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47화 (47/223)

< --  1-4. 다시 안개 속으로...  -- >

눈을 뜨자마자 정신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몸이 쑥 밀려나간다.

"뭘 멍청히 있어요!"

허준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유 따위는 찾을 수 없는 음성에 고개를 돌리니 온 사방이 난장판이다. 그 역시 꼴이 걸레짝이 다 된 낭패스러운 모습이라 혼란스럽기만 하다.

전지현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허준영 역시 꼴이 말이 아니라 덜컥 겁이 났다. 잠시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떻게 된 겁니까?"

떨떠름하게 물으니 허준영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한다.

"뭘 어떻게 돼요! 당신이 정신 놓고 있는 사이에 쫄딱 망한 거지!"

전에 없이 신경질을 부리는 그인지라 당황스럽다. 갑작스럽게 급변한 상황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제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었죠?"

여전히 몽롱하게 물으니 다시 한 번 몸이 쑤욱 밀려간다. 투명한 막이 나를 감싸고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게 보니까 일종의 결계인 듯 보인다. 뭔가 바뻐 보이던 그가 태평스러운 내 말에 와락 성을 낸다.

"한 오분은 넋 놓고 있었다고요! 상황이 안 좋으니까 설명은 나중에 듣고 일단 몸을 빼요!"

그의 말에 얼굴이 왈칵 일그러진다. 미친. 의식의 세계에 있는 건 찰나의 순간이라며! 거의 실시간이구만! 얼굴도 모르는 가시찔레 꽃 - 소희를 욕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말대로 상황이 좋지 않다. 의식의 세계에 있었던 시간은 단 5분밖에 안 돼지만 정신을 잃기 전과 지금은 천지 차이다. 예비대의 능력자들이 이곳 저곳에서 흩어져서 촉수 공격을 피하고 있으며, 저 멀리 보이는 몬스터 무리도 무슨 일인지 만신창이다. 덕분에 원정대의 모습도 보였는데 꼴이 말이 아닌 건 매한가지. 굳건해 보이던 방진이 깨어진 채 이곳 저곳에서 흩어져서 몬스터들과 난전을 벌이는 모습이 위태위태하다.

그 모든 게 오분도 안 되는 시간동안 일어났다니.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검후는 어디 있습니까?"

허준영은 내가 급박한 상황에 자꾸 질문을 던지자 짜증이 난 듯 하지만 그래도 꼬박 꼬박 대꾸를 해온다.

"저 앞에서 시간 끌고 있어요. 제길. 너무 쉽게 봤었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방에서 거대한 검이 날고,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연달아 터져 나오는 폭음이 매섭기만 하다.

부드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은 성난 표정을 한 그가 바쁘게 손을 놀린다. 사방으로 뻗어간 촉수의 길이가 이곳을 훌쩍 넘어 원정대에게까지 이른다. 허준영의 바쁜 손짓에 따라 허공에 가득한 원구들이 촉수를 쳐내거나 밀어내고 있다.

"시간 없어요! 원정대를 데리고 빠져나가요!"

전방에서는 폭음이 터져 나오고 후방에서는 몬스터와 난전을 벌이는 원정대가 있다. 그 바로 위 하늘에는 촉수와 힘겨루기를 하는 수 많은 원구들이 보이고.

잠깐 사이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전황에 어안이 벙벙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날리는데 원구에 있던 몸이 쏙 빠져나간다. 나를 감싸고 있던 원구가 금세 원정대의 머리 위로 날아간다.

"가서 원정대의 후퇴를 도와요!"

이제는 숫제 고함을 지르는 허준영을 일별하고는 몸을 날린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몸을 사릴 수도 없겠지.

땅을 박차고 나아가는데 금세 원정대의 코앞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300명에 가까웠던 원정대가 어느새 100명도 채 되지 않아 보인다.

제길. 그 사이에. 정신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굳건하게 방진을 이루고 버티고 있던 이들이 왜 갑자기... 이를 악물고 달리면서 활을 형성해 쏘아낸다. 명중이고 뭐고 확인 할 겨를도 없이 전장을 달리고 있는데 온통 시체가 가득하다. 몬스터의 시체고 이능력자

의 시체고 구별할 것 없이 잔뜩 뒤섞인 전장이 참혹하다.

달리던 걸음이 어느새 멎어버린다. 유니온의 작전에 투입된 후 처음으로 보는 이능력자들의 대규모 참사에 넋이 나갈 지경이다. 손 끝에 형성되었던 활이 스르륵 사라진다.

툭.

발치에 굴러오는 뭔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데, 그 정체가 드러난다. 강인한 인상이었을 사내의 얼굴이 낯이 익다. 자신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죽었는지 여전한 투지가 가득한 표정이 눈에 박힐 듯 들어왔다.

"미.. 친..."

나도 모르게 침음성이 잇새로 비어져 나온다.

몸 없이 바닥을 구르는 머리의 주인은 유니온의 총 작전 책임자 이호상이다. 2등급의 강력한 능력자인 그가 지금 비참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유니온 소속, 비소속 능력자들의 시체가 가득하다. 팔이며 다리며 온전한 시체를 찾기 힘든 참혹한 현장에서 나는 침을 꿀꺽 삼킨다.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그림자. 고개를 올려도 올려도 끝이 없는 길다란 몸통을 지나 그 끝에 달린 거대한 머리통.3등급 몬스터 '이무기'다. 그런 놈이라면 달리 놀랄 것도 없겠건만 거대한 머리통 위에 달린 뿔 두 개가 눈에 띄인다. 전기를 가득 머금은 두 개의 뿔 사이를 파지직 거리는 섬광이 바쁘게 오고 간다.

