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56화 (56/223)

< --  1-5. 격변하는 흐름 속에서...  -- >

비명소리와 동시에 총성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무언가 갑주에 부딪히고 바로 튕겨져 나가기를 수십 수백차례,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다시 비명이 이어진다.

"끄아아악!"

군인들의 한가운데서 피어오르는 시뻘건 화염이 보였다.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는 화염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밀집한 상태에서 나를 경계하고 있던 이들이라 피해가 더욱 크다.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탓에 금세 온 사방이 아비규환이 되었다.

"멈춰!"

고개를 돌리니 눈을 번들거리는 그녀가 보였다. 평소의 맹한 표정은 어디 갔는지 살기 어린 얼굴을 한 그녀가 섬뜩하게 웃는다.

"왜?"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는 그녀의 태도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자신이 한 일이 뭔지도 모르는지 밝기만 한 그녀의 미소가 도리어 소름 돋는다.

"멈추라고!"

필사적으로 외치지만 화염은 더욱 커져만 가고 비명이 더욱 늘어간다. 고통에 가득찬 비명 탓에 당장이라도 두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다.

"왜? 적이잖아. 저 사람들 우리 죽이고 싶어 해."

망가져버린 정신 탓에 살의나 적의에만 반응하는 그녀의 성격이 사고를 쳐버렸다. 아마도 저들의 노골적인 적의가 그녀를 자극한 듯 하다.

말로 설득될 상황이 아니라 그녀에게 손을 뻗어 가는데 그녀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멈춰. 적이 아니야."

총성이 끊이질 않지만 피바라기와 붉은 막을 뚫지 못한 총탄들이 바닥에 싸이고 있다. 어차피 저들이 무슨 짓을 하건 그녀와 나는 안전했다. 굳이 이렇게 살인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몬스터라면 몰라도 인간을 상대로 이능의 발현은 절대 생각해본 적 없던 나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처럼 보였다.

"너 이상해. 저들은 적이야."

여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가 오히려 나를 이상하다는 듯 바라본다.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런 미친 짓을!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내가 이를 악다물자 그녀의 표정이 다시 바뀌어간다.

"너도 적이야?"

그녀의 주변에서 화염이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탓에 머리가 지끈 거린다. 그녀와 내가 실랑이를 하는 동안에도 비명은 계속된다. 돌아보지 않아도 여기까지 느껴지는 열기가 화염이 더욱 거세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멈추라고. 저들은 적이 아니야. 사람이잖아."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야. 사람인데 왜 우리를 죽이려고 해?"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의 그녀가 차라리 천진난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반쯤 미쳐버린, 아니 완전히 미쳐버린 그녀는 선악과 윤리를 배제하고 오직 적의와 호의만으로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걸로 보인다. 저 지옥 속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조그만 적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녀인지라, 군인들의 노골적인 적의에 완전히 나사가 풀려버렸다.

그녀가 시간이 흐른 뒤에 정신이 멀쩡해진다면 이 일을 기억할까? 만약 지금의 일을 기억한다면 그녀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있을까?

천진난만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답답함보다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건 훗날의 이야기고 그녀가 가져가야 할 업보, 지금의 나로서는 이 의미 없는 학살을 막아야한다. 해체되었던 투구를 다시 뒤집어쓰고 그녀에게 손을 뻗어갔다. 그녀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녀를 데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면 될 것이다. 내가 다시금 손을 뻗어가자 그녀 주변에서 넘실거리던 화염이 거세어진다. 의아함 가득한 눈빛이 적의로 변해간다.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위태롭다.

"그만 두자. 그냥 돌아가면 돼. 저들은 너를 해치지 못해."

쓰게 내뱉자 그녀의 눈빛이 흔들린다.

"아니야. 저들이 나를 죽이기 전에 내가 죽여야 해."

다시 원점이다. 그녀는 적의를 가진 존재들의 말살만을 말하고 있다. 화염에 휩싸인 군인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얼굴에 적의는커녕 공포만이 가득하다. 압도적인 힘에 의한 전의 상실. 그러나 그녀의 학살은 멈출 생각이 없다.

