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4. 다시 안개 속으로... -- >
먼지가 채 걷히기도 전에 세사람이 나란히 공격을 준비한다. 양손 가득 빛을 안고 정신을 집중중인 허준영과 눈을 감은 채 뭔가를 준비하는 전지현.
나 역시 이번 공격만큼은 유물과 생명력 모든 것을 걸고 힘을 모았다.1등급 몬스터와의 전투 치고는 지나치게 위기감이 없지만, 언제 상황이 돌변할지 모르니 최대한의 힘을 짜내기 시작했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피의 갑주가 하나씩 해체되어 손끝에 빨려들고, 손등에 희미하게 남은 꽃모양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탐욕스럽게 내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가시찔레의 꽃잎이 손등에서 한 장씩 펴진다. 조금씩 길게 올라오기 시작한 줄기가 잎을 피우고 가시를 돋운다. 끔찍할 정도로 지독한 허탈감이 강타하고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한 생명력.
이제는 피부에 그치지 않고 꽃잎과 줄기가 허공중에 솟아오른다. 벌써부터 온몸에 진땀이 흐르고 손발이 후들거리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한다.
곁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 그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전력을 다 하리라.
공중에 솟아오른 꽃잎과 줄기가 점차 가지를 뻗어나간다. 스물스물 기어가듯 앞으로 전진하던 붉은 줄기와 꽃잎이 점차 먼지 가득한 저편에 가까워진다. 줄기가 뻗어나가는 만큼 끔찍한 탈력감에 그만 두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가 부서져라 악다문다. 아직은 아니다.
최대한의 힘이란 건 이런 게 아니잖아? 자꾸만 스스로와 타협하려는 내 자신을 추슬렀다. 안개를 벗어난 이후 뭔가 결여된 기분. 아니 사실은 D섹터에서 사선을 무수히도 건너면서였을까. 극심한 고통 속에서 무언가 대충 대충 살아가던 나 자신을 돌아본다.
매사 시큰둥해지고 즐거움에만 매달리며 노력이라는 게 사라져버렸다. 그랬던 매사 시큰둥해지고 즐거움에만 매달리며 노력이라는 게 사라져버렸다. 그랬던 것이 안개 속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다른 이들과 전력으로 싸워나갔을 때. 나는 전에 없던 충만함을 느꼈었다. D섹터니 뭐니 지겹다고 떠들어봐야 결국 나는 투견과도 같은 존재.
이미 가치 없어져버린 삶에 유일한 충족감은 전투.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었건만 결국은 다른 이능력자들처럼 어딘가 망가지고 결여된 존재다. 무수히 많았던 생사의 전장 속에서 무언가를 잃고 살아가는 반편이였어. 어딘가 툭 끊어진 감정이 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나 자신을 좀먹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온갖 생각과 감정의 편린들이 휘몰아친다. 끔찍하기만 했던 고통과 탈력감이 희미해져가고 점차 몸이 편안해진다.
저 멀리 스물거리며 기어가던 붉은 줄기와 꽃잎들이 급작스럽게 뻗어나간다. 순식간에 나와 괴수의 사이를 뛰어넘어 먼지 속으로 파고든다.
그 때를 맞춰 양 옆에서 강대한 기운이 터져나간다.
"천지개벽(天地開闢)"
허준영의 낮은 음성과 함께 푸르고 노란 빛이 날아오른다. 금세 저 먼지 가득한 곳으로 날아가 허공중에 궤적을 길게 남긴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빛의 궤적이 어느 사이엔가 원을 그리고 알 수 없는 문자를 허공에 새긴다.
그리고 곁에서 날아오르는 단 한자루의 검. 빛으로 이루어진 검이 굉음과 함께 쏘아져나간다.
순간 눈도 귀도 멀어버린다.
