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42화 (42/223)

< --  1-4. 다시 안개 속으로...  -- >

셀 수도 없이 늘어선 몬스터들의 대군과 괴수의 등장에 모두가 굳어버린다. 그동안 허준영의 경고에 익숙해져 늘어졌던 경계심이 다시금 날카롭게 날을 세우지만 이미 늦었다.

사방을 빽빽하게 둘러싼 몬스터들이 그 흔한 괴성 하나 내지르지 않는다. 무언가에 홀린 듯 걸쭉하게 침만 흘리는 놈들의 모습이 이질적이라 더욱 소름이 돋았다.

거대한 놈도, 왜소한 놈도.

네발로 기는 놈도, 두발로 걷는 놈도.

모두 하나 같이 입을 꾹 다물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천 쌍의 눈이 섬뜩하게 우리를 노려보는 가운데 사람들이 하나 둘 정신을 차린다. 여기 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오고 소란이 벌어진다.

"부대에에에! 방지이이이인!"

이호상이 포효하듯 길게 외치자 무리가 부산스러워진다. 패닉에 빠져있던 사람

을 유니온 소속의 능력자들이 다그쳐 재빠르게 방진을 구성한다. 이미 사전에 얘기가 되어있었는지 빠르게 방진이 구성된다. 근접전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1조에서 15조까지가 외곽을 두르고 원거리 지원이 가능한 16조에서 20조까지가 내부를 채운다.

과연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라 그런지 당황도 한 순간일뿐 금세 전열을 가다듬고 다음 지시를 기다린다. 예비대는 진의 정중앙에서 언제든지 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불찰이군요. 우리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움직일 줄은..."

다시 여유를 찾은 허준영이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3등급만 수십 마리가 넘어. 4등급 밑으로는 셀 수조차 없다."

전지현 역시 무겁게 입을 뗀다.

그들의 대화에 예비대의 능력자들이 몸을 움찔거린다. 한 두 마리만 등장해도 재앙인 3등급 몬스터가 수십 마리나 나타나다니, 아무리 정예들만 추린 부대라 하더라도 다들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멀리서 이호상이 달려오더니 허준영과 전지현에게 다가간다.

"상황이 어렵게 됐습니다. 계획을 수정해야겠습니다."

계획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다. 괴수와의 일전을 준비하는 허준영과 전지현이 힘을 비축할 수 있도록 나머지 사람들이 길을 연다. 단순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그 계획이 지금 시작부터 틀어지게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만 손을 놀릴 수는 없겠지. 뒤가 걱정이긴 하지만 힘을 보태주마."

최상의 컨디션에서 부딪혀도 어찌 될지 모르는 괴수와의 전투에 앞서 힘을 낭비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대로라면 전원 몰살이다. 허준영과 전지현도 그런 사실을 아는지 낭패스러운 얼굴로 상황을 살피고 있다.

몬스터의 수도 수지만 3등급의 몬스터들이 문제다. 다른 잔챙이들은 차치하고 그들만 원정대와 부딪혀도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 다른 놈들까지 바글바글하다.

어째 잘 풀리나 했더니 하루만에 이 꼴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의외로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능력자들이다. 본신의 능력을 믿기에 그런 것도 있겠지만 당장 그들의 뒤에 버티고 선 한 쌍의 남녀를 믿는 마음도 크리라. 처음 보는 순간 자신들을 압도했던 그 강대한 기세를 기억하는 한 부대가 쉽게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제가 손을 쓴 김에 조금 더 쓰도록 하죠."

허준영이 나서자 전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나설 줄 알았더니 그만이 전투에 참가할 생각으로 보인다.

"둘 다 지쳐서야 저 괴물을 처리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그가 쓰게 말한다. 그 역시 지금의 상황이 불편하긴 매한가지인 듯 온화한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있다.

"뒤 섞이기 시작하면 손쓰기가 어려우니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큰 거 한방. 그 이상은 못 돕습니다. 더 이상 힘을 빼면 정작 괴수를 잡기가 어려울 테니."