나는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걸까. 내가 이러는 순간에도 사람들이 덧없이 죽어가고 있다. 반쯤 뻗은 손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혼란스러운 심정에 그녀의 얼굴을 마주 바라본다.

광기와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이 위태롭게 일렁거린다. 새까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그 살벌하다고만 생각했던 눈동자 뒤에 숨겨진 다른 감정이 보인다. 마치 버림받기 싫어하는 새끼고양이의 눈빛이랄까. 막연하기만 한 감정이지만 나에게까지 배척받기 싫다는 그녀의 절절함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빛에 마음이 약해진 듯 하다. 그녀의 눈빛을 배신하기 싫다는 그런 감정이 내 손을 막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 속에서 허무하게 사라져가는 생명들이 있건만 손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적이 아니지? 그렇지? 넌 아니잖아.'

그녀의 눈빛이 말한다. 그 애절한 눈빛에 이를 악다물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들었다.

"꺄아아아악!"

그녀가 비명을 지른다. 화염이 나와 그녀를 휘감고 뜨거운 열기에 숨이 턱 막혔다. 이를 악물고 그녀를 안아들고 그대로 땅을 박찼다. 그녀의 힘이 내게 집중된 탓인지 군인들 사이에서 타오르던 화염은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고통과 통한의 비명을 뒤로 한 채 나는 몸을 날렸다.

발버둥 치는 그녀와 온몸을 휘감는 열기 탓에 진땀이 흘렀지만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달리기를 한참, 그녀는 지금 내 품에 안겨 잠이 들어있다. 지나치게 이능을 소모한 탓인지 기절하듯 의식을 잃고는 바로 잠에 빠져들은 그녀. 잠든

모습만은 여느 평범한 또래 아가씨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녀를 보는 내 심정이 복잡하다. 단순한 생존자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불완전하게 각성을 이룬 고위 이능력자다. 정신과 이능, 가장 중요한 두가지의 균형을 잃고 망가져버린 그녀. 마치 핵폭탄의 스위치를 손에 쥔 어린아이와 같다. 언제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니 과연 이대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도 될지 망설여진다. 지금만 해도 그녀가 깨어나서 난동을 피울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가뜩이나 중령이란 작자가 한 말 때문에 혼란스러운 머리가 더욱 지끈 거렸다. 군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유니온에게 그 죄를 덮은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일단은 유니온의 사람들과 만나는 게 우선이다. 불안정한 그녀 역시 유니온에게 맡긴다면 안심이 되겠지. 그들은 그녀처럼 각성 후 트라우마로 인해 망가져버린 이들을 회복시키는 데 나름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니.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버린다. 그녀가 잠든 사이 최대한 많은 거리를 달릴 생각으로 오직 달리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달리기를 한참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언제 깨어났

는지 모르게 뻔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당장이라도 난리를 피울까 뜨끔했지만 그녀의 눈빛이 의외로 평온하다. 평소의 맹한 눈빛이긴 하지만 왠지 모르게 유순한 느낌이기도 해서 의아할 지경이다.

바쁘게 놀리던 다리가 점차 느려지고 이내 멈춰 섰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를 내려놓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지 비틀대는 그녀를 잡아주고 나니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본다.

새까만 눈동자가 죽은 사람의 눈동자처럼 생기 하나 없다. 평소에도 맹한 표정이긴 했지만 지금은 의지 없는 인형의 눈동자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너 이름이 뭐야?"

뜬금없는 질문에 눈이 절로 크게 뜨여진다. 그녀와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정상적인 질문이긴 하지만 워낙에 난데없는 질문이었던지라 당황스러움이 더욱 컸다.

"기.. 김형준."

얼떨떨하게 대답하니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이현지."

그말을 끝으로 그녀가 다시 내게 안겨온다. 쓰러질 듯 몸을 기대오는 그녀를 다시 안고 보니 어느새 그녀는 눈을 감은 상태다. 뭐야. 이 여자.

