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격변하는 흐름 속에서... -- >
고함소리와 비명소리를 따라 달려 도착한 그 곳은 이미 참혹한 전장 그 자체였다. 곳곳에 흩뿌려진 붉은 피와 살점들 사이로 군복 조각이 보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들려오던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이제는 들리지 않는다. 그저 가래 끓는 몬스터의 으르렁거림만이 들릴 뿐.
좀 떨어진 곳에서 품에 안고 있던 아가씨를 내려놓는다. 몬스터들 한 복판에 던져놔도 살아남을 아가씨니만큼 그녀를 두고 걸음을 옮기는데 망설임이 없다.
참혹한 현장의 한 구석에서 몬스터들이 뭔가를 아구아구거리고 있다.
"키이익?"
저들끼리 식사에 열중하고 있던 거대한 몬스터가 내게 시선을 돌린다. 가로로 쭉 찢어진 눈에 가느다란 눈동자, 온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이 강인해 보인다. 악어와도 같은 대가리를 하고 있지만 몸은 사람의 것과 똑같은 기괴한 모습, 5등급 몬스터인 '용인'들이다.
또 다른 사냥감이 찾아왔다는 것을 기뻐하는 건지 그 찢어진 입이 보기 흉하게 벌어진다. 쉭쉭거리는 숨소리와 듣기 싫은 괴성, 웃고 있는 건가? 나 역시 웃
음이 나왔다. 5등급 몬스터라면 꽤나 상위의 놈이고, 수도 있으니 전 같았으면 이렇게 그들의 한복판으로 자처해서 들어갈 일은 없었겠지.
열 마리가 조금 안 되는 놈들 중 세 마리정도가 식사를 중단하고 일어났다. 이놈들이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가 무리로 활동을 하는데다가 나름 조직 체계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일어난 놈들은 놈들 중에서도 서열이 낮은 놈들이겠지.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놈들의 덩치가 거의 내 두 배다. 키엑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놈들이 나를 둘러쌌다. 도망가지 않는 내가 신기했던지 바로 달려들지 않고 나를 살펴본다. 어딘가에 있을 생존자를 생각하면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늘어져있던 양 손을 치켜들어 휘두른다. 금세 손끝에 쥐어지는 섬뜩한 붉은 빛깔의 검 한 자루. 기고만장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용인들의 허리 어림을 붉은 궤적이 스쳐갔다. 아직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놈들을 그대로 지나쳐간다. 정면의 놈이 내가 접근하자 손을 뻗어오다가 괴성을 지른다.
풀썩하는 소리가 등뒤에서 연달아 들려왔다. 허리가 양단된 놈들이 쓰러지는 소리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식사에 열중하던 놈들이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양손을 그대로 뻗어갔다.
손끝에서 쏘아져나가는 붉은 궤적들이 놈들을 꿰뚫었다. 놈들이 자신의 몸을 관통하고 있는 붉은 선을 멍하니 바라본다. 그 중 한놈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그 줄기를 잡아 뜯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폭음. 하나였던 폭음이 이내 연달아 터져 나온다. 불꽃대신 터져 나오는 핏물들이 왈칵거리며 바닥을 적셔댔다.
전이라면 죽도록 고생해도 처리 못할 놈들을 이리 쉽게 처리하고 나니 감회가 새롭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놈들과 동급인 '돗가비' 두 마리 처리하느라 죽을 뻔 했었는데. 감회는 감회고, 눈은 빠르게 현장을 훑어본다. 바닥에 늘어진 참혹한 시체들을 보고 있자니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미 늦었나..."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의 죽음이지만 방금 전까지 살아서 비명도 지르고 고함도 치던 이들이었다는 것을 떠올리곤 쓰게 내뱉었다. 차라리 비명소리를 듣지 못했다면 이렇게 꺼림칙한 기분은 아니었을 텐데...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 멀리 헬리콥터의 잔해가 보였다. 영화에서 자주 보던 블랙호크인가 뭔가 하는 기종으로 보이는데 상태가 말이 아니다. 곱게 착륙한 건
아닌지 그 잔해가 흉물스럽기만 하다.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피 웅덩이를 찰박거리며 사방을 쏘다닌다. 참혹하기만 현장을 맹한 표정으로 긴장감 없이 돌아다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절로 한 숨이 나온다.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달려왔더니 결국은 뒤처리뿐인가.
