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57화 (57/223)

< --  1-5. 격변하는 흐름 속에서...  -- >

'무슨 소린가? 새로 각성한 이능력자랑 함께 있다는 건가?'

그저 짐덩이 하나 떠맡긴다는 기분으로 꺼낸 얘기건만 민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어. 각성 후유증으로 제 정신이 아니긴 한데 대충 봐도 꽤나 고위의 이능력자야. 화염계열인데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이능을 발현하거든. 그것도 꽤 뜨겁다고."

내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민아가 다시 말을 꺼낸다.

'지금 위치가 어디라고 했지? 수원이라고 했나? 그럼 당장 부산지부로 와라. 그 이능력자에 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지금 바로 출발했으면 좋겠다.'

좀처럼 보이지 않던 호들갑을 떠는 그녀라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아니.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야. 군에서도 검문을 하는 것 같고, 나 지금 빈털터리라니까. 전에 그렇게 뛰쳐나가곤 또 사정이 있어서 그나마 있던 것도

다 태워먹어서."

애초에 서울행에 가지고 간 것이 없기도 했지만 현지의 난동과 탈태환골을 거치면서 모든 소지품을 잃은 상태다. 다행스럽게 수원을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제 기능을 하는 것 같지만 정작 내가 돈이 없다. 기차를 타건 버스를 타건 뭘 하려고 해도 돈이 없으니 난감하기만 하다.

'지금 정확하게 위치를 말해라. 사람을 보내겠다.'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대답하는 민아다. 그녀의 호들갑에 이제는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건데? 저번 일로 타격이 컸겠지만 갓 각성한 이능력자한테 매달릴 정도로 유니온의 사정이 안 좋은 건 아니잖아."

고위 능력자의 태반을 잃은 저번 전투 이후 유니온의 힘이 약해지긴 했지만 민아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를 모르겠다. 물론 꽤나 고위의 힘을 가진 현지지만 그렇다고 통제도 제대로 못하는 능력을 가진 그녀에게 연연할 정도로 유니온의 사정이 급한 건가?'그게 아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전화로 얘기할 수 없으니 말하지 못하지만 이

일은 당신 생각보다 훨씬 중대한 일이다. 보안 유지하고 조심해서 와라. 기다리고 있겠다.

'거창하게 떠들어대는 그녀의 태도에 의문이 더욱 커진다. 고작 이능력자 하나일 뿐이잖아?'

그리고 혹시 몰라서 말하는데 마중 나간 유니온의 사람에게도 절대 비밀을 지켜라.'들을수록 혼란스럽다. 이능력자 하나의 존재가 뭐 그리 대수라고 같은 편에게까지 숨긴단 말인가. 사정을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지금 말해줄 것 같지도 않아 포기했다.

대충 근방에 보이는 가게 간판을 말해주고 위치를 설명해주니 민아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은지 불과 30분도 지나기 전에 낯선 인물이 접근했다.

"김형준씨?"

대충 봐도 분위기가 남다른 게 유니온의 이능력자인가 했더니 역시나였다. 그의 안내를 따라 새로운 휴대폰과 얼마간의 현금을 받아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민아의 호들갑과는 다르게 유니온에서 마중 나온 이능력자는 현지에게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는 그녀 탓에 곤욕을 치르긴 했지만 널린 게 음식점이라 대충 김밥 따위를 싸가지곤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검문이 심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수원시를 벗어나는 동안 그저 형식적인 검문소를 몇 번 통과했을 뿐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그저 여상스러운 모습이라 서울이 지옥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이 새삼 낯설기만 했다.

그간의 피로가 쌓였는지 현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김밥을 손에 말아 쥐곤 잠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그녀가 잠시 몸을 뒤척이다가 김밥을 입에 문다. 몇 번인가 씹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지 입을 헤 벌리는 그녀의 모습.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사람 같지 않은 그 천진한 모습이 이질적이다.

군과 유니온의 일부터 시작해서 현지, 민아까지 온통 머리 아픈 일 투성이다. 잠시라도 쉴까 해서 눈을 감았지만 복잡한 머리 탓에 쉬이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부산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뜬 눈으로 멍하니 있어야 했다.

찌뿌둥한 몸을 스트레칭하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민아가 보인다. 깔끔한 네이비 정장에 마치 스튜어디스처럼 단정하게 묶은 머리가 그녀의 도도함을 한층 더욱 드러낸다. 다른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바글거리는 사람들로 혼잡한 터미널에서 그녀 주변만이 한산했다.