엄청난 굉음과 섬광에 눈을 감을 틈도 없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온통 어둠이다. 고개를 돌려봐도 보이는 것은 어둠, 어둠, 어둠. 아니. 내가 고개를 돌리긴 했나? 그저 막연한 느낌만이 가득한 세계다.
여긴 어디지? 방금 전까지 괴수와...
'킥.'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어둠 속에서 생소한 소리가 들려왔다. 낮은 소리였지만 그것은 분명한 웃음소리. 성숙한 여인의 콧소리 같기도 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키득거림과도 같다.
'누구냐!'
혼란스러운 내 고함소리가 온 사방을 울린다. 마치 메아리처럼 울리고 도는 음성이 한참이나 이어진다.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돼. 나 여기 있으니까.'
그 메아리가 사라져갈 쯤에 생경한 음성이 들린다. 여인의 것처럼 가늘고 새된 음성을 따라서 고개를 돌려보지만 보이는 것은 여전한 어둠뿐이다.
'아. 아직 내가 보이지 않아?'
가는 음성이 마치 돌리듯 키득거린다.
'아직 때가 아니라서 그래.'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는 모양새가 즐거워 보인다.
'응. 오랜만에 사람이랑 대화를 나누는 걸. 지금의 난 즐거워서 죽겠다구.'
단지 생각만 했을 뿐인데 속삭임이 바로 대답해온다. 깜짝 놀라 허둥대는데 다시 키득거리는 소리가 이어진다.'멍청이. 여긴 네 의식의 세계이자, 나의 심상공간이야. 서로간의 생각이 이어지는 건 당연하잖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대체 누구냐.
'나? 누군지 궁금한 거야?'
왠지 모르게 기뻐하는 기색이 가득한 음성이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낸다.
'나. 누군지 알려줄까? 처음부터 알려주면 재미없는데. 에이. 그래도 알려줄까? 그래 알려줄게.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니까. 음... 근데 내가 누구라고 해야 하지? 아. 나는 소희야.'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혼자 호들갑을 떤다.
'꺄아. 반가워. 이름 알려줘 버렸네? 너는 김형준이지? 알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돼.'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는 수다스러움에 질려버려 말을 자른다.
'아니. 그보다 누구냐고 너. 소희가 누구야 대체.'
한창 신나게 떠들어대던 음성이 내가 말을 끉자 토라진 음성으로 대꾸한다.
'소희가 소희지. 누구긴 누구야. 너 멍청하구나.'
'시끄러워. 여긴 어디야. 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나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줘.'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온통 암흑이니 점점 두려움이 고개를 쳐든다. 나 설마... 괴수와의 전투에서 죽어버린 건가?
내가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까르르르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너 진짜 멍청하구나. 죽긴 왜 죽어 네가. 여긴 심상공간이라고 했잖아.'
심상공간이고 나발이고,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건데!
'왜긴 왜야. 네가 저 쪽에서 멍청한 짓을 하니까 내가 불러들인 거지.'
멍청한 짓?'너 되도 않는 능력으로 내 힘을 끌어다 쓰려고 했지? 너 내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본적도 없는 존재의 힘을 끌어다 쓰려 했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나는 가시찔레꽃을.... 설마?
'맞았어. 너 엄청 둔하구나. 딱 보면 모르겠어? 아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지?'
자신이 유물이라고 말하는 정신 나간 음성에 머리가 혼란스럽다.
'말했지. 의식의 공유 때문에 네 생각이 그대로 흘러들어온다고. 너 엄청 실례라고 지금. 숙녀한테 무슨 소리야 지금.'
숙녀고 나발이고 여긴 대체 뭐냐고.
'정말 말귀 못 알아듣네. 너 방금 생각도 안 해보고 있는데로 힘 쏟아 부어서 싸우려고 했지? 쯧쯧 멍청하긴. 아직 네 힘 바깥의 영역이라고 거긴. 내가 널 불러들이지 않았으면 너 쪽쪽 빨려서 죽었을 걸?'
