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 겨우 살았다 했더니... -- >
저 멀리 희끄무레한 안개가 꿈틀거린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안개덩어리 속으로 마침내 선두가 들어선다. 망설임 없는 그 걸음에 잠시 탄성도 신음성도 아닌 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아..."
아직 겪지 못한 공포이기에 망설임이 없는 걸까. 아니면 전에 없는 규모의 원정대라 그 힘을 맹신하는 것인지 그들의 걸음이 거침없다.
흉물스럽게 스물거리는 안개가 어느덧 부대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 내 코앞으로 다가선다. 스스로 다짐을 그렇게도 했건만 발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예비대의 최후미로 처지는 내게 김수현이 다가선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이를 악물고 안개 속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그 희뿌연 안개가 온몸을 감싸않고 D섹터의 그것보다 더욱 불길한 무언가가 전신을 간질거린다. 한동안 이 속에서 지낼 때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나중에 가서는 아예 느끼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세 밖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나 됐다고 온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제길. 벌써부터 자청해서 다시 들어온 것이 후회가 되지만 고개를 세차게 털어버린다.
주변에 바글바글한 능력자들을 보면 좀 나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본다. 아직 초입에 불과한데도 벌써부터 저 선두가 보이지 않는다.
"김형준씨라고 했죠?"
부드러운 음성에 고개를 들리니 허준영이다.
"아. 네."
딱히 할 말도 없던데다가 초반에 보였던 압도적인 기세를 몸이 기억하는지라 우물쭈물 대답했다.
"유니온의 보고서를 보니 전에 이 안개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바람이 불어 말을 걸었나 했더니 역시나다.
"좀 얘기를 해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같은 1등급이라도 전지현에 비해 허준영은 말투가 훨씬 온화하다. 그 부드러움 뒤에 숨은 자신감이야 전지현과 마찬가지겠지만 일단 겉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을 상당히 존중하는 듯 하다.
어차피 용모가 보고서로 대부분 알렸다고 하니 딱히 숨길 것도 없다. 이런 저런 경험을 이야기 해주니 적당히 추임새를 넣어가며 상당히 집중해서 듣는 허준영이다.
"그럼 이 안개라는 게 시각 차단효과 외에도 부수적인 뭔가가 있단 말인가?"
갑자기 끼어든 차분한 음성. 어느세 다가왔는지 모를 전지현이 눈을 빛내고 있다. 진즉부터 이쪽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녀를 눈치 채고 있었던지라 바로 대답을 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마치 누군가가 날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말하고 나니 그냥 불안한 탓에 지껄이는 헛소리와 같이 느껴졌다. 왠지 겸연쩍어 머리를 긁적이는데 전지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느낌이 아니야. 이 안개 상당히 특별해. 당신도 느껴?"
뜬금없이 허준영에 묻는 말에 영문을 몰라 눈을 굴린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허준영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
"아아. 느껴지죠. 상당히. 꽤 신경 쓰고 있는 듯 한데요?"
점점 알 수 없는 소리를 해대는 그들만의 대화에 가만히 듣고만 있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안개 전체가 자신의 영역이라는 건가."
그녀의 말에 허준영이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 설명해준다.
"아. 이 안개에 있는 동안 누군가 자신을 관찰하는 느낌이라고 했죠? 당신 말이 맞아요. 이 안개는 보통 안개가 아닙니다."
"그럼 이 안개 자체가...."
나도 모르게 대꾸하니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 안개 자체가 놈의 시야라는 겁니다. 이 안에서 놈이 모르는 일이라는 건 없겠죠. 벌써부터 우리 존재를 눈치 채고 상당히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데요?"
태연하게 끔찍한 말을 하는 허준영이다. 그럼 이 안에 있는 동안은 괴수의 눈을 피할 수가 없다는 건가?
"그래. 지금 꽤 화가 난 거 같은데?"
이지적인 미녀라고 생각했던 전지현이 사납게 웃는다. 고운 얼굴에 떠오른 맹수와도 같은 미소에 한기가 느껴진다.
"어차피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니까요."
허준영이 그녀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까 전에 보았던 섬뜩한 웃음이다. 다시금 등가에 소름이 돋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1등급능력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나를 부러운 눈치로 쳐다보고 있다.
