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48화 (48/223)

< --  1-4. 다시 안개 속으로...  -- >

"쿠에에에엑!"

온통 가시덤불 투성이인 전장에 몬스터들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무슨 이변인가 해서 눈을 크게 뜨니 줄기 중간 중간에 돋아난 꽃들이 활짝 만개한다. 흉물스러운 술을 드러낸 꽃들이 피어나다 빛을 발한다. 한송이 두송이 그렇게 시작한 빛줄기가 이내 수십가닥 수백가닥으로 늘어나더니 이내 눈부신 빛이 온 천지를 뒤덮었다. 눈조차 뜨기 힘든 와중에 소희의 속삭임이 들린다.

'피어오르는 꽃의 향기는 만리를 가리라.'

여태 들었던 새된 음성이 아니라 음산하고 음울하기만 한 그 색깔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 사악하고도 어두운 말투 가득한 살기에 등가가 차갑게 식어 몸이 절로 떨려온다.

'개화(開花).'

몬스터들이 소란을 떠는 가운데에도 뚜렷하게 들리는 단 한마디. 그리고 시작한 폭음이 귀를 찢을 듯 사방에 올린다.

이 사라지고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피 안개에 입이 떡 벌어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붉다. 어느 틈엔가 사라진 가시덤불 숲과 꽃잎들. 남은 건 오직 하늘에서 떨어지는 피의 비. 그 강대한 이무기조차 만신창이의 몸으로 바닥에 몸을 누인다.

"이..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리는데 소희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다. 몇 번이고 되뇌지만 요란스러운, 또는 음울한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이게 내가 한 건가? 아니 그녀의 짓인가?

어차피 그 끝에 가서는 서로를 죽고 죽일 관계라지만 이건 아니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치고는 지나치게 끔찍한 광경에 넋이 빠질 지경이다. 아직도 허공 가득한 뿌연 피 안개가 내 몸을 적셔온다. 하릴 없이 바닥에 가득 널린 육편과 피웅덩이를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난다. 넘치는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쓰러질 것 같은 아찔함에 간신히 몸을 가눈다.

그때 하늘에서 들려오는 귀를 찢는 굉음.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촉수와 힘겨루기를 하는 원구 사이로 길다란 궤적이 보인다. 그리고 들려오는 폭음. 마치 꿈을 꾸듯 몽롱한 가운데 궤적의 끝을 따라가던 내 눈 가득 섬광이 보이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제길. 따라잡히겠어! 어서 달려!"

혼미한 가운데 다급한 음성이 들려온다. 낯익은 목소린데 누구지?

"안 되겠어. 이번엔 내가 남는다. 다들 그대로 달리라고 해."

비장함이 가득한 음성이 잠시 멎는다.

"그래. 잠깐이라면 몸을 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내 몸이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어진다. 정신을 차린 이후 꾸준히 계속된 흔들림에 어디론가 이동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럼 믿고 맡긴다."

한참을 더 흔들리며 어디론가 실려 간다.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음성. 누군가 또 남겠다 한다. 그렇게 몇 번인가 나는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

그렇게 흔들림이 계속되다가 다시금 의식이 희미해져간다.

다시 정신이 든다. 여전히 계속되는 흔들림. 아직도 이동 중인건가? 눈을 떠보려 하지만 마치 눈꺼풀이 붙어버린 듯 움직이질 않는다.

간신히 입을 열려고 하지만 나오는 것은 신음소리 뿐.

"정신이 들어요?"

낯익은 여인의 음성이다. 누군가 떠올려보려 하지만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지독한 나른함과 무력감에 생각을 잇는 것조차 쉽지 않다.

"조금만 참아요. 지부까지 가면 뭔가 방법이 있을 테니까."

고운 음성이 피로를 가득 담고 나를 다독인다. 대체 누구지?

"망할 군바리새끼들."

갑작스러운 욕에 놀랐지만 몸이 반응하질 않는다. 그저 힘없이 흔들리는 데로 이끌려갈 뿐.

"교대다."

역시 낯익은 음성. 이번엔 누군지 알겠다.

"옹오?"

