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격변하는 흐름 속에서... -- >
'어쨌건 아마 깨어나면 네 몸이 상당히 변해있을 거야. 네가 가진 힘이 더욱 강해졌을 수도 있고, 어쩌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선기가 충돌할 수도 있어. 다른 능력자들이라면 몰라도 네 힘은 꽤 사도에 가까운 힘이었으니까.'
첩첩 산중이라고 그녀의 설명에 불안감이 가중된다. 망가졌던 육신이 원상태로 돌아왔나싶어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사도라니?'
한 번도 내 이능이 사도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던 차라 더욱 혼란스러웠다.
'아. 모르고 있었어?'
당연히 내가 알고 있을 줄 알았다는 투의 말이라 어리둥절했다.
'그렇구나? 어쩐지 이상하다 했더니 너 착각하고 있었네.'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는 그녀다. 대체 뭘 착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아. 답
답하니 제대로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좋으련만. 의식의 공유로 인해 이런 내 혼란스러운 심정을 눈치 챘는지 차분한 어조의 설명이 이어진다.
'너. 그간 몬스터들의 생명력을 흡수하면서 그게 오직 내 힘이라고만 생각한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거 네 힘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충격을 받을 사이도 없이 그녀의 음성이 들려온다.
'피를 빨아들이고, 생명력을 흡수하고. 그거 온전한 네 힘이야. 나는 지금 너희들 기준으로 4등급이라지?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다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어쨌건 생각해본 적 없어? 4등급 치고는 힘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그런 생각 말이야.'
그녀의 말에 생각에 잠겼다. 4등급 능력자에 불과한 내가 수십 수백의 몬스터를 단 번에 처리 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그녀의 힘 덕이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희귀한 등급이라고는 하나, 고작 4등급의 유물 치고는 지나치게 강대한 힘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서 헤매던 길고도 길었던 시간과, 괴수와의 전투들을 더듬었다. 영화필름처럼 스쳐가는 기억들 속에서 나는 의혹이 점점 커져간다.
'흡혈. 그게 네 이능의 힘이야.'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전율이 일었다. 흡혈이라는 섬뜩한 단어가 주는 불길함이 천근 바위처럼 나를 내리 누른다.
'지금의 나는 그저 네 힘을 넓게 퍼트리는 매개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거든.'
장난기 가득했던 음성이 어느새 음산한 속삭임이 되어있다.
'수많은 몬스터들의 피를 빨아먹은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나도 덕을 보긴 했지만 말이지.'
그녀의 말투가 섬뜩하게 날이 서고, 그 끝에 불길한 키득거림이 따라 붙는다.
'아. 정말이지 얼마 만에 맛본 피 맛인지 황홀할 지경이었어. 근데 그 망할 년 때문에!'
나른한 어조가 분노를 드러내고 금세 그녀가 변덕을 부린다. 가뜩이나 엉클어진 머리가 그녀 탓에 더욱 정신이 없다.'망할 선인들.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까지 내 앞길을 막다니. 그 연놈들만
아니었다면 난 진즉에...
'목소리에 담긴 원한이 깊고 깊어 듣는 내 등에 소름이 돋아날 지경이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 챈 소희의 음성이 일변한다.'
전부터 꽤 악연이라서 말이야. 어쨌건 앞으로 자신의 몸을 더 소중히 여기라
'전부터 꽤 악연이라서 말이야. 어쨌건 앞으로 자신의 몸을 더 소중히 여기라고. 나도 오랜만에 만난 계약자를 이렇게 잃는 건 싫으니까. 게다가 너 딱 내 취향이거든.'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그녀가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널 이곳으로 불러들인 건 네 몸의 상태를 알려주기 위해서였어. 대충 할 말은 다 했으니 조만간 다시 보자고.'
착각일까. 어둠의 한 곳이 일렁인 것처럼 보였다면. 그 말과 동시에 내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들어간다.
눈을 뜨자마자 온몸을 가득 채운 막대한 기운을 느낀다. 청량하면서도 정명한 흐름이 온 몸의 구석구석에서 흐르고 있다. 오므려진 채로 눌러 붙었던 손바닥이 멀끔하게 변해있다. 화상으로 보기 싫게 뭉개졌던 온몸의 피부가 마치 아기 피부처럼 뽀송뽀송하다. 떨리는 손길로 온몸을 더듬는데 느껴지는 곳곳이 예전보다 더욱 부드럽고 유연했다.
"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망가질 데로 망가졌던 육신 탓에 피폐해졌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유쾌해진다. 손발을 휘적거리며 온몸을 더듬는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부드러운 피부인지 감격이 차올랐다.
하.. 하하...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다. 한 때는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내 맨 피부를 볼 날이 올 줄이야.
한참을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회복을 자축하고 있는데 익숙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맹한 눈빛의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백치 같은 얼굴로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내 가슴께를 쓰다듬은 그녀가 입을 열었다.
"헤에. 너 괴물 아니었네?"
