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 격변하는 흐름 속에서... -- >
커튼에 가려진 창가에 반쯤 얼굴을 내밀고 눈동자를 굴리는 남자가 있다. 바로 곁에서 불안한 듯 사내의 옷을 부여쥐고 있는 여자가 연신 뒤를 돌아본다.
"가만 좀 있어봐. 너 때문에 불안해서 뭘 할 수가 없어."
사내의 말에도 여인은 꼭 쥐고 있는 손을 풀지 않는다. 사내도 그런 여인을 보고는 혀를 한번 찰 뿐 딱히 더는 말하지 않는다.
"어디 보자. 포성이나 총성은 벌써 멈췄는데, 괴물도 군인들도 보이질 않네. 다들 어디로 갔나?"
조심스럽게 창밖을 살펴보는 사내의 이름은 이종혁, 그리고 그 곁의 여인은 이현지. 둘은 남매지간이다. 어렵사리 구한 오피스텔방에서 지내던 남매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 참사에 집에 같혀버리고 말았다.
이종혁은 난데없이 서울에 들이닥친 참사에 한숨을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포성이 들리는가 하더니 하늘 위로는 쉴틈 없이 전투기의 엔진음과 헬기의 로터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게 벌써 일주일째다. 그 뒤로는 총성이고 포
성은 말할 것도 없고 평생 들어본 적도 없는 괴성이 밤새 이어지기를 며칠. 오늘은 밖이 좀 잠잠하다.
"야. 다 갔나보다. 아무것도 없어."
한참이나 창밖을 살피던 이종혁이 그제야 조금은 안도한 음성으로 자신의 누나, 이현지에게 말했다. 그 날 이후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도무지 하지 않던 그의 누나도 드물게 얼굴에 안도가 서린다.
커튼을 다시 원위치 시켜놓은 이종혁이 바로 곁에 있는 쇼파에 몸을 눕혔다.
"아. 괴물이고 뭐고 이제는 굶어죽게 생겼네."
이 끔찍한 상황에도 태연함을 잃지 않고 지껄여대는 자신의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현지가 그의 곁에 가서 앉는다. 다시 꼭 잡는 동생의 옷깃. 그래야만 안심이 조금이라도 되는지 좀처럼 손을 뗄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다.
"군대도 동원됐으니 이제 슬슬 서울이 조용해지려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가 자신의 누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눈을 감는다. 괴물을 목격한 후부터 자폐 증세를 보이는 누나를 보고 있자니 입맛이 쓴지 자꾸만
입을 다신다.
"좀 있으면 다 괜찮아질테니 조금만 참아봐. 나중에 가서 지금 일 놀린다고 후회하지 말고."
장난처럼 하는 말이지만 그 어조에 가득한 것은 순수한 걱정과 염려다. 서울에 올라올 때 부모님이 신신당부하기를 '누나 말 잘 들어라' 였는데 지금의 상황은 누가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하긴 그때야 서울이 이런 난리통이 될까 했었겠냐마는.
며칠간 끊이지 않던 괴성과 폭음에 시달렸던지라 이종혁의 눈 밑이 거뭇거뭇하다. 이제야 좀 조용해져서 쉴만 한가 했더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겨버렸다.
꼬르르륵.
소파에 대자로 뻗은 그의 배가 아우성을 친다. 그나마 자취하는 이들의 필수품 통조림세트가 가득했던지라 배 곪지 않고 지낼 순 있었지만, 이제는 흔한 참치통조림 따위도 다 떨어진 마당에 앞날이 막막한 그들이다.
한번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며칠 전까지 거리에 바글바글했던 괴물들의 모습에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종혁은 괜스레 신경
질이 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워낙에 거친 동작이었던 터라 그의 누나가 놀라 몸을 떨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 진짜 내일까지 있어보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나가봐야겠다."
당장 건물 밖까지는 아니더라도 1층에 있는 편의점만 들려도 며칠 버틸 식량은 조달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하며 그는 계수대로 향했다. 한창 식욕이 왕성할 나이에 며칠을 통조림만 먹고 그조차도 풍족치 못하게 겨우 한끼 때우다보니 금세 허기가 진다.
수돗물이라도 마시고 배를 채우려던 그는 반응 없는 수도꼭지를 보며 욕을 내뱉는다.
"아! 이런 썅. 이젠 물까지 안 나오네. 씨발. 이러다 정말 굶어죽든 말라죽든 하겠구만."
