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 강해지다. -- >
부산 지부는 부산시의 외곽에 위치한 빌딩 한 채였다. 서울 지부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꽤 규모가 있는 건물이었는데 입구에서부터 삼엄함이 느껴졌다. 역시 군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난 뒤라 유니온도 경계에 신경 쓰고 있는 건가. 건물의 그림자와 이곳저곳에 몸을 은신한 채 경계를 하고 있는 이들이 꽤나 많은 수다.
민아의 뒤를 따라 들어가니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지만 원래라면 꽤나 복잡한 검문을 통과해야 했겠지. 가뜩이나 무거운 마음이 건물 내에 감도는 우중충한 분위기 탓에 더욱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덩달아 발걸음도 무거워진다.
그녀가 107호실이라고 쓰인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일단 보고를 하기 전에 씻고 휴식을 취해라. 꼴이 말이 아니구나."
은근히 냄새가 난다는 듯한 표정이라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까탈스러운 년. 사지에서 생환한 사람한테 저런 태도라니. 역시 정을 붙일 수가 없다니까.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방으로 들어서는데 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다행이다."
워낙에 작은 음성이었던지라 제대로 듣지 못해 그녀를 멀뚱 멀뚱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진다.
"회복 되서 다행이라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한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나온다. 이 솔직하지 못한 아가씨 같으니라고. 내가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자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괜스레 화제를 돌렸다.
"이현지라고 했었나. 아가씨 방은 따로 준비 되어 있으니 나를 따라오도록."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선 현지를 일별한 민아가 몸을 돌려 방을 나선다. 몇 걸음인가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
"?"
의아한 표정으로 현지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다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전에 말했지? 이쪽도 정상은 아니라고. 나하고 떨어질 생각을 안 하네."
내 옷깃을 꼭 붙잡고 떨어지지 않는 현지를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쉰다.
"무.. 무슨 소리냐! 그.. 그러면 남녀가 한방에 있겠다는 것이..."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는 민아가 손발을 휘적거리며 허둥댄다. 평소 볼 수 없던 태도라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하는데 그녀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져 있다.
"아... 안 된다... 여자들을 위한 방은 따로 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간신히 웃음을 참고 대답했다.
"큭. 아니.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어. 이 아가씨가 안 떨어지는 거지. 내가 붙들고 있는 게 아니라고."
끝에 가서는 결국 말하는 둥 마는 둥 그저 웃기만 했지만 민아는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열렬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서울에서 함께 지냈던 시간들이 그래도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 덕에 나는 현지의 이런 태도가 익숙하지만 민아의 눈에는 영 거슬리나 보다. 딱 봐도 엄격한 분위기의 민아인데 지금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겠지.
"말했잖아. 너하고 내가 안 된다고 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이 아가씨는 남의 말을 원체 안 듣거든."
갑자기 눈을 치켜 뜬 그녀가 나를 노려본다.
"말하는 것을 보니 너는 괜찮다는 걸로 보이는 구나."
왠지 모르게 서슬 퍼런 그 말에 오한이 돋았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응. 뭐 안 될 거야 없지. 이미 서울을 빠져 나오기 전부터 그렇게 지내왔기도 했고. 나는 상관 없는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아가 몸을 펙 돌리곤 방을 나선다. 뭐라 더 말할 것 같더니 그대로 사라져 가는 걸음이 꽤나 성큼 성큼이다. 괜스레 잘못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뭐.
여전히 내 옷깃을 붙잡고 나를 바라보고 있던 현지는 민아가 사라지자 손을 풀고는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종종 걸음으로 침대로 향한 그녀는 이내 털썩하고 몸을 눕히더니 그대로 잠이 든다.
이능 발현의 후유증인지 뭔지 틈만 나면 잠을 자는 그녀라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유니온까지 온 마당에야 더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최소 나와 둘이 있을 때보다는 그녀의 상태에 대해 더욱 적절한 조치를 취할 이들이 많이 있을 테니까.