"아아. 다른 사람들보다는 우리 둘이 꽤나 거슬리는 모양인데? 환영인사가 제법 빨라. 예의 바른 주인이군."
여전히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말하자 허준영이 내 어깨를 살짝 친다.
"몬스터들이 오고 있습니다. 수는 약 150마리정도. 급수는 3등급 세 마리에 4등급 여덟 마리. 나머지는 하급한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준비하라고 알려주세요. 이대로라면 10분 내로 마주칩니다."
과연 1등급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게 몬스터들의 접근을 벌써부터 알아낸 그들이다. 허준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예비대의 누군가가 벌써부터 달려가고 있다. 예비대에 미리 배치해둔 유니온 소속의 이능력자다.
금세 경고를 전했는지 안개에 들어선 이후로 한번도 멈추지 않았던 부대가 멈춰 선다. 곧 모습을 드러낸 이호상이 허준영에게 고개를 숙인다.
"몬스터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 역시 거만한 전지현보다는 허준영 쪽이 상대하기 편했던지 바로 그에게 묻는다.
"네. 사실은 아까부터 이동 중이었는데 그 목표가 우린지 확실하지 않아서 이제야 말했습니다."
안개 너머까지 전부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그의 말에 이호상이 즉각적으로 대처를 한다.
"선두의 1조부터 5조까지 방어대형으로 늘어서고 후열은 밀집해서 만일을 대비한다!"
그의 지시가 중간 중간 유니온의 인물들을 통해 제창되고 금세 저 앞이 소란스러워진다. 안개 탓에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유니온의 타격대를 중심으로 방어대형을 짜는 듯 하다.
갑자기 늘어선 대열 탓에 일반 이능력자들이 소란을 피우긴 했지만 금방 진정된다. 과연 고르고 고른 정예들이라 그런지 상황판단이 빠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적을 기다리고 있자니 입에 침이 마른다. 어차피 전열만이 그들을 상대할 것으로 보이지만 안개에 들어온 직후라 그런지 몸이 필요 이상으로 긴장했다.
"크와아아앙!"
보이는 것은 안개뿐이건만 벌써부터 저 앞에서 몬스터의 괴성이 들려온다.
"타격대는 대열을 유지하고, 다른 이능력자들은 타격대와 열을 맞추십시오!"
저편에서 쉴새 없이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다. 유니온 소속의 이능력자들과 일반 이능력자들이 한데 엉켜 있던 탓에 꽤나 부산을 떨어대는 모양이다.
자신감 있게 안개 속으로 들어선 부대지만 사람들이 금세 동요한다. 이 안개 자체가 주는 끈적거리는 불길함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거든. 나 역시 익숙해졌다 생각했지만 마찬가지 상태이고.
오직 허준영과 전지현만이 덤덤하게 있을 뿐이다.
"선두 이능 개방!"
유니온의 전투라는 게 다른 이능력자들과는 다르게 좀 더 조직적인 것이라 그런지 시작부터 일사 분란한 지시가 터져 나온다. 타격대와 섞인 일반 이능력자들이 잘 따를까 모르겠지만 워낙에 쟁쟁한 사람들이니 알아서 하겠지.
지척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가까워진 몬스터들의 괴성과 전열의 고함소리가 섞여버린다.
이제 시작한 건가?
아무리 눈을 부릅떠도 안개에 가리워진 전장이 보일 턱도 없건만 시선을 그쪽
으로 고정한다. 흉성이 도진 몬스터들의 괴성이 수시로 터져 나오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전열의 기합소리. 한참이나 지속되던 소란이 어느새 잦아들더니 대열이 이동하기 시작한다.
"꽤나 능력 있는 사람들만 뽑아왔나 보네요. 생각보다 빠르게 정리 됐는데요?"
허준영이 의외라는 투로 말한다.
"끝났습니까?"
나도 모르게 반문하니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네. 단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다 처리 됐습니다. 꽤나 강한 놈들이었는데 금세 정리하는 군요."
마치 눈으로 확인이라도 한 듯한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안개 속에서 보이시는 겁니까?"
내 말에 그의 눈이 커졌다가 희미하게 휘어 올라간다.
"보이냐고요?"
재미있어서 짓는 웃음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것 같기도 하다. 화가 난건지 기분이 좋은건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어보인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김형준씨라면 아실 텐데 제가 잘못 생각한 겁니까?"