당장 허기를 잠깐이라도 면할 물조차 나오질 않으니 심기가 불편해진다. 며칠간이나 계속된 폭음과 괴성에 예민해질 데로 예민해진 이종혁은 끊임없이 욕을 이어갔다.
"아. 열 받어. 그 이능력자들이라는 새끼들은 어디 간 거야 대체!"
텔레비전을 통해 무수히도 많이 보았던 이능력자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괜스레 욕을 한 번 더 해본다. 듣기로는 저런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게 그들의 직업이라더니 정작 일이 터지니까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자폐증세를 보이는 자신의 누나를 생각해 그간 드러내지 않았던 그의 히스테리가 끝 간데 없이 올라간다. 애써 태연한 척 해보았지만 그도 결국엔 26살의 평범한 남성. 이런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곁에 있는 자신의 누나가 겁에 질리던지 말든지 점점 거칠어져가는 언사와 행동. 그런 그의 행동이 갑작스럽게 멎은 건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발소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거친 소리라 그의 등에 소름이 돋아 오른다. 눈치도 없는 자신의 누나는 아직까지 아무런 낌새를 차리지 못했는지 여전히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릴 뿐이다.
쿵.
쿵.
몇 번인가 더 발소리가 나고 나서야 이현지도 이상한 조짐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건 절대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겁에 질린 그녀가 바닥에 주저
앉아 바들바들 떠는데 금세 바닥에 흥건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괴성이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들릴라 치면 몇 번이고 실금을 해버리던 그의 누나가 또다시 일을 치른 것이다. 하지만 이종혁은 그런 자신의 누나를 챙겨줄 여유가 없었다. 거대한 발소리가 자꾸만 가까워진다. 싼 값에 입주한 오피스텔은 그리 가구수가 많지 않았던 탓에 복도 자체가 길지 않았다. 그런데 그 좁은 복도를 무언가 불길한 소음이 쿵쿵거리며 오가고 있다.
인터폰의 스위치를 켜볼까 하지만 혹여 괜한 일을 만들까 싶어 조용히 문가에 다가가 귀를 바짝 붙였다.
"흡흡흡흡."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거친 숨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왔다. 안 그래도 겁에 질려있던 그는 문가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크흐으으으으."
길게 이어지다가 다시 짧아지고, 그리고 다시 길어지는 기이한 호흡소리를 들
은 그의 온몸이 경고를 표한다.
며칠 전까지 창밖을 가득 채우고 있던 괴물들 중 한 마리가 건물 내로 들어온 듯 했다. 긴장과 공포로 바짝 굳어버린 몸을 억지로 움직여 문에서 물러난 그의 눈에 그제야 자신의 누나가 보인다.
겁에 잔뜩 질려 온몸을 떨어대는 모습이 제가 흘린 오줌에 온 몸을 뭉개고 있는 꼴이다. 누나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일까. 아니면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책임감과 헌신일까. 어느쪽이든 갑자기 가슴을 채우는 용기에 굳었던 그의 몸이 풀린다.
발작하듯 몸을 떨어대는 자신의 누이를 조용히 일으켜 한번 안아준 그가 그녀의 얼굴 앞에서 조용히 속삭인다.
"누나. 지금부터 내 말 똑똑히 들어. 아무런 일도 없을 테니까 겁먹지 말고.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지켜줄 테니까 걱정 붙을어 매."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을 한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던 그녀의 몸이 그제야 진정이 되어간다.
"아오. 씨바. 손발 오그라드네. 지켜준덴다."
금세 저렇게 건들거리는 동생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믿을 건 하나밖에 없는 동생뿐이다. 여전히 겁에 질린 모습이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진정이 된 모습의 그녀다.
작게 욕을 지껄여대던 이종혁이 침을 꿀꺽 삼키며 인터폰에 다가간다. 행여 소리가 날까 조심하며 손끝을 인터폰의 카메라기능 스위치에 가져다 댔다.
"이런 시팔."
작게 욕지기를 내뱉는 그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액정 가득한 털투성이 괴물. 마치 고릴라와 인간을 반쯤 섞어놓은 모습을 한 괴물이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다. 끔찍하게도 마치 빈집을 확인하는 도둑과도 같은 모습으로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는 모양새다. 복도 끝의 집이라 복도 전체를 시야에 잡는 카메라가 차라리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액정이 팟하고 꺼진다. 그가 놀라 숨을 고르는 사이에 30초의 카메라 기능시간이 끝난 것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시 한 번 스위치를 누른다.