도로롱 거리며 가볍게 코까지 거는 현지를 보다가 욕실로 향했다. 벌써 며칠째 씻지를 못했던 탓에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희한하게도 몸에서 악취가 난다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지만 샤워가 생활화 된 문명인으로써 며칠간의 생활이 고욕이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상쾌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욕실의 안쪽에 놓인 옷가지가 보였다. 딱 봐도 남자 옷인데다가 사이즈도 나한테 맞을 것 같은 게 날 위해 준비한 옷인가 싶었다. 친절하게도 속옷까지 준비되어 있었던 덕에 나는 샤워 후에 헌 옷을 다시 입는 찝찝한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타올로 머리를 털어가며 욕실을 나서니 방에서 악취가 진동을 한다. 아까는 모르고 있었는데 내 몸이 깨끗해지고 나니 새삼 코가 고통을 호소했다. 악취의
원흉은 볼 것도 없이 현지 그녀다. 며칠 동안 씻기는커녕 대소변도 제대로 가리지 못했던 그녀였으니 그 냄새가 오죽 했으랴.
모처럼만의 상쾌한 기분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아. 이대로 있다간 다시 냄새가 옮을 것 같아.
아. 이대로 있다간 다시 냄새가 옮을 것 같아.
그렇다고 그녀를 씻기기도 꺼려지는 게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닌 그녀고, 며칠간 대소변 수발을 드느라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라고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폐허로 변해버린 서울에서 지낼 때에야 사실 볼 사람도 없고 하니 거의 야만인처럼 생활을 했었지만 이제는 다시 문명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복잡한 시선으로 코를 도로롱 거리는 그녀를 보고 있다가 나는 그녀를 깨웠다. 내가 자신을 부르자 바로 눈을 뜬 그녀의 눈빛이 마치 강아지와 같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와 피식 웃고는 그녀를 일으켰다.
"현지야. 목욕하자. 목욕 알지?"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옷을 훌렁 벗어버리는 그녀다. 속옷조차도 걸치지 않았던 그녀는 금세 나신이 되어 욕실로 뛰어 들어간다. 문을 닫을 생각도 없이 욕조에 들어가 쭈그리고 앉은 그녀가 말똥 말똥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 목욕이 뭔지는 기억이 하나보네."
쓰게 웃으며 욕실로 걸음을 옮기던 찰나, 방문이 열리고 민아가 나타났다.
그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맡아지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렸다가 내게 입을 열었다.
"네 옷이야 원래 사이즈를 알았으니 준비해뒀지만 그 아가씨는 준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입던 옷을 가져왔는데..."
말을 잇던 그녀가 문이 활짝 열린 욕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어버버 거렸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벌거벗은 현지를 가리키며 내게 입을 뻥긋거렸다.
"아. 냄새가 너무 나서 씻기려고."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던 나는 점차 변해가는 민아의 시선이 마침내 경멸로 바뀌었을 즈음이 되어서야, 지금의 상황이 오해를 사기 딱 좋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이. 이봐. 오해하지 말라고."
마치 입에 모터라도 단것처럼 나는 빠르게 변명을 토해냈다. 현지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과 대소변도 스스로 가리지 못한다는 것. 서울에서 그간 있었던 일을 속사포처럼 쏟아내자 민아의 표정이 그제야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해도 눈빛은 절대 곱지 않았지만.
"그럼 내가 씻는 걸 도울 테니 당신은 방에 있도록."
내 설명을 다 들은 그녀가 소매를 걷는다. 누군가의 목욕시중을 들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수트 차림의 그녀였지만 본인이 그리 한데서야 뭐.
혹시 현지가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난리를 칠까봐 잠시 걱정을 하긴 했었지만, 민아의 손길이 닿자마자 나른한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 마음을 놓았다. 아니 이상하게 배신감마저 느꼈다고 하면 내가 이상한 걸까.
몇 번인가 민아의 비명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오고 그들이 욕실에서 나온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상쾌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민아의 옷깃을 붙잡고 있는 현지를 보니 배신감이 더욱 커진다. 민아가 옷을 새로 가져왔는지 원피스를 입고 쫄래 쫄래 달려가 침대에 다시 몸을 눕히는 윤지다. 기력이 다 빠진 모습으로 있는 민아의 꼴이 말이 아니다. 멀끔했던 정장은 물에 흠뻑 젖어 있고, 단정
했던 머리도 이리저리 흐트러져있다. 흰 블라우스가 물에 젖은 탓에 그 적나라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흠뻑 젖은 옷 탓에 몸에 착 달라붙은 옷감이 그녀의 실루엣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격하게 나와 주신 훌륭한 몸매다. 음... 전부터 느낀 거지만, 성격하고 말투 이상한 거 빼면 딱 내 스타일인데...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으면 나를 부르도록."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몸매를 감상하느라 정신을 쏙 빼놓고 있는데 그녀가 다부진 표정으로 이야기 했다. 다부진 표정에 비해 꼴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나는 그저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건성 건성 대답을 하는 기색을 눈치 챘는지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혔다. 그제야 자신의 꼴을 눈치 챈 모양이다. 무안할 법도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어깨를 피고 자세를 당당하게 바꾼다. 부끄러운 건 매 한가지인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내 앞에서 부끄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듯 하다. 나야 덕분에 좋은 구경을 하고 있으니 감사하지만.