파지직 거리는 섬광이 바쁘게 오고 간다.

"이런 썅!"

나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며 땅을 박찬다. 내가 있던 자리에 금세 내려 꽃히는 섬광.

그냥 이무기가 아닌 승천 직전의 이무기다. 머리에 돋아난 뿔이며 뭐며 딱 봐도 용에 가까운 모습이라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물린다. 용도 이무기도 아닌 놈이 금세 내게 흥미를 잃고는 전장을 헤집으며 난장을 피운다.

놈의 뿔이 번쩍거릴 때마다 이능력자들의 비명이 터진다.

몇 명이고 놈의 공격에 휘말려드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린다. 전장의 소란과는 다르게 낮은 목소리가 낯이 익다.

'멍청아. 뭐 하고 있는 거야. 나를 쓰라고 나를.'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손등에 희미하게 자리한 꽃이 확 뜨거워진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비명을 지른다.

'멍청아! 나야! 소희! 지금 사람들 뺄 거 아니야?'

그제야 의식의 세계에서 만났던 소희가 떠올랐다.

"찰나라며!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고함을 치는데 그녀의 음성이 투덜거린다.

'5분이면 찰나지. 말이 많어. 그보다 시간 없지 않아?'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말대로 수다를 떨 시간 따위는 없다. 지금도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있다.

'손등으로 생명력을 모아봐! 어서!'

그녀의 말대로 황급히 생명력을 모으니 가뜩이나 온몸을 짓누르던 무기력함이

한층 늘어간다.

'조금만 참어! 금방 괜찮아질 거야!'

말 한마디로 참아질 상황이 아니다. 의식의 세계에서 들었던 대로 무리하게 힘을 끌어다 쓴 대가인지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다. 손등에 피어오른 줄기와 꽃잎이 사방으로 뻗어간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나를 중심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줄기가 순식간에 전장에 퍼져간다.

결국 나는 더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점차 시야가 흐려진다. 의식이 혼미해지는데 다시금 속삭임이 들려왔다.

'다 됐어.'

그 말과 동시에 거짓말처럼 온몸에 힘이 요동을 친다. 방금 전까지의 무력감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회복에 놀라고 있는데 주변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온 사방으로 뻗어간 줄기가 원정대와 난투를 벌이던 몬스터들을 꽁꽁 싸매고 있다. 그 줄기 가득 솟아난 가시가 전보다 훨씬 크고 날카로운데 전에 없던 꽃잎들이 그 사이 사이에 매달려있다.

피를 머금은 듯 생생한 그 꽃들이 한껏 흐드러진다.

"다들 후퇴해요!"

정신없는 와중에 소리를 지르니 몇몇 능력자들이 몸을 빼는 모습이 보인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놀란 이들이 미처 몸을 빼지 못한다. 나는 기운을 담아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이 틈에 도망가라고!"

전장 가득 울려퍼지는 고함소리에 그제야 이능력자들이 몸을 물린다. 저 멀리 거대하게 솟아오른 가시덤불을 보니 그 안에서 빛이 번뜩인다. 오. 이무기까지 가둬버린 거냐. 살벌하기만 한 놈인데도 불구하고 가시덤불속에서 꼼짝을 하지 못한다. 급박한 와중에도 감탄하고 있는데 다시 소희의 음성이 들린다.

'쳇. 전 같았으면 저런 놈들 쯤은 한 끼 식사 거리였다고.'

우쭐거리는 기색이 가득한 음성으로 소희가 거들먹거린다. 그런 그녀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대단한 힘이다. 용이 되다만 놈을 잡아 가둘 정도의 힘이라니. 전에 보통 이무기를 잡을 때도 그렇게 고생을 했건만.

정예 중에서도 정예들. 혼란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들답게 몸을 빼내는 이들의 동작이 날래고 기민하다. 잠깐 사이에 전장을 이탈한 사람들을 보며 나 역시 자리를 이탈하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 저거 유지하는 동안은 못 움직여.'

태연스럽게 지껄이는 말에 뒷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다.

"그럼 나는?"

사람들이 다 후퇴해도 정작 내가 못 빠져나가면 소용없지. 갑작스럽게 살신성인의 본보기를 보이게 생겼다.

'아. 기다려봐. 이게 다 네가 약해서 일어난 일이니 좀 진득하게 참아보라구.'

점입가경이라고 이 상황에서 핀잔을 주는 그녀에게 입이 떡 벌어진다.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소리야.

내가 그러는 사이에도 꾸역꾸역 밀려들어오는 생명력이 어마어마하다. 이대로 더 가다간 온몸이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에 등가로 식은땀이 흐른다.

"저.. 저기 위험한 거 같은데, 이제?"

이제는 기분상이 아니라 정말 한계다. 손등을 중심으로 오른팔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임의로 기운을 조절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소희의 음성이 마침내 들려 온다

'아. 이제 됐다. 정말 너 더럽게 약하구나.'

끝까지 핀잔을 주는 걸 잊지 않는 그녀다. 뭐가 다 됐다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는데 갑작스럽게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하급한 놈들이야 진즉에 나가떨어졌고 전장에 남은 몬스터들은 최하 5등급 이상의 놈들이었는데 그런 놈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하다못해 가시덤불속에 갇힌 용이 되다만 몬스터까지도 발광을 해댄다. 그리고 내 몸을 터뜨릴 듯이 밀려오던 생명력의 흐름이 딱 멎었다.

============================ 작품 후기

선추코로 저에게 힘을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최소 10연참은 해야 이길거 같아서 사실 전의 상실이긴 하지만 힘내보겠습니다.

여기 그 보답으로 한편 더!

잠깐 쉬었다가 또 찾아뵐께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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