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53화 (53/223)

< --  1-5. 격변하는 흐름 속에서...  -- >

잠이 들어있는 그녀를 보니 깨어있을 때와는 달리 여느 평범한 아가씨의 모습이다. 위태로운 분위기도 뭔가 나사가 풀린 듯한 느낌도 온데간데없다. 벌써부터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가슴어림을 보니 꽤나 깊이 잠든 모양이다. 아마 각성 후 뭣도 모르고 마구 사용해댄 이능 탓에 어쩌면 꽤 긴 시간을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지.

원래대로라면 각성 직후 유니온이 바로 조치를 취했겠지만 지금 나라꼴이 말이 아니다보니 그대로 방치됐으리라. 저대로라면 폭주하고 먹혀버릴 테지.

한참을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쉰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게냐. 내 몸도 온전치 않은 상태라 다른 사람을 걱정할 상황이 아닐 텐데. 검후의 말대로 생명력을 모으다보면 뭔가 방법이 있겠지 싶어 무작정 서울로 왔지만, 벌써부터 지치기 시작했다. 몬스터를 사냥해서 생명력을 흡수한다. 전처럼 눈에 띄는 생명력의 변화가 보이진 않지만 스스로도 기운이 상당부분 회복되었음을 느꼈다. 검후 덕에 간신히 거동을 할 정도였던 몸이 이제는 어느 정도 제 구실을 하니 계획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대로 쭈욱 몬스터들의 생명력을 흡수하다보면 뭔가 길이 보이겠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그녀를 바라본다. 가능하면 가장 가까운 유니온 지부에 그녀를 맡기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서울을 벗어날 때까지 시야에 두고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문제다.

그녀와 기묘한 동행이 시작된지도 벌써 나흘째다. 몬스터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그녀 탓에 내 회복이 더뎌지고 있다. 생명력을 흡수하기도 전에 그녀가 불태워버리니 계획에 차질이 생기고 있다. 한번은 내가 몬스터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도중에 갑자기 일어난 화염에 큰 부상을 입을 뻔 했다. 갑작스럽게 역류하는 생명력 탓에 큰 타격을 입을 뻔 했으나 천만다행으로 큰일은 없었다. 하지만 원체 놀랐던지라 화가 나는 마음에 그녀를 다그치려 했었지만 금세 백치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 탓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성대도 걸레짝이 난 상태라 탓할 방법도 없었고.

어찌됐건 그녀와의 함께 폐허를 헤매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처음에는 조금이지만 느껴졌던 회복의 기미가 이제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꽤나 높은 등급의 몬스터를 사냥했지만 마찬가지다.

그럴수록 나는 몬스터 사냥에 더욱 열중했다. 얼마나 많은 몬스터들과 부딪혔었는지 뭣도 모르고 내 뒤를 따르는 저 여자도 이제는 몬스터를 봐도 달려들지 않을 지경이다.

채워도 채워도 어디론가 새어나가는 듯한 기분 속에서 그렇게 사냥에만 열중한다. 며칠이 또 흘렀을까.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내 뒤를 따르는 그녀가 초췌하다. 푸석푸석해진 피부에 며칠을 씻지 못해 떡진 머리까지. 숫제 노숙자와 다름없는 꼴이라 추하기 그지없다.

그날 이후로 한번도 피바라기를 풀지 않았다. 아직은 추하게 눌러 붙은 내 모습을 다시 마주 할 자신이 없다.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더더욱 상상도 못하고.

회복의 조짐이 좀처럼 보이지 않자 다시금 절망과 좌절이 나를 집어삼키려 한다. 제대로 펴지지 않는 손과 발, 화상에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진 얼굴과 전신의 피부. 마치 몬스터와 같을 그 모습을 상상하면 스스로를 지탱하기가 쉽지

않다. 그럴 때마다 내게 희망이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저 이름도 모를 아가씨다. 반쯤 정신이 나가버린 저 아가씨를 무사히 서울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책임감? 웃기지도 않는 소리다.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것은 저열한 우월감이다. 미쳐버린 그녀를 보며 한줄기 위안을 삼아 무너지려는 정신을 부여잡는다.