평소 성적인 차별이나 그런 부분에서 당해온 게 많은지 오히려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은 우습다.
이 아가씨야. 그럴 때는 그냥 부끄러워 하는 게 정상이라고.
여러모로 비정상적인 아가씨들 틈에 끼어 있다 보니 나조차도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너무 노골적으로 그녀를 훑어 보는 건 그만 두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필사적으로 평온한 표정을 가장한 그녀의 얼굴이 더 할 수 없이 붉다.
괜스레 미안한 감정이 들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보다 서둘러 오라고 한 거에 비해서 좀 느긋한 거 같은데?"
내가 화제를 돌리자 그녀가 냉큼 대답해온다. 오늘 여러모로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민아다.
"일단 지부까지 온 이상 서두를 이유가 없다. 밖에서야 보안 문제도 그렇고 신경 쓰이는 것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굳이 서두를 필요 없다. 일단 피로를 풀고 그 뒤에 다음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다."
역시나 말은 차갑게 하고 도도한 태도지만 그 속은 꽤나 남을 챙긴다. 처음에야 그저 싸가지 없는 년이라고 생각했던 나지만 그저 말투와 겉모습 때문에 생
긴 편견이라는 것을 이제야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보다 저런 옷도 유니온에 준비 되어 있었네."
다음 일에 대해 궁금하기도 하지만 차차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화제를 돌리니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진다.
"무슨 소린가. 유니온에 저런 옷이 있을 리 없잖은가. 저건 내 옷이다."
그녀의 말에 현지를 다시 살펴본다. 파스텔 톤의 노란 원피스다. 어른스럽기보다는 사랑스러운 디자인의 옷인지라 그게 이 도도한 민아의 옷이라는 게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저건 여고생 취향이지 않나 싶어 몇 번이고 옷을 살펴보는데 민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한 번도 입어보지는 않았다."
이 아가씨가 오늘 여러 가지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구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자꾸만 하는 건 스스로의 평정이 무너진 탓이겠지.
괜스레 미소가 새어나와 흐뭇한 표정으로 민아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의 얼굴에 기분이 나쁘다는 기색이 역력해진다.
============================ 작품 후기 컴상태가 이상해서 익스플로러가 안 켜집니다. 간신히 수정해서 다른 컴으로 올리긴 하는데 큰일 날 뻔 했네요.
다들 주말은 잘들 보내셨죠? ㅎㅎㅎ 오늘 숙면 취하시고 내일부터는 힘차게 한주를 시작하세요. 전 아직 일요일 오후라서 ㅋㅋㅋㅋ아 그리고 주인공 답답하다는 코멘트가 많아서 알려드립니다.
민아는 당시에 담당자라기보단 유니온의 상관으로 주인공에게 접근한 거고 주인공은 당시까지만 해도 이능폭주를 억제할 방법이 없던 상태입니다. 그러니 반말이고 뭐고 감수해야죠. 오히려 나중에 가서 반말로 응수한 행동이 꼴통짓입니다. 자기 생명줄 잡고 있는 사람한테 대들다니 멍청한 행동이었죠.
대부분의 행동에는 사정을 집어넣었었습니다만 아마 그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나봅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해서 더욱 납득하기 쉬운 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늘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선작과 추천 코멘트 쿠폰을 주신 모든 분
들께도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민아는 이제 사정권 안에 들어갔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ㅋㅋㅋ첨언. 요즘 생존물 볼만 한 거 뭐 있나요? 출판 때문에 교정 보기 전에 다른 분들의 글도 참고하고 싶은데, 요즘 보는 생존물은 자베트 작가님의 '짐승'밖에 없어서요. 호쾌하고 시원한 글이라 재미 있게 보고는 있습니다만. 출판용에 참고하기엔 수위가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