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52화 (52/223)

< --  1-5. 격변하는 흐름 속에서...  -- >

불범의 포효소리에 가보니 왠 아가씨가 불범에게 습경 당하고 있다. 불범이 막 그 아가씨를 덮쳐가는 게 보여 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거의 날 듯이 달려가 불범의 몸에 태클을 거니 저 멀리 불범이 나가떨어진다.

불의의 습격에 맥없이 나가떨어지긴 했지만 원체 사나운 놈이라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뒤를 쫓았다. 그리고 놈의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오른손을 스윽 내리그었다.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바닥에 착지한 불범이 내게 이를 드러낸다.

"크아?"

이윽고 양단되어 갈라지는 놈의 몸에서 따뜻한 피가 흩뿌려진다. 그 붉은 액체를 온몸에 맞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에 몸을 떤다. 그날 이후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몸이 지금만은 생기가 넘

친다.

안개 속에서 치른 괴수와의 전투, 나는 그날 어이없게도 아군의 포격에 넝마가 되어버렸다. 얼굴은 눌러붙고, 한쪽 다리는 절단 직전까지 갔으며 입술과 기도는 불길에 타버렸는지 말조차 제대로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몇몇 치유계열 능력자들이 나를 치료하기 위해 애써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숨만 붙어있으면 완치도 가능하다고 호언장담하던 이도 있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눌러 붙은 얼굴만이라도 간신히 사람 꼴로 만들어 준 걸 감사하다면 감사하달까.

화상으로 끔찍하게 변해버린 모습과 눌러 붙어 펴지지도 접히지도 않는 손발에 좌절하고 절망했었다. 검후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자살 했었을 지도 몰랐을 일이다.

빈사상태에서 깨어나 기묘한 자세로 몸을 회복하던 그녀는 나를 찾아오자마자 대뜸 내 오른손을 끌어당겼다. 그 끔찍한 화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희미하게 보이는 손등의 꽃잎을 담담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번쩍거리고 있다. 그 현

기 어린 안광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녀가 하는 냥을 지켜봤다.

"가시찔레 꽃.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유래가 길고 기구하다. 네게 치유의 힘이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필시 이 탐욕스러운 꽃일 터, 그 게걸스러운 입맛을 채워준다면 회복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지."

그녀의 붉은 피가 내 손등에 떨어지자마자 그날 이후 처음으로 몸에서 생명력이라는 게 꿈틀댄다. 그리고는 온몸에 퍼져가는 맑고 청량한 기운.

"선도와 하늘의 이치를 쫓아 정진하여 여기까지 온 바, 내 피에 깃든 힘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일신의 정기가 크게 상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스스로 털고 일어설 정도는 될 것이다. 이후 자신의 모습을 찾고 못 찾고는 다 네게 달렸겠지."

그녀의 말마따나 정명한 기운이 내 온몸 구석구석을 훑고 다닌다. 금방이라도 온 몸이 원상태로 돌아갈 것 같았지만 그것은 내 부질없는 바람이었을 뿐. 마치 메마른 땅에 물이 스며들 듯 그녀가 전해준 기운은 금세 사라져버린다.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기운에 왠지 모를 허탈감에 빠졌다. 그런 나를 일별한 검후가 병실을 나서며 말하기를,

"지닌 유물의 힘이 강대하하고, 본신의 능력도 모자르지 않으니 잘 궁리하고 앞으로의 길을 정한다면 지금의 모습이 결코 장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나아가는 보보가 어렵다 할지라도 멈추지 말거라."

고풍스러운 어투에 담긴 현기가 적지 않아 지금 이 순간까지 그녀의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쨋거나 그녀 덕에 나는 몸을 어느 정도 추슬러서 지금 이 곳에 있다. 가시찔레 꽃에 회복의 열쇠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에 다른 이들의 만류를 뿌리쳤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어느 정도 맞은 듯 하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부터 만났던 수많은 몬스터들의 생명력을 흡수하면서 나는 느끼고 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이 아주 조금이지만 회복되고 있음을. 이렇게 생명력을 모으다보면 언젠가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가시찔레 꽃의 식탐이 어디까지든 간에 나는 그 식욕을 채워 주리라.

상념에 빠져있던 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 쓰러져있는 아가씨가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정상으론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은 생존자로 보여 그녀를 안아들고는 이동을 시작했다.