소변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해 실례하기 일쑤인 그녀의 몸을 닦아주면서 그 저급하고도 음울한 우월감을 만족시킨다. 그렇지 않고서야 난생 처음 보는 여자의 수발을 들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내 저급한 사고방식에 스스로가 역겨울 지경이지만 지금은 그것만이 유일한 나의 위안거리. 말이 되지 않는다 하여도 실제로 그녀의 존재가 없었다면 나는 서울 한복판에서 무너져버렸겠지.

지금도 문득 문득 나를 이렇게 만든 군부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눈에 보이는 족족 잡아다 배를 가르고 팔다리를 절단내 버리고 싶다. 아니지. 내가 당했던 것처럼 똑같이 온몸이 녹아내리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게 해주리라. 지금 내 곁에 있는 그녀를 잘만 이용하면 그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으리라.

비열하고도 음흉한 욕망에 나 스스로가 놀라 소스라친다.

고개를 세차게 저어 그런 생각을 날려보지만 마음 한 구석이 무겁기만 하다.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 스스로가 점차 나약해지고 있다.

"나 배고파."

스스로의 못난 모습을 자책하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그녀가 내게 칭얼거린다. 처음의 위태로운 분위기도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 마치 아이와 같은 모습이다. 그 천진난만한 얼굴로 맹하게 칭얼거리는 모습이 이상하게 위안거리가 된다.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지만 지금은 그저 만족할 뿐이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녀를 위해 폐허를 뒤진다.

조짐은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막 몬스터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던 순간. 오랜만에 꿈틀거리는 생명력의 약동이 느껴졌다. 꿀렁이며 몸을 틀던 생명력이 금세 불어나더니 이제는 요동을 친다.

눈앞이 번쩍대는 것처럼 정신이 없다. 거세게 바뀌어버린 생명력의 흐름이 나

를 휘감는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희열이 차오른다. 그토록 기다리던 회복의 조짐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의 박동이 귓가를 때리고, 불끈거리는 혈관이 마구 꿈틀댄다. 온몸이 비틀리고 펴지기를 몇 차례. 갑작스럽게 온몸에 고통이 찾아온다. 마치 뼈채로 망치로 두들겨 짓이기듯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친다.

마치 뼈채로 망치로 두들겨 짓이기듯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친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릴 뿐. 끔찍스러운 고통에 그저 몸을 뒤틀어 보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그렇게 얼마나 고통에 몸을 떨고 있었을까. 마치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온몸을 짓이기던 고통이 점차 희미해져간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청량하고 맑은 기운 한줄기. 미약하게 시작된 흐름이 점차 거세어지다 온몸을 가득 채워간다.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눈앞이 번쩍한다.

온통 새카만 어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가득한 세계에 나 홀로 서 있다. 언젠가 와 본적이 있는 어둠의 세계.

'생각보다는 일찍 만났네?'

전에 들어본 적 있는 음성이 들린다.

소희?

지금 나는 다시 심상의 세계, 의식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

'역시 두 번째라 그런지 좀 차분하네. 킥.'

마지막 전투에서 들었던 음산하고도 귀기스러운 음성은 온데간데 없는 소희의 음성이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내가 왜?'

일전에 나를 의식의 세계 속으로 불러들인 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꺼내어 사용하려 였을 때였다.

지금도 혹시 그런 상황일까? 내가 회복의 징후라고 생각했던 현상이 사실은 좋지 못한 징조였던걸까? 오만 생각에 불안감이 가중된다.

'아니야. 이번에는 나쁜 일로 불러들인 게 아니야.'

의식의 공유 탓에 내 생각을 낱낱이 읽을 수 있는 소희의 음성이 나를 안심시킨다.

'그간 아무리 몬스터를 흡수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이었지?'

그녀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리 흡수해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생명력에 적지 않게 당황했었던 차라 그녀의 질문이 반가울 지경이다.

'그거 다 내가 한 거야.'

의미를 모를 소리를 하는 그녀의 말을 다시 기다린다. 그녀가 쓸데없이 나를 이 어두운 세계로 불러들인 것은 아닐 터, 그저 다음 말을 기다린다.

'이제는 꽤나 점잖아졌네. 전처럼 호들갑 떨지 않고. 보기 좋아 아주.'

내 태도가 의외인지 장난스럽게 칭찬의 말을 건네는 그녀다.

'자. 들어봐. 이유를 설명해줄테니까.'