신음성 사이에 튀어나온 음성이 낯설다. 분명 내 입에서 나온 소리건만 도무지 내 음성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음성. 지독할 만큼 갈라지고 어눌한 음성이 주는

이질감에 소름이 돋는다.

"그래. 용모다. 조금만 견뎌. 너라면... 네 이능이라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어."

그저 의식이 혼미할 뿐인데 그가 하는 말이 낯설기만 하다. 답답한 심정에 눈을 떠보려 하지만 눈꺼풀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바보 같은 자식. 그만 용 쓰고 더 쉬어. 지금은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낄 때다."

평소의 호탕함은 온데 간데 없고 그저 안타까움만이 가득한 음성에 여전히 의아함만이 든다. 몇 번인가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것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꼴사나운 웅얼거림. 그마저도 듣기 싫은 쇳소리라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는 몸. 움직여지지 않는 눈꺼풀. 아니 다르다. 이건 눈꺼풀이 움직여지지 않는 게 아니라 마치 위아래가 들러붙은 듯 한 기분이다. 잔뜩 갈라지고 어눌한 목소리.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기억을 되돌리려 노력했다. 한참 만에 마지막 영상, 그 눈을 찢을 듯 박혀든 섬광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눈 가득 들어온 화염.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어아아우아오아아!"

마치 상처입은 짐승과도 같은 울부짖음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 절규가 공포를 일으킨다.

"아아아아!"

소리 쳐보려 하지만 나오는 것은 듣기 싫은 쇳소리 뿐. 마치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이다.

".... 제길."

용모의 어조가 비통함 가득이다. 용모. 말해줘.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이제는 겁에 질려 차마 입을 열지도 못하고 마음속으로 절규한다.

"형준아. 조금만 참어. 곧 괜찮아질 거야."

갑작스럽게 숨이 턱 막히고 의식이 희미해져간다.

"형준아! 형준아!"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만 점차 작아진다.

"여기 누가 좀 도와..."

온 몸을 짓이기는 듯한 지독한 통증에 정신을 차렸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끔찍한 고통에 그저 몸을 떨고 있는데 용모의 음성이 들린다.

"더 이상 쉬었다가는 따라잡힌다. 이제 출발하자."

그리고는 점차 가까워지는 발소리. 이윽고 닿는 용모의 손길.

"하이아아아아마아!"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을 친다. 용모의 손이 닿은 어딘가가 불로 지진 듯 고통스럽다.

하지마! 하지말라고! 내 몸에 손대지 마!

아무리 비명을 질러 봐도 용모의 손길은 가차 없다.

"미안하다. 조금만 더 견뎌봐."

물기 가득한 그 음성에 소리 지르는 것도 그만 두고 이를 악물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비통함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용모의 목소리가 내 입을 막는다.

"끄으윽."

하지만 굳게 악다문 잇새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까지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용모의 안타까운 중얼거림이 멈춘다.

그리고 지독한 고통 속에서 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정신을 차렸다가 잃었을까. 이제 어느 정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괴수와의 전투는 대패했으며, 원정대는 단지 수십의 생존자만이 도주 중이다. 믿었던 1등급 이능력자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잃은 채 어딘가로 실려 가는 중이었으며, 처음 도주했던 분당에서조차 습격이 계속되어 지금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를 피난길이다.

마지막 전투 중에 갑작스럽게 날아든 군의 공격에 한참 전투중이었던 허준영과 전지현, 그리고 나를 비롯한 예비대의 인원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막 몸을 빼려던 찰나에 예고 없이 날아온 미사일과 포격이 그 지역 일대를 불

바다로 만들어버린 탓에 나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화염에 휩싸여 온 얼굴이 짓뭉개졌으며 감염이 심한 다리는 절단 직전이라고 한다. 그나마 이능력자의 강인한 신체가 마지막 생명줄을 놓지 않은 덕에 이렇게 살아있지만 반 시체와 다름없는 상태가 지금의 나다.

몇 번인가 정신을 잃었다 다시 차리면서 이제는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한계를 넘은 고통이 이제는 차라리 무감각해졌다고 할까. 그저 이들이 이끄는 데로 흘러갈 뿐.