적당한 쉴곳을 찾아 폐허를 헤매는데 군의 작전으로 인해 서울은 이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곳곳이 무너진 건물이요, 돌더미니 어디 가서 몸을 숨기고 쉰단 말인가. 달려드는 몬스터들이야 오히려 환영해야 할 상황이지만 품안의 아가씨가 걱정이다.

쓸데없이 달려드는 저급한 몬스터들을 처리하며 걸음을 옮기기를 한참, 마침내 적당한 곳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던 오피스텔 건물인데 그 외관이 비교적 멀쩡했다. 우그러지고 깨어진 입구가 맘에 걸리지만 몬스터가 있다면 처리하면 될 것이다.

지금의 나는 힘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몸이 온전치 않은 것.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오피스텔 내부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마실 것과 배를 채울 것을 챙겨들고는 품 안에 고이 잠든 아가씨를 내려놓는다.

가지런한 속눈썹에 단아한 이마, 초췌하긴 하지만 고운 얼굴이다. 이 폐허를 홀로 떠돌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내가 막 그녀를 발견했을 당시의 그녀는 마치 불범에게 마주 달려드는 듯한 모습이었던지라 의아함이 더욱 크다.

연약해보이는 아가씨인데 또 무슨 사정이 있어서 이렇게 홀로 도시를 떠돌던

것일까.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눈을 감았다. 서울에 도착한 직후 쉴틈도 없이 몬스터를 찾아 헤매느라 고생한 몸이 이제야 피로를 호소한다. 물론 전투가 거듭될수록 활력을 찾아가는 몸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상당히 피로하다.

그렇게 나는 잠을 청했다.

눈을 뜨자마자 기겁을 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느 평범한 편의점이었던 곳이 지금 불바다가 되어있다. 넘실거리는 화염이 온 사방에서 시뻘건 혀를 날름거렸다.

온몸을 웅크린다. 시뻘건 화마가 금방이라도 나를 덥칠 것 같아 두려움에 벌벌 떤다. 지난 날의 기억이 온몸을 옭아매고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는다.

"어아으아!"

내 육신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던 그 기억에 그저 웅크린 채 울부짖을 뿐. 그 넘

실거리는 불꽃에 손 끝 하나 닿았다가는 그대로 재가 돼버릴 것 같은 공포에 온몸이 덜덜 떨린다.

그렇게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었을까 문득 정신을 차린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긴 하지만 불꽃이 내 근처로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키고 손을 뻗어본다. 스윽하고 올라간 내 손길을 따라 불길이 이리 저리 갈라진다. 마치 내 손짓을 피해 달아나는 냥 그렇게 불꽃이 사그라들고 움츠린다.

온몸을 짓누르던 공포가 금세 사라진다. 하지만 전날의 기억 탓에 불길이 타탁 거릴 때마다 몸이 움찔거린다.

"뭐야? 너도 나랑 같은 거야?"

그때 들려오는 생소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좀 전까지 의식을 잃고 있던 여인이 보인다. 불꽃 속에서 태연하게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지독스럽게 무감정해 보인다. 소름끼칠 정도로 생기 없는 그 눈동자를 나도 모르게 바라보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헤에. 괴물인 줄 알았더니 네가 날 구해줬니?"

뭔가 뒤죽박죽인 말을 해대는 그녀에게 뭐라 대답도 못하고 그저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는다.

"내 말 알아듣긴 하지?"

이제는 완전히 괴물취급을 하는 그녀지만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성대가 망가져버려서 말을 못하던 차라 따로 설명할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아직 회복되지도 않은 내 몸을 보여줄 생각도 없다.

내가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화염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든다.

"너는 착한 괴물이야?"

얼빠진 말을 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제야 그녀의 모습이 이상함을 눈치 챘다. 생기 없는 눈동자는 초점이 흐릿했고 분위기도 어딘가 위태위태했다.

이 여자. 각성 직후에 맛이 가버린 건가?

이 화마가 누구의 짓인지는 따로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여자 각성한지 얼마 안 된 이능력자다. 게다가 가장 최악인 화염을 다루는 이능력자다. 화염의 이능은 제어가 되지 않을 시기에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내는 유형의 능

력이다. 얼핏 보기만 해도 꽤나 상급의 이능인 듯 보이는 데 하필 이런 곳에서 홀로 각성하다니. 눈빛이나 상태를 보아하니 좋게 각성한 거 같진 않고, 친인의 희생으로 각성한 건가?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망가져버린다. 이 여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 비틀거리는 걸음이지만 단호하게 걸어온 그녀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원래부터 온몸을 가리고 있던 '피바라기'였지만 화상을 입은 후로는 더욱 촘촘하게 몸을 두른 터라 그녀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겉면의 붉은 갑주들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뚫어져라 살펴본다.