단 한방이라지만 1급에 달하는 힘을 지닌 그가 큰 거 한방이라고 했으니 절대

소소한 것은 아닐 테지. 안개를 걷어내던 때와 같이 그가 손을 휘젓기 시작한다. 벌써부터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한 그를 보고는 이호상이 물러선다. 급한 걸음으로 여기 저기 고함을 치며 개전을 준비하는 모습이 분주하다.

긴장되는 상황인 건 마찬가지지만 예비대에 속한 입장에서 딱히 할 일도 없었던 차라 허준영이 하는 꼴을 살핀다.

"김형준이라고 했나."

한참 그의 손끝에 빛 무리가 모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전지현이 말을 걸어온다.

"이번 일 당신의 힘도 빌려야겠다."

뜬금없는 말이라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본다.

"물론 저도 힘을 보태야지요. 아마 이번엔 예비대도 싸워야 할 것 같네요.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튀어 나가겠습니다."

이미 예비대에 속한 마당에 지시가 떨어지면 바로 전투에 투입될 터 힘을 빌려 달라 말하는 영문을 모르겠다.

"아니. 그 말이 아니야. 말 그대로 당신도 우리와 함께 싸워야겠다."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바로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저는 달랑 2등급입니다만?"

스스로의 힘을 비하하는 내 처지가 초라하지만 당장 저 괴수하고 싸우라는 데에야. 덩치만 해도 산이 통째로 움직이는 위압감이라 싸울 엄두도 나지 않는다.

"아. 전면으로 나서라는 게 아니다. 그리고 너 혼자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저자가 힘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잠시만 나와 시간을 끌자는 것이다."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거리며 손을 휘젓는 허준영을 턱짓으로 가리키는 그녀다. 별로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거부권은 없었던지라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상 원정대의 주인공은 저 남녀 한 쌍이고 우리야 조연일

뿐. 이 전투가 어찌 될지는 저 둘에게 달려있다. 그러니 그들이 하자는 데로 하는 게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숨길 생각 말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 해라. 힘을 감추고 상대할 정도로 만만한 적이 아니니."

내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한 그녀의 당부에 내심 움찔했다. 적당히 시간만 끌다가 바로 몸을 뺄 생각이 바로 탄로 난다.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듯 투명한 눈동자를 한 그녀가 다시 한 번 경고한다.

"1등급은커녕 2등급의 적과의 전투도 경험이 없을 터, 처음부터 가진 밑천을 전부 보이지 않으면 위험할 거다. 아니. 필시 바로 살해당하겠지."

살벌한 말을 태연하게 지껄이는 모습에 질려버린다.

가진 힘의 전부라. 아직은 보여줄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건만 이건 뭐 숨기고 말고 할게 없이 꼼수 부렸다간 바로 죽는다고 으름장이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저 거대한 괴수에게 힘을 숨기면서 싸운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제길. 아직은 시기가 아닌데.

속으로 욕을 내뱉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이 내 의지 따위는 처참하게 묵살해버린다. 그 거대한 흐름 앞에서 인간의 계획은 차라리 사소하다고 해야 할 지경이니 나 하나의 의지 정도야 오죽하랴.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나는 갑작스레 요동치는 힘의 파동에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어느사이엔가 빛 무리에 둘러싸인 허준영이 마치 천신과 같은 모습으로 하늘에 떠오르고 있다.

몬스터 대군에게 포위되었다는 위기감도 잊고 다들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희미한 빛 무리가 점차 뭉치고 뭉쳐 끝에 가서는 거대한 빛 덩어리만이 보일 뿐, 이제는 아예 빛에 삼켜져버려 보이지도 않는 허준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납게 몰아치는 힘의 파동에 다들 압도되어 넋을 잃는다.

점점 높아져만 가던 빛 덩이가 멈춰서고 강렬한 외침이 터져 나온다.

"일광천리!

(日光千里昇)"

단 네 글자에 불과한 외침이지만 여파는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잔뜩 뭉치고 뭉쳐져 있던 빛의 무리가 소리도 없이 온 사방에 퍼져간다.

퍼지고 또 퍼져서 이제는 온 세상이 빛으로 가득하다. 눈조차 뜨기 힘들 정도로 온 사방이 빛 천지다. 우우우우웅얼마나 그렇게 빛무리에 둘러싸여 있었을까. 눈이 멀어버릴 듯 강렬한 빛이 점차 사그러들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너무도 놀라운 광경에 다들 벙어리라도 된 듯 침묵이 흐른다.