그걸로 끝이었다. 황당한 그녀의 반응에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또르르 움직였다.
"크다."
단 한 마디, 그 황당한 말에 소스라치며 나는 몸을 가렸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잊고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의 상태였다. 허둥지둥 중요 부위를 가린 나는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런 이유로 본의 아니게 실례를 했다면 사과할게요."
부담스러운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고 있다. 커다란 눈동자의 초점이 애매하긴 했지만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그녀 탓에 진땀이 흘렀다.
정신을 차린 나는 피바라기를 둘러 몸을 가렸다. 처음부터 그리 했었으면 됐었을 것을 워낙에 정신이 없던 탓에 뒤 늦게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리고 나를 괴물따위로 오해하고 있던 이 맹한 아가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는데 그녀의 반응이 전혀 없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이 왠지 모르게 부담스럽다.
"저는 이제 서울을 벗어날 겁니다. 안전한 곳까지 바래다 줄 테니 같이 갑시다."
반쯤 미쳐버린 그녀라 조금 께름칙하긴 했지만 이 아비규환의 도시에 여자를 혼자 두고 가기도 뭐해 권유했다. 게다가 정신적인 부분만 원상태로 돌아온다면 꽤나 유용한 전력이 될 수 있는 그녀다.
이제껏 보아왔던 어떤 화염계 이능력자들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가진 그녀다. 게
다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도 보이는 조절능력을 보면 꽤나 상위에 랭크될 잠재력이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가뜩이나 지난 참사로 고랭크 이능력자가 부족한 지금의 상황에 큰 보탬이 되리라 생각했다.
다분히 계산적인 내 말에 돌아오는 것은 맹한 시선 뿐.
대답을 하라고 이 답답한 아가씨야!
속으로는 몇 번이고 윽박지르고 다그친다지만, 정신상태도 불안정한 아가씨를 자극하는 것은 이쪽에서도 사양이다. 겉으로야 최대한 선한 얼굴을 하고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입가에 걸린 미소가 내 스스로 느끼기에도 어설프지만 어쩌랴. 누군들 저런 시선을 받는다면 나와 같은 표정을 지으리라.
한참이나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이 없어보였다. 결국 그녀의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 한 것은 그 뒤로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는데 그녀가 내 뒤를 졸졸 따라온다. 그러고보니 애초부터 그녀와의 동행은 서로 의견을 묻고 자시고 한 관계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내가 그녀를 따라갔고 나중에 가서는 그녀가 나를 따라다녔을 뿐.
왠지 바보짓을 한 것 같아 스스로가 한심하다.
그렇게 서울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내 귀에 낯 설은 소음이 들렸다. 아니 낯설다고 하지만 요 며칠간 듣지 못했을 뿐이고, 일전에 지겹도록 들었던 익숙한 소음이기도 했다.
타타타타타!
콩 볶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총소리?"
갑작스럽게 들려온 총소리에 방향을 가늠한다. 멀지 않은 곳이다. 내 뒤를 따르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바닥을 박찼다. 혹시나 해서 뒤를 바라보니 곧잘 따라오는 그녀가 보였다. 맹한 표정은 어디 갔는지 어딘가 절박한 표정으로 필사적으로 나를 뒤따라오는 그녀의 얼굴이 안쓰럽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발에 힘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졌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달리던 그녀의 얼굴에 조금이지만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탕!
이번에는 단발이다. 뒤이어 들려오는 총성이 없어 마음이 더욱 급해진다. 뒤따르는 그녀의 표정에 차마 속도를 올리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심정이 바짝 타들어간다. 결국 결심한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눈을 크게 뜬 그녀의 얼굴이 내 눈 가득 들어오고 나는 힘차게 바닥을 쳐낸다. 주변 풍경이 쑥쑥 뒤로 밀려간다.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총성 탓에 방향을 잡기가 힘들었지만,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포효소리에 내 발길이 단호해진다.
"막아! 막으라고!"
그리고 누군가의 절박한 고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 작품 후기 죄송합니다. 연재가 늦었습니다.
자려고 누웠는데 갑자기 떠오른 소재 탓에 신작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상황이라 잠시 외도를 하느라 늦었습니다. 원래 어두운 분위기의 글이 제 취향이라 이번 소재는 잊어버리면 천추의 한이 될거 같아서 ㅜㅜ제목은 '울부짖는 새벽' 일전에 썼던 글과 제목이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제목은 '울부짖는 새벽' 일전에 썼던 글과 제목이 같지만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어느날 우연히 발견한 책 탓에 인생이 처참하게 망가져버리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판타지물입니다. 혹여 관심 있으신 분들은 읽어봐주시면 감사할 일이겠지요.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이번 챕터도 이제 곧 중요내용이 드러날 겁니다. 그간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죄송하다는 말씀과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제 다시 성실연재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끝으로 극중 군이 벌인 짓거리에 의아한 분들이 많으신 거 같습니다만 지금 바로 이유가 나올 단계가 아니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