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 겨우 살았다 했더니... -- >
가장 먼저 급변한 상황에 휘말린 건 김수현을 엄호하던 능력자들이었다. 각기 불과 바람을 이용해 촉수들을 베어가던 그들의 머리 깨로 짙은 그림자가 지더니 아름드리 나무만한 촉수가 덮쳐간다.
워낙에 갑작스러운 공격이었던 탓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두 능력자들이 경악성을 내지르다가 튕겨져 나가버린다. 그들의 엄호 아래 마음 놓고 힘을 모으고 있던 김수현이 당황한다. 하지만 흉물스러운 촉수의 움직임에 그대로 노출된 그녀가 이를 악다물고는 그대로 달무리를 던져 버렸다.
나 역시 위기감을 느끼고는 공들여 만든 붉은 원반을 내질렀다. 나를 엄호하고 있던 이들이 그걸 보고 바로 뛰쳐나가 저 멀리 처박힌 남자들에게 달려갔다.
김수현과 나는 몸을 빠르게 뒤로 물리며 거대 해파리에게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붉고 하얀 원반들이 놈에게 맹렬하게 날려든다. 두 개의 굵은 촉수중 하나는 이미 회수하기엔 늦었고 남은 하나가 먼저 하얀 원반을 후려친다. 꾸물거리며 원반을 휘감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썩둑 잘려버린다. 거침없이 거대 해파리에게 달려드는 김수현의 달무리를 뒤 쫓아 붉은 원반이 공기를 찢어발긴다.
가차 없이 거대한 해파리를 가르고 지나가는 달무리에 한번 절단 나고, 다시 내가 던진 붉은 원반에 갈라지고. 온몸을 꿀렁대며 촉수를 휘두른 거대해파리가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다.
거대한 덩치에 비해 허무하리만치 쉽게 쓰러진 놈을 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뭐야. 이거 덩치만 컸지 순 맹탕이잖아.
"이제 끝난 거야?"
좀 전에 거대촉수 공격에 튕겨져 나갔던 남자들이 몸을 털며 일어서고 있다. 충격이 적지 않은 듯 비척대긴 하지만 의외로 멀쩡한 모습이다.
"덩치는 큰데 힘은 4등급 몬스터만도 못한데?"
김수현 역시 거대 해파리의 최후가 허무했는지 중얼거리는 투가 허탈하기 그지없다. 어쨌건 상황이 대충 정리 된 것 같아 능력자들이 서로 간에 통성명을 한다.
달무리 김수현, 바람칼 이영태, 불꽃놀이 김준진을 비롯해 열명은 되 보이는 모든 능력자가 4등급 이상이다. 어쩐지 수월하게 놈을 상대한다 했더니 역시 예상대로 꽤나 등급이 있는 자들이다.
"그나저나 피바라기라면 요즘 스타 아닌가요?"
전투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의 김수현이 농을 걸어온다. 좀 전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자세히 못 본 그녀의 자태가 곱고 나긋나긋하다.
"스타는 개뿔이. 그냥 광대놀음 좀 했죠."
내 말에 입을 가리고 작게 웃는 그녀다. 한때 유니온의 장단에 맞춰 춤을 췄던 과거가 이제는 부끄러울 지경인지라 쓰게 웃어보이곤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제일 먼저 촉수공격에 나가 떨어진 능력자들에게 몸 상태를 물으니 거뜬하다고 익살을 떤다. 들어보니 촉수 공격을 당하기 직전에, 바람칼 이영태가 둘러친 바람의 막 덕에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다.
"덩치만 컸지 이놈 완전 허당이네요. 움직임도 느리고 촉수만 주의하면 4등급 능력자 한둘이면 상대 가능 할 거 같은데요?"
다른 능력자들이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덩치를 빼면 차라리 작은 놈들로 분열되어 있을 때가 상대하기 까다로웠었다. 한 대로 뭉친 덕에 오히려 처리하는 데 수고를 덜었다고 할까. 덕분에 유니온의 지원요청에 죽어라고 달려온 꼴이 우스울 지경이다.
"뒤늦게 달려온 건데 이정도라면 안 왔어도 될 뻔 했네요."
남겨두고 온 일행이 떠올라 투덜대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눈치다. 전투의 긴장이 풀려서인지 다들 편안한 태도로 잡담을 즐기고 있다.
전에 안개에 들어갔던 일이 궁금한지 꼬치꼬치 캐묻는 이들이 많아 조금 곤란하긴 했지만 나로서도 드물게 만나는 고등급 능력자들인지라 성의껏 대답해줬다.
"이무기라니. 엄청 나네요. 저 안은."
"그러게요. D섹터에서도 보기 힘든 놈이잖아요. 그놈."
안개 속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을 열거해주니 그들이 그리 말한다. 그 외에도 많은 놈들이 있었지만 역시 임팩트는 고등급 몬스터만 못하다.
"근데 다른 지역으로 지원 안 가요?"