아직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지만 말을 듣다보니 내가 유물의 힘을 내 능력 이상으로 끌어다 쓰려고 한 것 같다. 그럼 소희라는 존재는 유물의 자아 같은 건가?
'자아 같은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가시찔레 그 자체라고.'
현실감 없는 상황이지만 왠지 그녀의 말에 신뢰가 간다.
'그래! 날 믿어야지 그렇게! 난 네 생명의 은인이라고!'
갑작스럽게 밝아진 음성이 한껏 우쭐된다. 뭐야. 믿어준다니 기뻐하는 건가? 알기 쉬운 성격이네.
'아. 이게 아닌데. 어쨌건 내가 너를 불러들인 건 아직은 때가 아니니 필요 이상으로 내 힘을 가져다 쓰지 마. 내 본의는 아니지만 내가 먹어버릴 수가 있어.'
먹혀버린다니. 생명력을 흡수당한 그 몬스터들처럼?
'응. 맞어. 더 비참할거야 넌 아마. 그러니 당분간은 좀 자제 해. 게다가 너 지금 위기 상황도 아니잖아. 네 옆에 있는 자들이 알아서 처리할 텐데 왜 그렇게 나대. 나대기를. 거기다 손 보태봐야 티도 안 난다고 너.'
안 그래도 그들에 비하면 힘이 부족함을 알고 있었던 차였는데 아픈 곳을 푹
찌르는 음성이다.
'그리고 지금 상대하는 괴물은 니들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니라고. 니 옆의 사람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무리야. 그러니 도망쳐. 나도 오랜만에 만난 계약자를 이렇게 잃긴 싫어.'
골난 아이처럼 칭얼대는 음성이지만 거짓된 기운 하나 없는 염려다. 그런가? 그렇게 강대한 1등급 이능력자들조차도 무리인 건가.
'멍청하긴. 옆의 두 사람 같은 사람이 수십이 몰려가서도 잡지 못한 괴물이야. 너희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방법이 없어. 그러니 죽기 싫으면 도망쳐.'
절로 침음성이 나온다. 허준영과 전지현같은 능력자들이 수십이 몰려가서도 물리치지 못한 괴물이라니. 그럼 어쩌란 말인가. 당장 괴물이 자리잡은 곳이 지척이거늘.
'아. 그건 좀 생각해봐야겠다.'
긴장감 하나 없는 음성으로 지껄이는 꼴에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이봐.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상황이 아니라고.
'아! 방법이 하나 있네. 저 괴물은 자극만 안하면 쉽게 움직이지 않아. 이미 자극할 만큼 했지만 지금이라도 도망쳐서 숨어있으면 금방 잠잠해질 거야.'
결국은 수가 없다는 거야?
'지금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방법이 없는 걸?'
그렇게 떠들어도 방법 따윈 하나도 없다. 천이백만명이나 모여 사는 도시를 버리고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난 사실만 말했을 뿐이야. 그보다 시간이 별로 없어. 네가 그간 흡수한 기운들이 꽤 돼긴 하는데 이번 일로 다 써버렸어. 그러니 돌아가면 바로 도망부터 치라고.'
대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려고.
'저 밖의 세계에서는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니. 다음에 볼 때는 제대로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만큼 강해져 있기를 바랄...'
갑작스레 나타났던 음성이 나타났을 때처럼 갑자기 사라진다. 그리고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들어 간다.
============================ 작품 후기 연참배틀 당일인데 알러지약을 먹었더니 무기력증이 장난 아닙니다. 날짜를 바꾸고 싶지만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저쪽의 작가님들은 벌써 연참세례를 퍼붓는 중이라죠.
저도 최대한 몸을 추슬러서 여섯편까지는 달려보겠습니다. 하지만 저 쪽 자까님들이 100키바는 투척할 기세라 벌써부터 ㅎㄷㄷ입니다 ㅜㅜ저에게 선추코로 힘을 주소서.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