진즉에 몬스터들의 소굴로 변한 서울인지라 생존자가 있다는 게 도리어 이상할 지경이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주변을 둘러본다. 몬스터치고는 특이하게 영역권이라는 개념이 있는 놈들이었으니만큼 운 좋게 이놈들을 피했다면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주변을 살펴봐도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제 그렇게 염원하던 회복도 이뤘으니 서울을 벗어나야 하는데 방향조차 잡지 않았었구나. 몬스터들의 생명력이 한참 더 필요하던 차라 깊게 들어오다 보니 어느새 일산방면으로 방향을 잡았나보다.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의 곳곳에 널린 이정표가 일산을 향하고 있다.
저 너머에서 웅크리고 있을 괴수를 생각하니 괜스레 몸에 한기가 돌았다. 사실 그날의 전투로 입은 부상은 괴수가 아닌 아군 탓이지만. 문득 군의 행동에 의문이 들었다. 그간은 회복만을 생각하느라 미처 의문을 갖기 못했었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납득 안가는 일 투성이다.
미사일공격이 먹힐지 안 먹힐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무모한 공격이라니. 게다가 일이 틀어질 경우 유니온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짐은 물론, 최악의 경우 괴수들에게 수도를 잃게 될 악수. 결국 서울은 몬스터들 천국이 되었고 몇 백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만들어버렸다. 군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걸까. 내렸던 걸까. 지금 이렇게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들의 입장이 아닌 바에야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한번 흔들어 생각을 털어버리고는 이동을 시작했다.
이미 힘을 회복한 상태라 사실 서울은 더 이상 내게 위험지역이 아니다.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내 뒤를 얼빠진 표정으로 따르는 그녀만 해도 처리가 가능하고, 나 역시 3등급 몬스터들까지는 감당을 할 수 있다. 서울을 빠져나오는 동안 만난 몬스터들만 해도 최하급의 9등급부터 3등급까지
다양하다. 안개 속에서 헤맬 때만큼은 아니지만 꽤 많은 몬스터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간간히 추락한 헬리콥터의 잔해들이 보이지만 생존자는 보이지 않는다.
단숨에 서울을 벗어나는 방법도 있지만 생존자도 찾아 볼 겸 폐허를 걷는 내 노고가 무색할 지경이다. 마침 뒤에서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는 그녀도 있고해서 슬슬 속도를 높여간다. 한참을 달리다보니 어느새 이정표가 서울 외곽을 가리켰다. 그러고도 또 한참을 달렸다.
탕!
단발의 총성이 들려오고 뭔가 내 피바라기에 맞고 튕겨져 나갔다. 어느새 군부대가 포진한 경계지역까지 온 것인지 저 멀리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쏘지 마요! 사람입니다!"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몇 번인가 총성이 더 터져 나왔다. 나는 재빠르게 붉은 방패를 형성해 무방비하게 나를 쫓는 아가씨를 가렸다.
"쏘지 말라고 이 양반들아!"
기운을 실어 크게 외치니 그제야 총성이 멎는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먼 거리에 있는 듯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소속을 밝히십시오!"
얼빠진 고함소리에 나도 모르게 입맛이 쓰다. 군인이 아닌 바에야 딱히 밝힐 소속이 있을 리가 없잖은가. 아마 내가 민간인이었다면 첫 공격에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겠지. 우리 나라 군대가 이렇게까지 막무가내였나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행보다. 저번 괴수와의 일도 그렇고 지금의 일도 그렇고. 나도 모르게 대답하는 어조가 날카롭다.
"발포 전에 물어봐야지 이 새끼야... 대한민국 유니온 소속 이능력자 김형준! 생존자를 구조해 나오는 길이요."
작게 중얼거리곤 소속을 밝혔다. 다행스럽게도 난 일반인이 아니니 밝힐 소속이 있지. 하는 짓마다 마음에 안 드는 군바리들이다.
"그쪽으로 다가갈 테니 발포하지 마세요! 여기 민간인도 있습니다!"
소총이든 뭐든 나야 걱정 없지만 혹시 내 뒤의 아가씨가 다칠지 몰라 미리 알려두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고함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니 온통 폐허가 되어버린 곳에 늘어선 군인들이 보인다.
중무장한 군인들과 중화기들이 온통 나를 겨냥하고 있다. 어차피 내 피바라기를 뚫지도 못할 무기들이지만 괜스레 몸이 움찔대는 게 기분이 슬슬 나뻐지려 하고 있다. 워낙에 듣도 보도 못한 괴물들이 출몰하는 상황이니만큼 저들의 입장을 이해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다.