"어.. 어.. 어?"
괴성도 없었고 큰 소리도 없었다. 액정에 보이는 괴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몇 집 건너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괴물의 형상을 한 놈이 너무도 태연하게 문고리를 잡아 돌리더니 쑥 사라져버린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얼이 빠진 그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에 비명소리가 들린다.
"으아아악! 살려줘!"
몇 번인가 마주쳐서 인사도 한 적 있는 이웃남자의 비명이다. 멍청하게도 문을 잠그는 것을 잃어버렸는지 괴물을 집안으로 불러들인 꼴이 된 남자의 마지막 외침이 처절하기만 하다.
"저리가! 저리가!"
몇 번인가 비명소리가 더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이종혁이 인터폰의 카메라에서 눈을 때려는 순간 문을 통해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남자가 보였다. 막 꺼지려는 카메라를 다시 키고는 남자를 살펴보던 그가 간신히 비명을 참는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복도로 튕겨나온 남자는 끔찍하게도 한쪽 팔이 무언가에 잡아 뜯긴 듯 넝마가 되어 있었고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사.. 살려줘..."
비칠거리며 복도를 거닐던 남자가 옆집의 문고리를 돌리며 두들긴다. 그 쾅쾅거리는 소리가 마치 자신의 심장소리 같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이종혁이 입을 연다.
"아.. 안 돼. 오지 마. 오지 마!"
차마 비명은 지르지 못하고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턱이 덜덜 떨리고 있다. 미친 듯이 다른집의 문을 두들기던 남자가 자신의 집 쪽으로 오는 것을 본 이 종혁이 양 손으로 입을 가린다. 그대로 보고 있다가는 비명이라도 지를 심정이다.
피투성이로 비칠대며 다가온 남자가 마침내 자신의 집에 도착했는지 문고리가 벌컥거리며 돌아간다. 잠시 문을 잠구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에 화들짝 놀란 이종혁이 문고리에 시선을 주고 굳게 잠긴 3단 잠금장치에 적잖이 안심했다.
그리고 다시 인터폰의 액정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정말 간신히 비명을 삼킬 수 있었다. 한쪽 손에 장난감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자의 뜯겨진 손을 쥐고 휘두르는 괴물이 점차 다가오고 있다. 귓가에 들리는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더욱 거칠어진다.
"씨발. 가라고!"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였을까. 괴물의 모습이 액정을 가득 채울 무렵 요란하게 벌컥거리던 문고리가 딱 멈춰버린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는 끔찍한 비명이 문 너머에서 들려온다. 무의식중에 인터폰을 보고 있던 이종혁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괴물의 손에 육포마냥 갈갈이 찢겨지는 남자를 차마 더는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씨발..."
괜스레 눈물이 나고 욕이 나왔다. 이종혁은 마지막까지 살려달라고 외치던 남자의 음성에 몸서리를 친다.
자신이 문을 열어줬다면 남자는 살아남았을까? 괴물이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접근해왔지만 내가 문을 열었다면 갑자기 들이닥치지 않았을까?
수 많은 상념과 죄책감 후회가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지만 그는 다이 이를 악문다. 바로 곁에서 자신의 누나가 또 다시 온몸을 버들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이 누군지를 깨달은 그가 욕을 한번 내뱉고는 자신의 누나를 다시 감싸 안아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을 수 없이 반복하는 이종혁. 그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고여 흘러내린다.
============================ 작품 후기 몸이 생각보다 좋지 않아서 반나절 예상했던 게 거의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내리 쉬어버렸습니다. 기다려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변명하자면 한달도 돼지 않는 시간동안 쉼 없이 연재해왔고 그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쓴 글이 벌써 책 한권하고도 3분의 1이 넘는 양입니다. 코멘트로 우려해주신 독자분의 말씀처럼 연참도 꽤 많이 해왔고 그러다보니 글 쓰는 속도도 점점 느려지는 상황이라.
일일연재의 부담감이 요즘 크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오른손이 전치 12주 + 물리치료 8주를 요하는 중상이었던지라 연재 시작부터 지금까지 한손으로 타이핑을 하는 글이라 에로 사항이 많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양해와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늘 읽어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정상연재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