현지의 상태를 짚어내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히 검후에게 현지의 치료나 그런 것을 기대 한 것은 아니지만, 단번에 현지의 상태를 알아본 그녀였던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이 실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화기가 저리 넘쳐서야 훗날 원 상태로 돌아온다고 해서 탈이 없을 리

가 있나. 내 비록 그 화기를 몰아내진 못하겠으나 어느 정도 억제는 할 만한 비방을 가지고 있으니 잠시 뒤에 처방을 해보겠네."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현지를 바라본다. 내 옷 끄트머리를 잡고 장난을 치는 모양이 천진하다.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귀여운 모습이지만 스무살이 넘는 처녀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맞지 않는 모습이기도 하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회복이 더딘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녀가 가진 힘 자체도 꽤나 위험스러워서 걱정이 태산이거든요. 조금이라도 위협을 느끼거나 하면 폭주해버리는 지라 조마조마해 죽겠습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니 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용모가 저 멀리 나동그라진다. 늑대인간화를 이룬 상태에서도 저리 속절없이 나뒹구니 과연 검후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런 용모에게 눈

길도 주지 않던 그녀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하얀 원반을 보고 몸을 뒤튼다. 그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맹렬한 공격이 그녀를 비켜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녀의 그림자. 본능적으로 나는 몸을 튕겨 올렸다.

"바로 이런 점. 움직임이 너무 단순해."

어느새 내 눈앞에 나타난 검후가 차갑게 말한다. 그리고 꽃혀지는 검후의 주먹. 그 가녀린 손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쒜에에엑 하고 공기를 찢어발기는 듯한 그 소리에 위기감을 느끼고 양손을 교차한다. 그리고 바로 찾아온 충격파.

"컥!"

가드 위로 맞은 주먹이건만 흡사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숨통을 막는다. 그리고는 급격히 추락하는 몸.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몸을 웅크리고 충돌에 대비한다.

"크어어!"

하늘이 노래지는 충격과 함께 내 몸이 바닥에 나뒹군다. 용모가 이런 기분이었

을까. 정말 별이라도 눈앞에 보일 듯한 고통이다. 단지 주먹 한방을 맞았을 뿐인데 온 몸이 저릿저릿할 지경이다. 바닥에 누워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저 멀리서 폭음이 다시 들려오는 게 수현씨도 같은 꼴을 당한 듯 하다.

"너희들이 유니온의 정예라지? 앞날이 깜깜하구나."

검후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할 변명의 여지가 없다.

"민용모 2등급, 김수현 3등급.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녀가 호되게 용모와 수현씨를 질책했다. 2등급과 3등급의 능력자들이 그녀 한명에게 처참하게 당했지만 그녀는 1등급의 이능력자. 우리와 차원이 다른 힘을 지닌 이다.

"그리고 김형준. 아직 여력이 남았음을 알고 있으니 어서 일어나라."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솔직히 지금의 상황이 납득이 가는 것도 아니고 반가운 것도 아니다. 그녀의 말에 굳이 따르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식사 후의 티타임까지는 좋았다. 검후의 차 우려내는 솜씨는 수준급이었고 차

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조차도 느긋하게 차를 즐길 수가 있었다. 하지만 티타임이 끝나자마자 검후는 대련을 제안했다. 본격적인 수련을 시작하기에 앞서 각자의 실력을 명확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나 뭐라나. 그리고는 지금 이 꼴이다. 간단한 대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절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일어나기 싫으면 그대로 있도록."

내가 대답이 없자 그녀가 그리 말한다. 저렇게 선선히 나올 줄은 몰랐었던지라 괜히 불안해지는 데 순간 오한이 느껴졌다.

콰아아앙!

폭음이 바로 곁에서 터져 나오고 나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채 바닥을 굴렀다. 정말 간발의 차였다. 갑작스러운 위기감이 아니었다면 저 폭발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으리라.

