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 강해지다. -- >
희선씨에게 눈짓으로 조용히 할 것을 당부하고 문가에 붙어 섰다.
"누구?"
문 너머에서 냉기가 풀풀 풍기는 음성이 들려왔다. 볼 것도 없이 민아의 목소리라 문을 열어주니 조금 굳은 표정의 민아가 냉큼 문 안으로 들어선다.
"조심성이 부족한 거 같은데..."
답지않게 혼잣말을 하며 방에 들어선 그녀가 선객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하지만 민아보다는 희선씨가 훨씬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윤민아 팀장님..."
떨떠름하게 민아를 바라보는 희선씨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다. 민아는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는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김희선요원? 자네가 왜 여기 있지?"
그저 예상치 못한 선객의 존재에 놀란 것만은 아닌 듯 잔뜩 날이 선 목소리다. 어깨를 움츠린 희선씨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 민아. 내가 설명하지. 그녀는 나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 거야. 저쪽에서 자고 있는 아가씨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 그렇게 몰아세우지 말라고."
그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한발 앞으로 나서니 민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나는 분명 나 이외의 사람은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전에 없이 화가 난 기색이라 나도 이제는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짜증이 난다, 불쾌하다, 그런 기색이 아니라 정말 화가 난 얼굴이다. 뭐라고 변명하자니 상황 자체가 변명의 여지도 없다. 유니온의 지부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나 스스로도 느끼고 있으며, 민아의 말대로 누군가의 방문을 허락하기에는 상황이 제법 복잡한 듯 보였다. 일단 내 방문을 어떻게 알았는지조차 불명확한 희선씨의 방문을 허락한 것 자체가 일단 큰 실수다. 나 역시도 께름칙한 기분이지 않았던가.
"김희선 요원. 자리를 비켜주도록. 나는 긴요한 볼일이 있어 온 것이니 사적인 일이라면 다음을 기약해라."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고 있던 민아가 희선씨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희선씨는 잠시 나를 서운한 듯 바라봤지만, 지금은 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지를 감싼 수상한 기류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다. 쓴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희선씨. 윤민아 팀장의 말대로 지금은 공적인 일이 우선이니, 얘기는 다음에 마저 하도록 하지요. 여기 폰 번호 줄테니 다음에 연..."
내가 핸드폰을 꺼내기가 무섭게 민아가 핸드폰을 낚아챘다. 잔뜩 성이 난 표정을 한 그녀가 내게 쏘아 붙인다.
"그 폰은 보안 폰이다.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라고 준 폰이 아니다."
그녀의 날 선 태도에 나도 희선씨도 순간 얼이 빠져 버렸다.
"더 할 말 없으면 가라고 했을 텐데?"
평소의 포커페이스는 어디 갔는지 잔뜩 찌푸린 얼굴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기색에 나도 더 이상 미적대지 못하고 희선씨를 배웅했다.
"일단 일이 이렇게 됐으니 다음을 기약하지요. 계속 부산 지부에 있는 거라면 제가 찾아올게요."
물론 그게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네. 형준씨. 기다릴게요. 그리고 사실은 이 말 전하러 왔어요. 형준씨 부모님 저희가 모시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말에 온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버렸다. 이런 병신 같은 놈.
나 스스로에 대한 욕이 절로 나왔다. 그간 있었던 사건들 탓이라지만 나는 정말 까맣게 부모님에 대한 일을 잊고 있었다. 서울이 그 난리통이 되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부모님에 대한 걱정은 요만큼도 하지 않았다.
"엄마하고 아버지가 여기 계세요?"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내 음성이 더욱 경망스럽다. 잔뜩 호들갑을 떠는 내 자신이 역겨울 지경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아비규환 속
에서 가족에 대한 걱정 한 번 안한 나라는 인간이 경멸스러울 지경이다.
"여기는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는 구역이라 다른 곳에 계세요. 멀지 않은 곳에 계신데 잘 지내고 계시니 걱정하지 마세요."
맑은 눈동자로 나를 안심시키는 그녀의 음성이 따뜻하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그간 가족도 잊고 있었던 한심한 나를 눈치 챌까 두려워 나도 모르게 자꾸만 호들갑을 떤다.