초점 없는 눈동자가 계속해서 나를 응시하니 뭔가 꺼림칙했지만 그저 가만히 생각에 집중했다. 내가 각성했을 당시 유니온이 어떻게 조치했더라? 당시 나도 꽤나 거창하게 사고를 친걸로 알고 있는데 애석하게도 당시의 기억이 온전치 않다. 덕분에 막 각성한 이능력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여전히 나를 살펴본다. 어떻게 보면 신기한 장난감을

보는 아이의 눈빛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또 권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눈동자라 종잡을 수가 없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도대체 뭐에 대한 끄덕임인지조차 알 방법이 없다.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녀가 덥썩 내 손을 잡아끈다. 가녀린 손길이지만 또 우악스러운 동작이기도 하다. 내 손목을 잡은 그녀가 잡아끈다.

"같이 가자. 혼자 다니기 싫어."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은 억지스러운 말이지만 나는 묵묵히 그녀를 따른다. 어차피 생존자를 만난 이상 구조가 우선이다. 비록 상태가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엄연한 이능력자로 보이고, 이 폐허 속에서 만난 유일한 생존자이기도 하니까.

내 목적인 몬스터의 사냥과 생명력의 갈취는 몬스터가 지천에 널린 상황이라 그녀를 따라간다고 해서 딱히 문제 될 것도 없다.

가만히 그녀를 따르는데 아는 길이라도 가듯 거침없다. 그녀를 따라 비상계단을 따라 몇층인가 오르고 나니 그녀가 복도로 나선다. 온통 피투성이에 우그러

진 철문들이 여기 저기 널려있다. 그녀는 그런 끔찍한 광경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여전히 거침없다. 잔뜩 고인 피웅덩이를 지나 바로 곁의 문 앞에 그녀가 멈춰선다.

걸레짝이 된 다른 곳들과는 다르게 아무런 손상도 없는 문이다. 그녀의 가는 손이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고 이내 문이 열린다. 깨끗하게 정리된 실내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피로 범벅이고 저 건너는 저리 평온해 보이니 현실감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녀가 문 안에 들어서서 손짓한다.

"이리 와."

마치 강아지라도 부르는 듯한 몸짓이고 말이라 쓴웃음이 나오지만 그녀를 따른다. 지금 그녀는 나를 같은 이능력자라고 생각하기보단 그저 인간에게 우호적인 다른 무언가로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아니. 그 전에 자신이 이능력자라는 사실은 제대로 알고나 있을까 모르겠다.

그녀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서니 그녀가 왠지 아련한 얼굴로 방을 둘러보고 있는 게 보인다. 처음으로 보이는 생생한 표정이라 잠시 놀라고 있는데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자. 잘 왔어. 우리 집이야."

좀 전에는 강아지 부리듯 하더니, 이제는 친구를 맞는 듯한 말투와 행동이다. 확실히 각성 당시 모종의 일이 있었는지 각성후유증이라기보다는 반쯤 정신을 놓은 걸로 보인다.

어이없게도 멀쩡한 건물을 찾아 왔다는 게 정말 그녀의 집인가 보다. 거실의 탁자 위에 올라온 액자에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화사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여느 평범한 또래 여자의 모습이다.

그녀가 폴짝 소파에 올라가더니 그대로 몸을 눕힌다.

"나 좀 쉴게. 집 잘 지키고 있어."

이제는 정말 집 지키는 개 취급이라 황당할 지경이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녀일 텐데 저런 태평한 모습이라니. 확실히 제 정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

내가 황당해 하건 말건 그녀는 눈을 감고는 잠을 청한다. 숨소리가 금세 느려지고 그녀의 가슴께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한다. 벌써 잠든 거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현관문을 잠근다.

============================ 작품 후기 오늘은 정시 업뎃입니다.

글 제 시간에 올리려고 손님과의 미팅까지 뒤로 미룬 글쟁이 ㅎㅎㅎㅎ저에게 선추코쿠로 힘을 주소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선작과 추천 코멘트, 쿠폰을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부로 주인공 시점으로 돌아왔으니 10초만에 읽으시면 ㄴ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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