온 몸에 기운을 집중하려 하지만 털끝만큼도 모이지 않는 생명력에 좌절하기를 몇 번. 이제는 아무런 의지도 생각도 없다.

그저 한 가지 의문은 군부의 돌발행동.

안개에서 돌아온 뒤로 지속적으로 가졌던 군과의 커넥션. 중대장을 통한 상급자들과의 통화에서는 전혀 듣지 못한 일이라 그저 의문이 들 뿐이다. 유니온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군부와 협조하기로 했었던 나였기에 그 배신감과 의문은 더욱 크다.

분명 그들은 이능력자들의 타격이 실패로 돌아갈 시에 작전을 시작한다고 했

고, 그때 나도 어느 정도 협조를 하기로 했던 터인데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만약 원정대의 퇴각이 조금만 늦었다면 생존자는 아예 없었으리라. 아무리 이능력자들의 힘이 강대하다 하여도 갑작스러운 군의 포격에 살아남을 수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얘기를 들어보니 그냥 단순한 포격도 아닌 미사일과 폭격기를 비롯한 총력전에 가까운 공격이었다니. 군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혹시 그들은 눈엣가시 같은 유니온을 처리하기 위해 작정하고 나선 게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는 결론은 그거 하나인지라 분노와 허탈감이 치솟는다. 더욱 억울한 건 군의 공격은 괴수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다고 하니 애꿎은 희생자들만 불쌍할 판이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없던 차라 그저 생각에 집중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이 어느 순간 하나로 귀결대고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망할 군바리 새끼들!"

용모가 거칠게 말했다. 그의 등에 업힌 인영의 모습이 처참하다. 온통 눌러붙은 얼굴은 눈이 어디고 코가 어디인지조차 구분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힘 없이 덜렁거리는 사지 역시 온 피부가 발갛게 익고 짓물러서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모습이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용모를 제외한 모든 이들의 꼴이 말이 아니다. 상처가 없는 이는 단 하나도 없고, 개중 팔이 없거나 사지가 멀쩡하지 않은 사람이 태반이다. 그나마도 얼마 안 돼는 수라 안개 속으로 출정했던 원정대의 위풍당당했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개새끼들!"

다시 한 번 거칠게 욕을 내뱉은 용모다. 그를 비롯한 이능력자들은 그나마 형준과 1등급 이능력자들의 조력으로 일찍 자리를 벗어난 인물들이다. 100명에 가까웠던 이들이 쫓기는 와중에 줄고 줄어 이제는 반도 채 되지 않는다.

중간에 만난 군부대와 합류를 하려 했으나 곧 들이닥친 몬스터들 탓에 다시 도주 길에 올라야 했다. 그나마 그들을 미끼로 몸을 뺄 수 있었다면 다행이었달까.

어차피 석연치 않았던 군의 작전이었던 탓에 오래 같이 머물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쉬운 게 사실이었다. 지금 그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음에 민간인에 불과한 군인들이었지만 조금이나마 의지하려 했으니.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최악인지 알려주는일이다.

"용모 그만 기운 빼. 그러다 형준씨 깨겠어."

용모 곁에 다가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여인. 달무리 김수현이다. 고운 얼굴 가득 피로를 담고 그녀가 용모를 질책했다.

그녀의 말에 용모가 침을 한 번 뱉고는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심기 불편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등에 업힌 이를 생각해서 이를 악다물었다.

그런 그를 일별한 김수현이 고개를 돌리는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난다. 고운 이마와 그린듯한 눈썹 그리고 피로가 가득하지만 아름다운 눈동자. 그런데 짝이 맞지를 않는다. 반대편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눈동자가 있어야 할 그곳이 커다란 상처로 덮여있다.

"자. 조금만 힘내자. 다른 지부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될 거야."

스스로조차 확신이 없는 목소리지만 그녀의 말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능력자들이다.

부상자를 등에 업은 이들이 다시금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자. 한편 더 갑니다.

아직 더 가야죠. 일단은 6연참은 기본이니까요.

선추코로 힘을 주소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