"다치신 데는 없으시죠? 두 분 다 별일 없는 거죠?"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을 한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아준다.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두 분 다 아무 이상 없으시고 지금 너무 잘 지내고 계시니까 걱정 마세요. 형준씨 걱정을 많이 하긴 하시지만 볼 일 끝나시면 저한테 연락 줘요. 제가 먼저 가서 형준씨 건강하다고 알려드릴게요."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감동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속이야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불효를 사죄드리고 안부를 확인하고 싶지만, 그 간 잊고 있었던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차마 그리 하지 못하겠다.
정말 마치 누군가 부모님에 대한 기억만을 쏙 빼버리기라도 한 듯 엄마와 아버지를 잊고 있었던 내 자신이 놀라울 정도다. 어찌 자식이라는 놈이 이리 무심할 수가 있는가. 부끄러움을 넘어서 수치스러울 정도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내가 신경 쓰지 못할 때 부모님을 안전하게 모셔준 희선씨에게 감사를 표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그 마음을 표현하자 그녀가 걱정 말라는 말을 남기곤 자리를 뜬다.
".. 질인가..."
희선씨가 나간 방문을 바라보며 한참이나 멍하니 있는데 민아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잔뜩 찌푸린 얼굴로 생각에 잠긴 그녀가 보였다. 복잠한 감정을 추스르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일단 지은 죄도 있고 하니 그녀가 뭐라고 말하는지에 따라서 사과를 하든 뭘 하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너는... 아니다 됐다."
입을 몇 번인가 벙긋거리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젓는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지금 상황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심각하니 조금 더 주의를 해줬으면 좋겠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나무라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무척 기니 간단하게 이야기 해주겠다. 중간 중간 궁금한 점이 있겠지만 일단 듣도록."
그녀의 말에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자세를 고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유니온 소속도 아닌 너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상황이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하겠다. 지금 유니온은 분열되어 있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지만 지금의 분위기를 보면 딱히 외부의 적으로 인한 것은 아닌 듯 해 바로 납득을 했다. 유니온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부산 지부에서조차 보안을 신경 쓰는 그녀의 태도에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고 할까.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분열의 징조는 이미 예전부터 있어왔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어쨌건 지금 유니온의 내부 상황은 심각하다.
괴수와의 전투가 패배하자 그간 있어왔던 알력다툼이 심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 전부터 있어왔던 사회의 전면에 나서서 국정을 주도해야 한다는 급진파와 그저 D섹터를 경계하며 인류의 보루로써의 역할을 하자는 온건파와의 대립이, 괴수와의 전투 이후 과격해져버렸다. 가뜩이나 힘에 도취된 급진파 사람들에게 이번 일은 좋은 빌미가 됐다고 할 수 있지."
그녀의 말에 따르면 전부터 힘을 가진 이능력자들이 나라의 수뇌가 되어서 이끌어야 한다는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과격한 이들인데 이번 군부의 뒤통수 사건 탓에 더욱 목소리가 커졌단다. 게다가 지금의 여론자체도 이능력자들에게 안 좋으니 그 의견에 힘이 실리고 있단다.
"그간 적극적으로 자신의 맡은 바 소임에만 충실하던 일반 이능력자들이 지금 급진파의 의견에 힘을 주고 있다. 그토록 고생했는데 알아주지도 않는데다가 이번 군부의 단독작전 탓에 반감이 커질대로 커져버린 탓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죽도록 고생해서 D섹터니 뭐니 지켜왔는데, 이제 와서 나라 말아먹은 역적 취급이니 분할법도 하다. 당장 나만 해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열이 뻗쳐서 환장할 지경이니.
"근데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 같은데 유니온의 분열이랑 현지가 무슨 상관이야 대체?"
유니온의 분열이 심각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왜 현지와 관련 있는 일이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내 말에 민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을 이어갔다.
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내 말에 민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을 이어갔다.
"상관이 있지. 아주 많이. 당신도 알다시피 그간 괴수와의 결전 탓에 이능력자들의 수가 엄청나게 줄어버렸다. 힘의 공백이 생긴 탓에 온건파와 급진파는 서로 드러내서 다투는 일만은 없었다. 근데 이변이 생겨버렸지."
그녀의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5등급 이상의 이능력자들이 대거 희생된 탓에 힘이 위축되어버린 대한민국의 유니온. 그런 와중에 갑작스러운 이능력자들의 각성이 잇따르고 있다. 당연히 양측에서는 이능력자들을 포섭하려고 혈안이 되어 버렸는데 섭외한 이능력자들이 온전치 않다.
