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45화 (45/223)

< --  1-4. 다시 안개 속으로...  -- >

한발 내딛을 때마다 몸이 가벼워진다. 기분 탓인가 했지만 점차 떠오르기 시작하는 몸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이 멀어진다.

등 뒤에서 퍼덕이는 날개. 나는 지금 날고 있다.

주변의 풍경이 미친 듯이 뒤로 밀려가고 나는 순식간에 괴수에게 당도했다. 정신 놓고 있다가 괴수의 몸에 그대로 들이 받을 뻔 했던 나는 간신히 몸을 멈출 수 있었다.

하아. 이제 어떻게 한다.

무작정 달려들었지만 어마어마한 덩치를 보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축구장보다 더 거대한 덩치에 주렁주렁한 촉수들. 그 하나 하나가 지하철보다 더 굵고 거대하다.

저 멀리서 전투를 시작한 전지현을 본다. 묵직한 검 위에 잔뜩 기운을 덕지덕지 바르곤 연신 검을 휘둘러 가는데 그 때마다 괴수가 요동을 쳤다. 그녀의 검에 걸렸다 하면 촉수고 본체고간에 그대로 썰려버린다. 과연 1등급 이능력자다운 힘이다.

사방팔방 분주하게 몸을 날리며 공격을 해대는 그녀를 보다가 나 역시 공격을 준비한다. 이상하리만치 얌전하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괴수가 미심쩍었지만 이런 호기도 없는지라 힘을 모았다.

전에 상대했던 거대 해파리를 떠올리며 생명력을 손끝에 모았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생명력에 몸이 금세 무기력 해졌지만 방금 전에 흡수한 생명력들이 그 자리를 바로 메꾼다.

우우우웅손끝에 어린 붉은 원반이 점차 거대해져간다. 손바닥만 하던 것이 잠깐 사이에 몸을 불리고 또 불려 이제는 5m는 넘는 크기가 된다. 그래봐야 괴수의 몸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 정도 사이즈라면 던져봐야 괴수의 몸에 생채기나 날까 의심이다. 조금 무리 하는 심정으로 크기를 더욱 불린다.

한참이나 그렇게 힘을 모으는데 문득 의문이 든다.

괴수가 지나치게 얌전하다. 전지현의 거센 공격에 촉수고 뭐고 다 떨어져나가게 생겼는데 반응이라는 게 고작 몸을 꿈틀 거리는 정도다. 차라리 거대 해파

리처럼 촉수라도 뻗어오면 모르겠는데 움직일 생각조차 없어 보이니 도리어 불안해진다고 할까.

이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크기가 커져버린 붉은 원반. 여전히 괴수의 덩치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최대한 날카롭게 만들었으니 부디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 거대한 괴수 앞에서 난 투지보다는 간절함을 담아 손을 내지른다.

"아아아아아아아!"

막 붉은 원반이 손끝을 떠나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괴수의 포효가 터져 나오고 괴수의 본체가 꿈틀거리며 요동을 친다. 이제껏 촉수가 썰려나갈 때에도 그저 거대한 몸을 뒤틀 뿐이었던 괴수가 전에 없이 발악을 한다. 힘없이 늘어져있던 촉수들이 온 사방을 쓸어가고 제 자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던 거체가 들썩였다.

멍하니 놈의 변화를 바라보던 나는 사방에서 짓쳐드는 촉수들을 피해 한참을 물러났다. 내가 던진 원반이 어떻게 됐는지 지켜볼 여유따위는 없다. 그저 정신없이 촉수를 피해 달릴 뿐. 원체 거대한 촉수라 물러나도 물러나도 끝없이 달려든다. 그렇게 얼마나 촉수를 피해 뒤로 물러났을까. 예비대가 있는 곳 근방까지 물러서버렸다.

예비대의 이능력자들이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고 놈을 주시하고 있다. 그 중 허준영만이 헤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부좌를 틀고 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황급히 물러난 내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오직 괴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

놈이 마치 아파트와도 같은 그 거대한 다리를 엇갈리며 움직인다. 딱히 방향을 두었다기보다는 그저 제 자리에서 휘청이는 것 같기도 한데 여파가 장난이 아니다. 매 걸음마다 온 천지가 진동한다. 거체가 움직일 때마다 족히 수백 미터는 떨어진 이곳까지 그 파동이 느껴질 지경이다.