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투로 이야기를 꺼내니 다들 멀거니 서로를 쳐다본다. 그중 바람칼 이영태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꾸한다.
"유니온 직속 타격대가 움직이고 있던데요? 저도 그쪽에 있다가 근접전이 아닌 건 영 잼병이라 이쪽으로 바로 달려왔죠."
얘기를 들어보니 이들은 일산과 서울 사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능력자들인데 사태가 터지자 급하게 지원을 나온 듯 하다. 그때 함께 움직인 유니온의 타격대와 다른 이능력자들이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다니 우리의 일은 이대로 끝인 것 같았다.
해파리를 처리했다는 보고를 하니 유니온에서 상황 종료를 알려준다. 다른 지역에서도 변이를 일으킨 해파리들 덕에 꽤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했다니 이대로 돌아가도 문제는 없을 것 같다.
다른 이들은 원래 위치로 복귀해야 한다길래 간단하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유니온의 정보에 의하면 대충 정리가 된 것 같지만 일행이 걱정되어 속도를 높였다. 해파리사건으로 인해 군과 유니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름을 제외하고는 밝혀진 것이 없는 저 '천개의 눈동자' 탓에 또다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뭐든 간에 조치를 취하기로 한듯하다.
용모의 말에 의하면 이번에 구성되는 타격대는 전원 4등급 이상의 이능력자들로 구성한다고 한다. 게다가 놀랍게도 1등급의 능력자도 두명이나 참가한다니 유니온이 얼마나 이번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만하다.
우리나라에도 단 여섯명이 있다고 알려진 1등급의 능력자. 전 세계를 뒤져봐도 채 100명이 안 되는 이들이다. 보통 이능력자들이 전술병기라고 한다면 이들은 전략병기로 취급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능력의 소유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두명이나 참가한다니. 거기에 더해 다른 나라에서 지원 온 이능력자들의 전력까지 더해질 예정이라고 한다. 작정했구나. 정말.
"근데 더 놀라운 게 뭔지 알어? 지부장급들도 몇을 제외하고는 전원 참가한데."
용모가 호들갑을 떨며 말한다.
"그 재수 없는 아줌마도 참가해?"
전에 방문했던 서울지부장이라고 밝혔던 여자를 떠올리고는 물으니 용모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근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출혈을 감수한데? 이번 작전 실패하면 완전히 새 되는 거잖아?"
만약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유니온이 입을 피해는 상상도 못할 정도라 그들의 결정이 납득이 가질 않는다.
"글쎄다. 나도 그쪽까지는 선이 닿질 않아서 모르겠다. 어쨌건 이정도 전력이면 해볼만 하지 않겠어? 당장 1등급 이능력자 둘만 해도 어마어마한 전력이라고."
뭔가 뒷사정이 있을 거라 짐작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능구렁이 같은 유니온의 윗분들이 이런 결정을 내렸을 리가 없다.
"그보다 용모 너도 가는 거야?"
내 말에 저쪽에서 한참이나 대답이 없다.
"일단 1차 소집 때 생존자들은 거의 다 소집 될 건가봐. 4등급 이상은 절대 참가라고 들었으니 나도 가야겠지."
푸념 섞인 그의 어투가 넌더리를 낸다. 하긴 그 지옥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진 않겠지.
"꼭 살아남도록 해."
내가 정색을 하고 말하니 용모가 반문한다.
"뭔 소리야. 너도 당연히 소집 대상일 텐데. 이번 일 거부하면 유니온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가만있지 않을 거라던데. 다른 나라 가서 살 거 아니면 선택권 없어."
어쩌면 내가 바라던 계획이 조금 더 앞당겨질 수도 있는 기회라 그냥 수긍한다. 뭐 유니온에서 연락이 온다면야 최대한 튕길 거지만 지금은 일단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만다.
"뭐. 까라면 까. 이건가?"
내 말에 용모가 맞장구를 친다.
"까라면 까야지 우리가. 뭔 힘이 있냐."
각기 2등급에 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개인이라는 한계상 단체를 상대할 수는 없다. 아직은 내 계획도 시작에 불과하고. 그렇게 용모랑 통화한 게 벌써 며칠 전이다. 예상대로 유니온에서 사람을 보내왔고 일전에 개념 없이 나댔던 담당자가 찾아왔다. 쭈뼛거리며 인사를 한 남자가 대뜸 고개부터 숙이더니 사죄를 했다. 통쾌하면서도 씁쓸한 기분에 대충 몇 마디만 하고 돌려보냈더니 민아년이 오랜만에 찾아왔다.
그리고 역시나 작전 참가를 권유한다.
"아. 너 같으면 그 지옥에서 겨우 돌아왔는데 다시 돌아가고 싶겠어?"
일전의 그 침울했던 기색은 어디 갔는지 다시금 냉랭한 얼굴을 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입장도 이해한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신이 납득할만한 보상을 할 예정이다."