"일단 나를 따라와."

그녀가 현지를 힐끔 보고는 바로 등을 돌렸다. 정나미 떨어지는 년. 오랜만에 봤으면 안부라도 물어야지. 속으로 궁시렁 댔지만 언제나와 같은 모습이라 왠지 안심이 되기도 한다.

빠른 걸음으로 인파를 헤치고 가는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사람이 많은 곳에 오자마자 내 소매를 꼭 붙잡고 떨어지지 않는 현지 탓에 몇 번인가 사람들의 잔소리를 들으며 민아를 따라갔다.

혼잡한 터미널을 빠져나가 주차장에 이른 민아가 검은색 세단 앞에 멈춰 섰다. 전에 보았던 리무진과는 다르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준준형 승용차다. 민아가 운전석의 문을 열며 나를 재촉했다. 통화할 때부터 그러더니 꽤나 조급한 모습이라 군말 없이 차에 몸을 실었다. 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룸미러로 뒷좌석의 현지를 한 번 쳐다본 민아가 입을 연다.

"저 아가씨가 그 아가씨인가?"

현지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꽤나 복잡하다.

"어. 그보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난리를 떠는 거야?"

마침 나도 지금의 상황이 궁금한지라 바로 물었더니 그녀의 표정이 금세 무거워졌다.

"설명하기 복잡한 이야기긴 하지만 믿고 이야기 해주겠다."

꽤나 거창하게 얘기를 시작하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자세를 고치고 귀를 기울였다.

"먼저 저번 전투 이후부터 설명을 해야겠지. 당신이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녀의 얘기와 함께 시간은 내가 절망에 빠져 있던 그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군에서 우리에게 모든 실책을 떠넘겼습니다. 현재 방송을 포함한 모든 미디어에선 유니온과 이능력자들을 역적 취급하고 있습니다."

에선 유니온과 이능력자들을 역적 취급하고 있습니다."

지난 작전에 포함되었었지만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서울 지부장 신은혜가 윤민아의 맞은편에 앉아있다.

"뭐 예상했던 일이지. 이렇게까지 일을 벌려놨는데 책임을 질 군부가 아니잖아. 그리고?"

새삼 특별할 것도 없다는 태도로 민아의 보고를 재촉한 그녀의 얼굴이 전과는 다르게 피로에 절어있다.

"비공식적인 정보긴 하지만 서울의 생존자들을 중심으로 무작위로 이능력이 각성하고 있다는 보곱니다."

신은혜가 눈을 빛낸다.

"그거 꽤 고무적인 일이군. 지금 상황이 정리되는 데로 바로 수거에 들어가야겠어."

꽤나 비인간적인 태도긴 하지만 밝은 얼굴로 말한 그녀에게 민아가 다시 보고를 이어간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새로 각성한 이능력자들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보고를 하는 민아 본인도 혼란스러운 심정인지 표정이 복잡하기만 하다. 신은혜가 턱짓으로 보고를 재촉한다.

"각성시의 현상은 이제껏 있어왔던 현상과 동일합니다만. 그게 우후죽순 격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어제 이능력을 발휘했던 이가 다음날은 또 이능이 사라진 상태고. 또 며칠 뒤에 등급 이상으로 보이는 힘을 발휘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보고된 각성사례들 어디에도 일치하지 않는 경우들입니다."

새롭게 각성한 이능력자들의 불완전함을 들은 신은혜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진다.

"그거 각성시 후유증으로 일시적인 무기력상태 아니야? 그런 경우는 종종 있었

잖아."

신은혜의 말에 민아가 고개를 흔든다.

"전혀 다른 케이습니다. 각성 후 무기력상태 같은 경우에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능의 발현이 가능했었습니다. 이번 경우는 마치 처음부터 이능력의 각성이 없던 이들처럼 평범한 이로 돌아간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더 두고 지켜봐야겠지만 지금으로써는 마치 이능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 다니는 듯 하다는 게 저희 팀의 의견입니다."

설명이 이어지자 신은혜가 침음성을 흘린다.

"그게 뭐야. 이능이 옮겨 다니는 것 같다고? 잠깐만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온 거지? 괜한 호들갑이면 다들 재미없을 줄 알어."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신은혜의 표정이 말뿐만이 아니라는 듯 사납기만 하다. 민아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갈 뿐이다.