괴수가 이제는 차라리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심하게 몸부림을 친다. 그 발악이 얼마나 심했는지 한창 놈을 썰어가던 전지현 마저 허겁지겁 물러나는 게 보일 정도다. 괴수가 촉수를 뻗는 족족 잘라내던 그녀가 어느덧 내가 있는 곳까지 물러났다.

아직까지 검에 검푸른 섬광을 두르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예상은 했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군. 본체가 너무 거대해서 공격이 먹혀드는지 알 수조차 없다니."

그녀가 썰어낸 촉수만 해도 여기서 보일정도로 수북하게 싸여있는 판에 비관적

인 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다. 기세 좋게 달려갔지만 딱히 한 것도 없는지라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꿈적도 안하던 놈이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요?"

무수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있던 놈이 갑작스럽게 왜 발악을 하는지 그무수한 공격을 받으면서도 가만히 있던 놈이 갑작스럽게 왜 발악을 하는지 그녀에게 물으니 그녀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이런 놈은 처음이라 나도 답해줄 수 있는 게 없군."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워낙에 출중한 능력을 가진 그녀였던 탓에 혹시나 했던 게 역시나다. 그녀 역시 갑작스러운 괴수의 난동에 의아하긴 마찬가지로 보인다.

"얼마만에 뽑았는지 모를 검이건만 상대가 저러니 손맛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다소 불만스러운 그녀의 음성에 눈을 크게 뜬다. 원체 도도한 이미지의 그녀건만 지금은 뭔가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골이 난 아이 같은 느낌이다. 이지적인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지만 그게 또 그렇지도 않다. 묘하게 잘 어울리는 게 원래 성격은 저리 차분한 모습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보며 잡스러운 생각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괴수의 난동은 계속되고 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멀리서 보기만 해도 끔찍하기만 한 괴수의 난동에 그녀에게 물으니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은 제대로 한번 붙어봐야겠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놈이 얌전하게 있을 때 제대로 공격해보는 건데 혹시 몰라 조심한다는 게 오히려 악수가 될 줄이야."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녀가 자세를 가다듬는다. 묵직한 자신의 검을 가슴어림에 세우고 눈을 감는다. 그런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바람이 휘몰아친다. 거대한 기운으로 자신의 몸을 감싼 그녀가 검을 치켜 올린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거대한 검이 형성된다. 그것만 해도 눈이 튀어나올 만큼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는데 그녀는 거기서 그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여전히 그녀를 중심으로 몰아치는 바람이 더욱 거세진다.

잠시 뒤에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검의 형상이 점차 늘어간다. 다섯 자루도 안 되던 검이 금세 열 자루가 되고 스무 자루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셀 수조차 없는 검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다.

한 자루 한 자루가 몇 미터는 되어보이는데 그런 검이 수백자루니 검의 그림자에 온 사방이 어두워질 지경이다.

과연 1등급 이능력자다운 능력이라 그저 감탄했다.

그녀의 눈이 번쩍 뜨이고 투명하게 변한 눈동자에 서기가 어린다. 검은 눈동자가 이내 금안으로 변하더니 안광이 넘실거린다.

"천지를 뒤덮는 검의 그림자. 검영천하(劍影天下)."

기합도 아니다. 그저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녀의 한마디에 하늘에 가득한 검들이 일제히 쏘아져 나간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검이 쏘아져간 자리에 다시금 새로운 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벌써 쏘아져나간 검만 해도 수백자룬데 금세 그 수가 메꿔진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검이 다시 쏘아져나가고 다시 그 수를 불린다.

천지를 뒤덮는 검의 그림자라더니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거기서 끝을 낼 생

각이 없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검 끝에 피어오르는 한 송이 매화. 매화검(梅畵劍)."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저 멀리 쏘아져나간 무수히 많은 검. 그 검이 지나간 궤적에 꽃송이가 날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인간이 벌인 일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 광경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1등급, 1등급 그러더니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이런 대단한 힘을 가진 이들이 왜 그간 D섹터의 정리에 나서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이들이 전면적으로 나섰다면 D섹터에서 스러져간 이능력자들 중 상당 수가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그간 일반 이능력자들이 그곳에서 흘린 피가 우스워질 지경이다.