등급이 올라간 이후부터 넘치도록 호의를 보이는 유니온의 태도에 입맛이 썼지만 일단 솔깃한 얘기라 바로 반문했다.
"뭔데? 돈이야 아쉬울 거 없고. 뭐 유물이라도 하나 더 얹어준데?"
기대도 않고 물었는데 대뜸 대답하는 민아의 꼴이 정말 유물이라도 더 얹어 줄 듯 하다.
"각기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하긴 하지만 이번 작전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겐 하급이지만 유물을 줄 예정이다. 당신은 서류상으로는 4등급이지만 잠정평가지수가 2등급이니 꽤나 쓸만한 것을 줄 테지."
전혀 의외의 대답이라 잠시 말을 멈췄다가 바로 반문했다.
"유니온이 그렇게 유물이 많았어?"
유물이라는 게 전자제품처럼 시중에 널린 게 아니거늘 이 무슨 되도 않을 떡밥인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유니온의 역사는 이미 천년에 이르른다. 그간 이름이 몇 번 바뀌긴 했지만 그 긴 역사만큼이나 저력도 상당하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저력이 있는 곳이다 유니온은."
민아년의 말에도 나는 코웃음을 쳤다.
"천년이고 나발이고 전 세계적으로 보고된 유물의 수가 만개가 안 넘어. 게다가 우리나라는 그마저도 외국에 다 털렸잖아? 근데 무슨 천년역사 드립이야."
애석하게도 이 힘없는 민족은 일제 강점기니 뭐니의 시기를 거치면서 무수히 많은 유물을 외국에 뺏긴 역사가 있다. 이게 어디 유물뿐이겠냐만은 나라의 환란에도 침묵하던 유니온이 무슨 바람이 불어 이리 출혈을 감수 하는지 의문이다.
"어쨌건 이번 일은 유니온에서 총력을 다 하고 있으니 믿어라. 유니온뿐만이 아니라 군에서도 정부에서도 움직이고 있으니 가급적이면 수락을 하는 게 좋을 거다."
내용만 보면 경고지만 어째 염려가 느껴진다면 내 착각일까?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감정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새롭다.
어차피 수락하기로 진즉부터 마음먹고 있었는데 유물까지 챙겨준다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1등급 능력자도 가고 고위 등급의 능력자들도 대거 투입 된다니 부담도 덜 하고. 전처럼 한 두명이 용 쓸 일도 없을 테지.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민아를 돌려보냈다.
그녀가 가고 나니 머리가 복잡하다. 유니온에서는 왜 이렇게 무리하게 작전을 진행하려는 거지?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 개뿔이. 같지도 않은 소리고. 뭔가 얻는 게 있어야 이런 무리수도 둘 텐데.
대체 이유가 뭘까.
생각과 다른 행보를 보이는 유니온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짐작 가는 바조차 없어 답답한 마음이 더욱 가슴을 짓누른다. 게다가 유물이라니. 원래 미끼가 클수록 노리는 사냥감도 큰 법.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냐.
그렇게 고민 속에서 유니온이 통보한 작전일이 다가온다.
============================ 작품 후기 ============================여전히 상태가 멜롱합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네요. 이제는 어지럽기까지 합니다.
열두시간 뒤에 지방에 일이 있어서 가야 하는데 큰일이네요.
일도 일이고 비축분도 좀 만들어 둬야 지방 가서 업뎃을 할텐데.
걱정이 태산입니다. 어제는 기대도 안 했는데 독자분들의 힘으로 10위로 순위 마감했네요. 감사드릴뿐입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포풍선추코쿠? ㅎㅎㅎ 다들 좋은 주말 보내시고 몸 건강하세요. 한국은 엄청 춥다죠? 감기 조심하시고요.
전투씬이 찔끔 나왔죠. 이제 모든 설정과 떡밥이 나왔으니 다음편? 아니면 다다음편정도부터는 박터지게 전투의 연속입니다. 기대해주세요.
그리고 쪽지로 노블 추천작 말씀해달라고 하신분. 후기로 남깁니다.
자베트님의 '짐승' 생존물인데 시원시원하고 재미집니다. 좀 야하긴 하지만요;;;'퍼스트카운트다운;. 음울유쾌한 글인데 어두운데 경쾌한 전개가 신기한 글입니다.
로유진님의 '메모라이즈', 민영모님의 '네임드' 더 말 할 것도 없이 재미 있고요.
그리고 편수는 별로 없지만 andreana님의 '단향' 재미있더라고요. 여주물 싫어하는데 드라마 보는 느낌으로 잼나게 봤습니다. 역시 편수는 별로 없지만 홍마로님의 '실버문'도 기대중입니다.
에또. 지금 머리가 너무 아퍼서 떠오른 게 없네요몸 좀 쉬었다가 연참 할 수 있으면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오타 지적해주신 demodex님 감사드립니다! 빠른 시일 내에 수정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