"정보를 전해준 이능력자의 주관적인 의견이 다소 섞여 들어갔지만 지금으로썬 그 의견이 가장 유력합니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그녀의 어조가 단호하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이마를 부여잡고는 무거운 음성으로 묻는다. 평소에는 민아 못지 않은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표정이 시시각각 변한다.

"아니 그보다 그 정보의 출처가 대체 어딘데? 신뢰할 수 있는 정보야?"

이제는 숫제 신경질을 부리는 듯한 태도인지라 그 어조가 날카롭기 그지없다. 가뜩이나 괴수와의 전투에서 입었던 피해니 뭐니로 복잡한 상황인데 또 다른 변수의 출현이 그녀의 신경을 곤두 세운다.

"정보의 출처는 괴수와의 일전 이후 가족이 걱정되어 가족과 있었던 4등급 이능력잡니다. 몬스터들이 불어나기 시작하자 서울을 벗어나던 중 자신의 형제들이 번갈아 각성을 겪었답니다. 빙계 이능을 발현했던 형이 바로 다음날 능력을 상실하고 동생이 동일한 이능을 발현했다고 합니다."

민아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신은혜의 표정이 점점 무거워진다.

민아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능이 각성자를 버려두고 계속해서 옮겨 다닌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그게 말이 돼?"

나도 모르게 얼빠진 질문을 던진다. 민아의 표정 역시 복잡하기 그지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녀 역시 혼란스러운지 단호한 어조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사건의 연속에 머리가 띵할 지경이다.

"햐. 세상이 어찌 되려고... 완전히 말도 안 되잖아. 뭐 규칙도 없고 법칙도 없고, 순 지 멋대로 아닌..."

황당한 심정에 되는 데로 주절거리던 나는 순간 소스라쳤다. 머릿속을 꿰뚫는 한가지 생각 탓에 온몸이 벼락에라도 맞은 듯 굳어 버렸다.

세상의 법칙과 모든 인과를 비틀어 버리는?

"D섹터?"

신음과 같은 한 마디가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세상의 모든 법칙과 인과가 비틀리는 그곳, D섹터. 그런 표현이 딱 어울리는 상황이 아닌가! 주인을 옮겨 다니는 이능이라니. 게다가 한둘도 아니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능각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초현실적인 이능력자들의 세계지만 몇백년이나 이어졌던 법칙이 순식간에 무너진 상황에 떠오르는 단어는 단 한가지다.

"D섹터?"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그 한마디에 민아가 의문을 표한다.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휘감는다. 억지로 고개를 젓고 머릿속을 비워내려 한다. 섣부르게 이야기 했다가는 그 불길한 예감이 이뤄질 것만 같아 나는 입을 꼭 다물었다. 민아가 몇 번인가 말을 걸었지만 차마 입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뒷자석에서 잠이 든 현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유니온의 부산지부로 향하는 차 안에 침묵이 들어앉았다.

============================ 작품 후기 으아아! 오늘 업뎃은 기적입니다.

업무가 몰리는 바람에 토요일까지 추가 근무중인데 다행스럽게 글이 잘써져서 업뎃합니다.

독자분들이여 선작과 추천 코멘트 쿠폰으로 제게 힘을 주소서. 늘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인기투표 설문 조사 마무리 합니다.1. 주인공(김형준)    (24명/30%) 2. 츤데레 윤민아    (16명/20%) 3. 천사같은 김희선    (5명/7%) 4. 미친개 김도연    (5명/7%) 5. 농염한 서울지부장    (3명/4%) 6. 하얀 송곳니 민용모    (7명/9%) 7. 오피스텔 꼬맹이 지영, 선아    (0명/0%) 8. 1등급 이능력자의 위엄. 전지현    (5명/7%)

9. 부드러운 미소가 매력인 강자. 허준영    (0명/0%) 10. 매력폭발 글쟁이 노쓰우드    (15명/19%) 1위는 주인공의 위엄을 뒤늦게 보여준 김형준! 저도 의외의 결과군요. 2위는 츤데레 취향이신 분들이 많은 지 윤민아가 차지 했습니다. 3위는 대망의 글쟁이 노쓰우드 ㅋㅋㅋㅋ이 노쓰우드 ㅋㅋㅋㅋ그 외에 남자캐릭터는 특이하게 민용모 한명만이 득표를 했군요.

독자분들의 취향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는 설문이었습니다. ㅋㅋㅋ그리고 갑질에 대해서 말씀하신 분은... 음 노코멘트.. 쓰다보니 갑질 나올 틈이 없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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