괜스레 입맛이 써진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그녀의 공격이 마침내 괴수에게 다다른다.

수백 개의 검이 괴수를 찔러간다. 그 검 끝에 휘날리는 꽃잎이 놈의 거체에 닿을 때마다 폭발이 일어난다. 굉음이 터져 나오고 괴수의 거체가 흔들린다. 여지껏 봐왔던 것보다 더욱 거세게 난동을 부리는 괴수.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검

의 행렬이 쉴 세 없이 놈의 몸에 박혀든다. 촉수를 휘둘러 검을 쳐내려고 해도 촉수채로 베고 지나가는 공격에 셀 수도 없이 많은 촉수가 바닥에 떨어진다.

굉음과 섬광. 그리고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먼지. 도무지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공격이 마침내 끝이 난다.

천지를 울려대던 굉음 탓에 아직도 귀가 먹먹하다. 피어오르는 먼지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허준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새를 못 참고 꽤나 거창하게 해버렸군요. 과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검후(劍后)'의 성정이 어디를 가는 건 아니군요."

그의 말에 전지현이 눈살을 찌푸린다. 검후라니? 꽤나 거창한 이름이지만 그녀의 격에 제법 맞는 이름이기도 하다. 검의 여왕이라... 과연 1등급 이능력자들은 콜싸인부터가 남다르구만.

"아. 책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한 말이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던 그를 잠시 노려보던 전지현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입만 놀리지 말고 당신도 손을 거드는 건 어떤가."

과연 저 거센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하지만, 그녀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그가 한발 앞으로 나선다.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지요. 조금만 더 빨랐다면 제법 효과를 볼 수 있었겠지만 뭐 그러려니 해야지요."

잠깐의 시간차이로 합공의 기회를 놓친 게 상당히 아쉬운지 입맛을 다신 그가 양손을 크게 벌린다. 여태 보여줬던 술법과는 다르게 어떠한 동작도 없이 바로 모이기 시작한 빛 무리. 그저 가만히 늘어트린 양 손에 붉고 파란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검후가 검영천하(劍影天下)와 매화검(梅畵劍)을 보였으니 저도 격을 맞추어야겠지요?"

장난스러운 어조지만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번뜩이고 있다. 편안한 표정이지만 풍기는 기운만은 압도적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온다.

"김형준씨. 보고만 있지 말고 한 손 보태는 건 어떻습니까?"

워낙에 압도적인 힘을 본 직후라 멍하니 그들이 하는 냥을 지켜보던 차라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어차피 멍하니 있어봐야 괴수가 절로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검후도 조금 더 힘을 써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의 말에 전지현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다스러움은 시간이 지나도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는구나.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차니 더는 보채지 말아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다시금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한 그녀의 눈동자.

"어차피 근접전은 저에게 맞지 않으니 전 이번 공격에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허준영이 말과 동시에 양 손을 포갠다. 그 손안에서 웅웅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한 빛무리. 그리고 곁에서는 거대한 검을 또 다시 만들어내는 검후 전지현이 있다.

이런 괴물들 사이에서 과연 내 공격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 허준영의 말대로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공격을

궁리해본다.

어쨌건 한번 시도는 해봐야지 더.

한숨을 쉬며 그들의 곁에 나란히 서서 기세를 북돋았다. 바로 곁의 그들에 비해 초라한 기세지만 전심전력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 작품 후기 늦었지만 한편 업뎃 합니다.

슬슬 일이 많아질 무렵인데다가 몸도 성치 않으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군요.

이래서야 연참대전에 패하고 손모가지를 자진 납세해야 할 판이라 걱정입니다.

독자님들 선추코로 제게 힘을 주소서.

코멘트는 몇번씩 읽고 있으며 조언이나 지적 코멘트 같은 경우에는 조만간 수정작업에 한번에 반영하겠습니다. 물론 전적으로 다 반영은 못하지만 글의 방

향성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한 최대한 수정하겠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못난 글쟁이의 몸을 걱정해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기침 나고 열나고 피부 가렵고 두드러기에 콧물 나는 것 빼면 저 괜찮습니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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