비명도 없었고 빛을 제외한 그 어떤 조짐도 없었다.

질릴 정도로 바글거리던 몬스터들의 태반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몬스터들의 포위망에 이곳 저곳 구멍이 났다. 어떤 곳은 아예 몬스터들의 무리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고, 다른 곳들도 듬성듬성해진 포위망이 걸레짝이 된 꼴이다.

이것이 1등급 이능력자의 힘인가?

순식간에 수백, 수천의 몬스터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리는 힘. 그 인간 같지도 않은 힘에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다.

"우... 우아아아아!"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터져 나오기 시작한 뒤늦은 함성. 시작하기도 전에 몬스터들의 태반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엄청난 힘에 능력자들의 사기가 충천한다. 위축되었던 몸이 풀리고 긴장 대신에 투지가 온몸을 채워온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온 몸에 투지가 충만하게 차오른다. 당장에라도 놈들을 박살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단번에 전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참을 내지르던 함성도 이제는 잦아들고, 능력자들이 눈을 빛내며 투기를 뿜어낸다. 붉고 파랗고 노랗고 하얀 제각각의 빛무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며 그들의 이능이 최고조에 이르른다.

나 역시 생명력을 끌어올려 이능을 활성화 시키는데 무거운 음성이 들려왔다.

"틀렸어요. 제대로 통하지 않았어요."

몬스터의 반절을 단번에 날려버린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비관적인 음성이라 의아할 뿐인데 전지현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게 잔재주 부리지 말고 제대로 하지 그랬나."

어떻게 보면 질책에 가까운 말인데 그 내용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수천의 몬스터들을 흔적도 없이 처리한 힘을 잔재주라니? 더욱 놀라운 건 허준영 그가 수긍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게요. 본신의 힘을 아끼려고 술법의 힘을 빌린 건데, 이럴 거면 제대로 할 걸 그랬나봐요. 강한 놈들은 한 놈도 처리 못했어요. 타격을 받긴 했는데 오히려 화만 돋운 꼴이랄까요."

그가 막 자조적인 음성으로 중얼거리는데 전장의 분위기가 다시 한 번 바뀐다.

조용하게 가라앉아있던 몬스터들의 어두운 기운이 갑자기 솟구치기 시작했다. 드높은 이능력자들의 투기를 덮어버리고도 남을 만큼 거대해진 흉험한 기운이 전장 전체를 감싸안는다.

다른 사람들도 그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낀 것인지 목이 터져라 질러대던 함성을 멈추곤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허준영의 힘에 당하면서도 벌어지지 않았던 몬스터들의 입이 차츰 벌어지고 그 사이로 흉폭한 으르렁거림이 새어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그 으르렁거림이 포효로 바뀌고 전장이 온통 몬스터들의 괴성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저 까마득한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던 괴수가 울부짖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수천 개의 포효를 단번에 압도하는 그 울부짖음. 아니 울부짖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장엄하고 청명한 소리가 온 사방에 퍼져나간다.

수천 개의 각기 다른 울부짖음이 하나로 묶인다. 하나로 묶인다기보다는 차라리 단 하나의 포효에 다른 소리들이 녹아든다고 해야 하리라. 방금 전까지 가득했던 이능력자들의 함성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대한 의지가 온 사방을 울렸다.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울었다. 단지 괴수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포효 한번 했을 뿐인데, 바로 전까지 남아있던 투지가 사그라 든다. 마치 꺼져가는 불씨처럼 위태롭게 타오르던 그 투지의 불꽃이 마침내 꺼져버렸을 때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겨우 업뎃 합니다.

알러지까지 도져서 약을 먹고 있는데 혹시 아시는 분 계실지 모르지만 알러지 약이라는 게 생각보다 독합니다.

약이라는 게 생각보다 독합니다.

덕분에 죽을 맛이네요. 일은 일대로 지장이고 글은 글대로 못 쓰고.

몸이 나을때까지 연참은 없을 듯 합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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