왠지 모르게 처음 눈이 마주쳤던 순간이 떠오르게 하는 웃음이라 숨이 턱 멎는다.
"아직 말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잠시 비밀을 지켜드리지요."
마치 내 속을 낱낱이 살피는 듯한 말이라 소름이 돋는다.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해보이니 그의 미소가 더 진해진다.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그가 먼저 입을 뗀다.
"김형준씨. 변명이라면 해도 좋지만, 혹여 거짓으로 사실을 숨기려는 거라면 삼가시길."
마치 협박과도 같은 말이라 온몸이 굳어버린다. 최대한 침착을 가장하려 하지
만 그의 말은 가차 없다.
"지금 하시려는 말 그대로 멈추는 게 좋을 겁니다."
경고와도 같은 말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내가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이 굳자 그가 다시 말을 잇는다.
"오해 마십시오. 협박 같은 게 아닙니다. 아직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것 같아서 미리 알려드리는 겁니다."
내가 숨기고자 하는 사실에 대해 경고를 하는 줄 알았더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대는 그가 다시 말한다.
"큭. 정말 연기라면 대단한 연기력이군요."
그가 이제는 소리까지 내서 키득거린다. 곁에 있던 전지현이 다시 대화에 끼어든다.
"모르는건가? 당신 지금 각성 상태 아닌가?"
몸이 차갑게 식는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대수롭지 않게 내 속을 까
발리는 그들의 모습이 인간 같지 않을 지경이다.
"아. 전혀 모르는군."
마음대로 남의 속을 끄집어내고 입에 올리는 그들의 모습에 반감이 고개를 쳐들지만 꾹 내리 누른다.
들지만 꾹 내리 누른다.
"기분 나빠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지금부터 내가 해줄 이야기는 당신한테도 해롭지 않은 이야기일 테니."
거만한 말투지만 의외로 타이르는 듯한 어조라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본다.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언사에 조심하도록 해라. 이제부터 당신이 말하는 것에는 언령이라는 게 생길 테니. 거짓을 말한다면 본신에 좋을 게 없지. 불길한 말을 해댄다면 또 그건 그거대로 불운이 찾아올 테고."
그녀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낸다. 깜짝 놀라 주변을 살펴보니 허준영이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말한다.
"비밀인 것 같아 잠시 주변의 이목을 돌렸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까봐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점점 사람 같지 않은 일을 해대는 그의 태연한 태도에 질릴 정도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차단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이지만 묘할 정도로 이쪽을 신경 쓰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 다시 한 번 입을 떡 벌렸다.
"어쨌건 그녀의 말 대로니 앞으로도 거짓말은 삼가는 게 좋을 겁니다."
안개 속에서 지옥을 겪기 이전이었다면 전혀 알아듣지 못할 말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고 냉큼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바보도 아닌지라 그냥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들의 표정을 보니 내가 숨기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건 아닌 것 같고. 과연 생각대로 그들은 이런 내 태도에 더 이상 꼬치꼬치 묻거나 하진 않는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을 수정했다. 1등급 능력자는 그 강대한 힘만으로 1등급이라는 이름을 딴 게 아닌 듯 하다.
이들은 뭐랄까. 그래. 차라리 인간 같지 않은 초월적인 뭔가가 느껴진다.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식의 말투도 그렇고, 실제로 무서우리만치 속내를 꿰뚫는 그들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그런 여유로움. 아니 그런 것으론 부족하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그런 존재들. 그런 이들이 바로 허준영과 전지현이다.
괜스레 잘못한 것도 없건만 그들과 잠깐 나눈 대화에 벌써부터 등가가 축축할 지경이라 고개를 숙여보이곤 잠시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저 너머의 괴수까지 살피는 듯한 그들의 시선이라 불과 몇 걸음 떨어진다고 해서 그들의 시야를 벗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단지 그들과 더 말을 섞었다간 내 속의 모든 것들이 낱낱이 드러날 것 같아서 잠시 자리를 피했을 뿐.
허준영과 전지현. 단순히 힘만 강대한 이들이 아니었다.
============================ 작품 후기 간신히 몸을 좀 추슬렀습니다. 아직도 몸 상태가 좋은 건 아니지만 다시 글 업
뎃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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