"기껏 포섭했더니 일반인이 되어버린다든지 하는 경우가 생기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그런 와중에 등장한 게 바로 너와 저 아가씨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민아가 왜 그토록 현지에 대해 보안을 엄수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반편이 이능력자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는 진성 각성자. 게다가 꽤나 강대한 이능의 소유자인 그녀다.
"단지 운 나쁘게 서울에서 각성한 이능력자일 수도 있지만, 그간 유니온에서 체크해온 이능 잠재능력자 중에는 없던 아가씨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지. 그녀 역시 이번 사건에서 이능을 얻은 케이스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다.
유니온은 내가 각성했을 당시에도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해서 상황을 수습했었다. 그런 것을 보면 유니온 자체 내에서 이능을 각성할 잠재적 인물들을 선별하는 뭔가 방법이 있다는 것은 진즉부터 짐작하고 있었고.
"유니온의 정보에 의하면 향후 3년 이내로 각성할만한 여성 이능력자들은 없었다. 그녀가 과연 단순한 이레귤러인지 그도 아니면 이번 사건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으로썬 그녀는 이번 사건의 수혜자라는 결론이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현지가 특별한 케이스라는 것은 이제 알겠는데 그게 왜 유니온의 파벌싸움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지는
아직 설명을 듣지 못했다.
"힘을 비축하는 데 혈안이 된 양쪽이 보기에 먹음직스러운 먹이이기도 하고, 그 이전에 지금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인물이니 명분을 얻기에도 좋겠지."
민아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꽉 막혔던 머릿속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아무리 고위라고 하나 검후나 허준영 같은 존재가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목 매달 이유가 없다 했더니 그런 이유였던가.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그녀를 얻는 쪽이 명분을 얻게 된다. 이 바보스러운 나라의 사람들은 명분이라면 껌뻑 죽으니 그간 이래 저래 부딪혔던 이들이라도 명분을 가진 이들을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제길. 더럽게 됐구만."
입맛이 쓰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니온의 파워게임에 휘말려 버렸다.
사실 나로서는 현지를 보호해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고, 그녀가 어느 쪽의 명분이 되든지 간에 큰 상관은 없다. 그런데도 고민이 되는 건 제 정신도 아닌 그
녀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 나였고 또 그 간절한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기 때문일까.
"근데 사실 어느 쪽으로 가든지 간에 상관없잖아? 어느 쪽 명분이든 간에 사태만 수습이 된다면야 좋은 거 아니야?"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사태만 수습하면 유니온의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잖은가. 민아가 고개를 젓는다.
"지금의 상황이 그냥 알력 다툼이라면 그렇겠지."
지금 들은 것만 해도 머리가 지끈 거릴 지경인데 아직도 더 남은 이야기가 있나. 잠시 뒤에 이어진 민아의 설명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 작품 후기 으어어어어!
이제 사건이 벌어질 시기입니다. 상황 전개가 얼추 끝나갑니다. 사실 저는 이런 부분이 더 빨리 써집니다만 음모설정이 길어지면 지루해지겠죠. 그러니 이제 뻥 터트리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의 인사 드리며, 선작과 추천과 코멘트를 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제 살림을 위해 쿠폰세트를 투척해주신 이름 모를 분들께 진한 감사를 드립니다.
리리플 들어갑니다.
ansi / 주인공은 스스로 이미 뭔가 상황이 심각하다 라고 깨닫고 있었습죠. ㅎㅎㅎ 걱정 안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아마도?
포닥 / 설마!! 그럴리가! ㅜㅜ진지무적독자 / 그래서 진심으로 반기지 못하는 자신을 미안해 하지요. ㅎㅎㅎ 이비앙 / 그러게요. 맴매 맞을라고. ㅎㅎㅎ지리산의늑대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ㅜㅜ 꼭 좋은 글
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천겁혈신천무존 / 에헬헬헬 민아! 민아! 하악 하악!
헬룬 / 감사합니다! 힘내서 투베 들어가겠습니다 다시! 도와주세요! ㅜㅜ세필로 / 그런 전개라니!! 참신한데요? ㅎㅎ폭렬용자 / ㅎㅎㅎㅎ 과연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