"쉬고 싶으면 계속 누워 있도록. 내 아주 편히 쉬도록 도와줄 터이니."

바로 곁에서 검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런 제길!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속삭임과 함께 한 가닥 날카로운 기운이 내 온몸을 쓸어왔다.

"이러시깁니까!"

고함을 치며 양 손으로 땅을 밀어낸다. 그렇게 몸을 일으키곤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그녀의 후속타를 대비해 이리 몸을 날렸건만 그녀는 멀리서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제대로 힘을 끌어내지 않는다면 꽤나 험한 꼴을 당할 게야."

그녀의 어조는 여상스럽기만 하지만 나는 등가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앞치마도 벗지 않은 모습이 얼핏 보기에는 현숙한 여인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용모와 수현씨의 꼴이 처참하다.

한참 전에 바닥에 나동그라진 용모는 그대로 기절한 듯 미동도 없고, 수현씨는 복부라도 가격당했는지 몸을 웅크린채 배를 부여잡고 있다.

"왜 저만?"

내가 억울하다는 투로 묻자 그녀가 바로 대답해온다.

"가진 힘이 다르니까."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라 황당할 지경이다.

"저 용모랑 같은 2등급인데요."

슬슬 뒷걸음질 치며 앓는 소리를 하자 검후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전에 보았을 때도 이미 힘은 충분했었지. 그리고 뼈가 여물고 껍질이 벗겨진 지금에 와서는 그릇마저 완성된 상태다. 2등급이니 뭐니 그런 유치한 숫자놀음을 할 경지는 진즉에 벗어난 게지. 힘에 걸맞는 대우를 해준다는데 그게 싫은가?"

그녀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의 수련제의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다. 수련의 필요성을 느끼긴 했지만 그저 팁과 노하우만 배워서 요령껏 강해지면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첫날부터 온힘을 다하라 강요하고 있다.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는 온몸에 기운을 집중했다. 봇물 터지듯이 밀려드는 막

대한 생명력, 힘의 근원이자 원천인 기운이 넘실거리며 내 피부 바깥에 형상을 이룬다. 가슴을 덮는 붉은 기운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고 순식간에 이뤄진 피의 갑주 '피바라기'. 그 날 이후로 더욱 두터워지고 거대해진 갑주가 내 온몸을 감싸고 있다. 지금의 기분 같아서야 검도 들지 않은 검후의 공격은 피바라기만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랬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지만.

"이제야 제대로 해볼 마음이 생긴 건가? 처음부터 그리 나왔다면 꼴사납게 바닥을 뒹굴지 않았을 것을..."

담담한 신색으로 고개를 끄덕인 검후의 말이다. 그녀야 그저 그렇겠거니하고 꺼낸 말이겠지만 이쪽에서 듣기에는 명백한 비웃음. 어차피 제대로 하기로 한 것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준비 됐으면 시작하지."

검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땅을 박찼다. 방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속도로 주변 풍경이 쑥쑥 뒤로 밀려간다. 순식간에 검후의 지척에 다다른 나는 그대로 오른손을 앞으로 뻗어갔다.

손끝에 모인 생명력이 어느새 거대한 송곳처럼 그녀를 꿰뚫어간다. 그 순간 담담했던 검후의 표정이 바뀐다.

"먼저 그 두터운 갑옷부터 시작하지."

그녀의 입꼬리가 서늘하게 올라간다. 제길. 역시 살살 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 작품 후기 오늘도 간신히 업뎃합니다. 마눌님이 글 쓰는데 어찌나 훼방을 놓으시던지. 물론 본심은 아니었겠지만 여러모로 지난합니다. 업뎃의 길은 ㅜㅜ12시 업뎃 할 것을 지금 겨우 올립니다. ㅜㅜ게다가 지금 배고프다고 성화셔서 리리플은 밥 먹고 와서 전편 코멘트란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선추코쿠로 제 삶을 윤택하게 해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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