원래부터 정상적이진 않았지만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그보다 이제 제정신이 돌아온 건가? 자신의 이름을 말할 정도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거 같은데. 의문이 머릿속을 채우지만 이미 잠든 것으로 보이는 그녀를 깨우기도 뭐해서 그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볼 뿐. 어차피 깨운다고 해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지도 의문이지만.

서울을 벗어나 달리기를 한참, 저 멀리 높게 솟아오른 아파트와 건물들이 보인다. 일단 유니온의 지부를 찾아갈 생각으로 도시를 향해 달리는데 문득 한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생각하면 군의 외곽지역에 검문이 없을 리가 없다. 도심으로 숨어드는 건 일도 아니지만 피바라기 안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다. 이능을 해제하고 들어가자니 변태로 몰릴 테고, 그렇다고 그냥 들어가자니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게 분명하고.

잠시 머리를 굴리던 나는 다시 땅을 박찼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테러리스트라니?"

도시에 숨어들어 옷가지와 휴대폰등을 훔친 나는 당장 유니온에게 연락을 취했다. 당장 기억나는 번호가 윤민아밖에 없어서 전화를 했더니 황당한 소리를 한다.

'지난 괴수와의 일전에서 교전 중이던 3개 사단급의 병력이 희생되었는데 그게 우리 유니온측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뭔 개소리야! 우리가 지들 때문에 무슨 꼴을 당했는데!"

나만 해도 전신에 화상을 입고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지 않았었던가. 운이 좋게 검후의 기운으로 몸을 추슬리고 지금은 치유가 되었지만 그때는 정말 걸레짝이 났었다. 그게 다 무모한 군의 포격 탓이었건만 지금 무슨 개소리라는 말

인가.

내 격앙된 외침에도 민아는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간다.

'사실이야 어쨌건 간에 이미 온 나라에 그리 알려졌다. 덕분에 서울의 희생자들과 지금의 상황의 원흉으로 유니온은 역적보다 더한 취급을 받고 있다. 국민들의 모든 원망이 우리에게 쏠려있는 상태다. 덕분에 지원을 왔던 타국의 이능력자들도 모두 본국으로 귀환한 상태고.'

들을수록 가관이다. 수백만이 넘는 희생자를 만든 사건을 전부 우리 탓으로 돌려버렸으니 국민들의 반감은 상상을 초월하겠지. 군부가 저지른 일을 우리가 덤터기 쓴 꼴이다.

"하지만 이상하잖아? 예전이라면 모를까 군도 우리가 없으면 이 상황을 타개하기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을 텐데?"

격앙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에게 물었다. 이능력자가 없이는 몬스터를 막는 게 어렵다는 사실은 지난 안개 속의 격전 이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막장으로 대응하는 군의 생각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우리도 그게 가장 의문이다. 현시대의 무기로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데 한계

가 있을 텐데 무슨 자신감인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계속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는다. 머리가 더욱 아퍼짐을 느끼곤 화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이번에 서울 쪽에서 생존자를 한명 구해왔는데 말이야. 갓 각성한 이능력자로 보이는데 제 정신이 아니야."

내 머리를 몇배는 더 복잡하게 만드는 원흉, 이현지의 존재를 넌지시 민아에게 말했다. ============================ 작품 후기 으아으아으아! 성실연재! 난이도가 나이트메어급입니다요 ㅜㅜ제 평생 쓸 성실함을 이번에 다 쓰는 것 같아요 엉엉 ㅜㅜ쿠폰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빼먹지 말고 죽을때까지 달리라는 말씀으로 듣고 달리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선작과 추천 코멘트를 달아주신 분들과 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코멘트 중에 검후의 이름 물어보신 분 계셨죠? 검후의 이름은 전지현입니다. ㅎㅎ군의 행동에 대해 코멘트가 많은데 실제 우리나라 군대가 이럴 리 없죠. 오늘도 불철주야 자주국방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인데 글로나마 이렇게 묘사해서 죄송할 뿐입니다.

극중 군의 행동은 조만간 밝혀질 겁니다. 스토리상 중요한 분기점이라 지금 밝히지 못함을 양해드립니다.

그럼 좋은 주말들 되시고 저는 또 다음편에 찾아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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