설명을 시작하는 그녀의 말투가 꽤나 거들먹거리는 투다. 한껏 우쭐거리는 기색이 역력한 음성이라 나도 모르게 실소가 나온다.

'네 몸,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상태였어. 그대로 두었다면 필시 죽었을 거야. 나 역시 모아둔 생명력을 전부 풀어서 네 몸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잡아두는 게 다였을 정도였으니까.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버릴 것 같아서 꽤나 진땀 뺐지 뭐야. 어쨌건 정신없이 네 몸이 악화되는 걸 막고 있는데, 검후라고 했지? 그 여자가 불어넣은 기운 덕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지. 선기가 가득한 기운인 걸 보니 선도 쪽 인물인거 같은데 덕분에 네 몸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될 수 있었어.'

여기서 잠깐 말을 멈춘 그녀가 갑자기 불만을 쏟아낸다.'꽤나 오래 정진한 여자 같은데 나보러 뭐라고? 탐욕스럽다고? 유래가 기구해? 진짜 웃기는 아줌마야. 누가 누구보러 기구하다고 해. 내가 전심전력으로 네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내 탓에 네가 회복이 안 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일전에 검후가 했었던 이야기를 말하는 건가.

'선도의 인물들은 늘 그랬어. 마치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내 계약자들을 얼르고 달래고 했었지. 몇백년이 지났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오만하고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족속들.'

끝에 가서는 음산하게 살기마저 뿜어내는 어조가 살벌하기 그지없다. 두려움마저 들 기세였던지라 몸을 떨고 있는데 그녀의 어조가 다시 쾌활하게 바뀐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그 치들도 벌을 받았으니. 자업자득이야. 근데 내가 어디까지 했지?'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들을 해대는 통에 그녀가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던 내게 그녀가 물어온다.

'검후의 기운 덕에 내가 회복 되었다는 데까지.'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미안해. 이야기가 딴 데로 샜지?

어쨌건 그 탓에 나도 한숨 돌릴 수 있었는데, 정작 네 몸을 회복할 생명력이 없

잖아? 그래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네가 여기로 오지 뭐야. 게다가 기특하게 마물사냥이라니. 처음처럼 생명력이 들어오는 데로 네 몸에 흡수됐다면 너 완치가 힘들었었을 거야. 지금보다야 훨씬 나아졌겠지만 원상태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겠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미세하게 들어오는 생명력 정도로는 완치가 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특단의 조치를 취했지.

네 몸에 들어오는 생명력을 내가 모아뒀다가 한번에 돌려주는 거. 그래서? 결과는 대성공!

'장난처럼 쾌활하게 말하는 그녀의 설명에 나도 모르게 납득했다. 찔끔 찔끔 들어오는 생명력을 모아 한 번에 터뜨린다. 과연 걸레짝이 된 내 몸을 회복하자면 그 방법이 가장 유효했으리라.'

응. 대성공 이상이야. 그날의 후유증은 물론이고. 그릇도 더 단단해지고. 지금 세상이 이상한건지 아니면 네가 허약한 건지. 그릇의 크기는 커지지 않았지만 꽤나 단단해졌어.'그릇의 크기라니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대충 감이 온다.

'아. 이게 아니라 내가 널 부른 건. 그 망할 검후라는 계집의 힘이 다시 한 번 네게 개입을 했어. 내가 원한 각성은 이게 아닌데. 그년의 기운 때문에 이건 마치 선도인들의 탈태환골과도 같아져버렸어.'

무협지에나 나오는 탈태환골이란 단어 탓에 갑자기 멍해져버린다. 아무리 이능무협지에나 나오는 탈태환골이란 단어 탓에 갑자기 멍해져버린다. 아무리 이능과 괴수들이 날뛰는 혼란한 시대라지만 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란 말인가.

내가 뜨악하거나 말거나 그녀의 설명이 계속된다.

============================ 작품 후기 어제 업뎃 약속하고 올리지 못한 것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ㅜㅜ일단 연달아 공지를 날린 점도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ㅜㅜ사과할 일 투성이군요. 그것도 죄송합니다. ㅜㅜ지금 전개에 답답하시다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서 전개를 좀 빠르게 가겠습니다. 구상했던 스토리와 조금 달라지지만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아서 전개를 확 당기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리고 선작과 추천 쿠폰 코멘트를 주신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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