"다시 말합니다. 대한민국 유니온 소속 4등급 이능력자 김형준입니다. 적이 아니니 적당히들 하시지요."
투구부분을 해체해서 얼굴을 드러내니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서는 이가 보인다. 이마에 중령 계급장을 단 중년 남성이다. 그가 앞으로 나섬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게 경계를 풀기는커녕, 더욱 강화된다.
"대한민국 육군 중령 신태웅입니다. 유니온 소속이라고요?"
자신을 소개하는 말투가 어째 음흉해 보인다. 표정도 잔뜩 굳은 게 절대 좋아 보이진 않고.
"몇 번이나 말해야 합니까. 지금 상태가 안 좋은 생존자도 있으..."
잔뜩 짜증을 담아 말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소총들뿐만 아니라 고정해두었잔뜩 짜증을 담아 말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소총들뿐만 아니라 고정해두었던 화기들마저도 나를 향하는 게 명백한 적의의 표현이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유니온 소속이라고 분명히 밝혔을 텐데요?"
내 말에 중령이라는 작자가 잔뜩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김형준씨. 잠시 저희에게 신변을 맡겨야겠습니다."
어떻게 들어도 죄인을 대하듯 하는 어조라 중령의 얼굴을 살펴본다. 잔뜩 굳은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적대감과 공포. 생각지도 못한 표정이라 나는 다시 한 번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저는 괴물이나 그런 게 아니라 대한민국 유니온 소속 4등급 이능력자. 콜싸인 '피바라기'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건 같은데 유니온의 지부에 연락하시면 금방 신원 확인이 될 겁니다."
처음의 짜증스러운 감정도 한 때, 지금은 의문만이 가득하다.
"지금 말씀하신 그 유니온이라는 곳부터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제 의견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니 잠시간 협조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뒷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진다. 이 작자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지난 6월 15일에 있었던 정부에 대한 적대 행위에 대한 해명이 없는 한 모든 이능력자들은 억류하라는 상부의 명령입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진다.
"무슨 말도 안 돼는 소립니까! 6월 15일이 뭐 어쨌다고요? 괴수와 죽도록 싸우다 돌아온 사람에게 이게 무슨..."
말을 하다가 스스로 화들짝 놀랐다. 6월 15일이면 괴수와의 결전이 있었던 날이 아닌가. 적대행위는 오히려 군부에서 먼저 했건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지껄여대는지.
"6월 15일 괴수와 격전중이던 3개 사단을 전멸시키고, 고위 관계자를 암살한 혐의입니다."
갈수록 점입가경이라고 되도 않을 소리를 떠들어대는 중령의 태도에 이제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누가 누구 뒤통수를 쳐?
"뭔 개소리야! 괴수와 전투중이던 우리를 무시하고 당신들이 먼저 공격했잖아!"
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나를 겨냥한 소총들이 움찔거린다. 주변을 둘러보니 잔뜩 긴장한 얼굴에 공포가 가득하다.
"이봐요. 뭔가 잘 못 알았나본데, 괴수와 전투중이던 우리 뒤통수를 친 건 당신들이라고요. 그날 사전고지도 없이 날아온 폭격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 지 아세요?"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들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두려움과 적대심 가득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군인들의 표정이 한결같다. 마치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
그 구역질 나는 시선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유니온 소속 김형준. 생존자를 구해 지부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니 길을 비켜주세요."
기세를 끌어올려 한 걸음 다가서니 중령이 비명처럼 나를 제지한다.
"멈춰요! 더 접근하면 발포합니다!"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조차 없어 보이는 그 태도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런 개새끼들 지금 뭐하자는 거야. 힘들게 저들대신 싸운 우리 뒷통수를 친 것도 모자라 누가 뭘 어떻게 해?
"더는 참지 않습니다. 비켜요."
원래는 식량과 간단한 옷가지를 요청하려고 했지만 분위기를 보니 이미 틀린 것 같고. 내 마지막 경고에도 군인들은 이를 악다물 뿐이다.
중령이 황급하게 뒷걸음질을 치는 가운데 이제는 눈에 보일정도로 확연한 적대감에 분노가 더욱 커져간다. 이를 악물고 몸을 떨고 있는데 갑작스럽게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 작품 후기 으어. 으어. 딸린 식구까지 있는 유부남이다보니 본업에 소홀할 수가 없네요 ㅜㅜ마음은 늘 8연참인데 현실은 하루 한편도 급급 ㅜㅜ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와중에도 선추코쿠를 날려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