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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라기-35화 (35/223)

< --  3. 겨우 살았다 했더니...  -- >

동창회랍시고 나왔더니 처음부터 대뜸 시비라 기분이 팍 상했다. 기훈이가 고개를 저으며 신경 쓰지 말라고 나를 만류한다.

"그보다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실까. 동창생 말고는 참석 불가라고 말했을 텐데."

병신 같은 놈이 나를 몰라보고 지껄이는 꼬락서니가 우습기만 하다. 기훈이도 그 꼴이 우스웠는지 피식 웃고는 술잔을 다시 채운다.

"걔 형준이야. 김 형준. 넌 기억 할지 모르겠네."

기훈이의 말에 희창이 새끼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주변에서 우리가 하는 짓을 알게 모르게 주목하고 있던 이들조차도 웅성거린다.

"엑. 말도 안 돼. 그 땅꼬마 형준이가 쟤야?"

"어쩐지 기훈이 옆에서 그렇게 친한 척을 하더니..."

제 딴에는 소근거린다고 하지만 이능력자인 이 몸에게는 다 들린다. 갑작스레 주변의 이목이 몰리자 기훈이 녀석이 불편한지 희창이를 내쫓는다.

"야. 절로 가서 놀아. 너 때문에 애들이 쳐다보잖아."

기훈이가 마치 파리라도 쫓듯 손을 휘휘 젓는다. 얼굴을 붉힌 희창이놈이 뭐라 말하려다가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는 걸 깨달았는지 선선히 물러섰다.

저 새끼는 고등학생 때랑 변한 게 없네. 여전히 유치하고, 여전히 거들먹거리네. 희창이가 사라지고 기훈이랑 다시 얘기를 나누려는 데 몇몇이 다가선다.

"기훈아 오랜만? 그리고 형준이는 동창회 처음 나왔지? 나 연철이야. 김연철."

낯익은 여자 둘과 남자 셋이다. 예전에도 저렇게 다섯이 몰려다니던 녀석들이라 한명 한명 기억이 난다. 마주 인사를 하니 좁은 자리 틈으로 금세 끼어들어 술잔을 내미는 녀석들이다. 하는 짓이 악의도 없고 귀여워 보여 피식 웃고는 술을 채워준다.

"으아아. 근데 네가 진짜 형준이야? 옛날에는 요만했었는데?"

장난스럽게 손톱을 찔끔해 보이는 여자애가 애교스럽게 웃는다. 심은정이라고 고등학교 때도 꽤나 왈가닥으로 소문 났던 녀석인데 어느새 여자가 되어 저런 웃음을 짓고 있다. 원래부터 이쁘장한 얼굴이긴 했지만 좀 왈가닥이었어야지.

"아하하. 갑자기 키가 한 20센티는 넘게 크더라고."

악의 없는 장난을 웃어 넘기며 말하니 주변에서 우와 하고 감탄을 한다. 각성 이전까지만 해도 키는 160도 채 안 되고, 얼굴은 곰보와도 같았던 나다. 그러니 이들이 이리 신기해 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소란을 떠는데 동창들이 어느새 점점 우리 쪽으로 몰려든다. 그 대부분이 갑자기 딴 사람처럼 변해버린 내게 관심을 표하는 데 기훈이놈도 덩달아 사람들과 즐겁게 얘기를 주고받는다. 나만큼은 아니어도 이 녀석도 거의 탈태환골 했거든.

"이야. 너 진짜 멋있어졌다."

얼굴도 제대로 기억도 안 나는 여자 동창의 말이고 여기 저기서 여자애들이 호들갑을 떨어댄다. 각성 이후로 백옥 같아진 피부며 모델 뺨 날리는 몸매며, 내가 좀 우월하긴 하지. 속으로 한껏 거만을 떨고 있는데 저 멀리 술만 연신 들이키는 희창이 놈이 보인다.

저 놈은 이미 사고로 알려진 내 각성 사건 이후에도 집요하게 내게 추궁을 했던 놈이었지. 내가 눈엣가시일 내가 동창생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으니 속이 쓰린 것 같다.

유치한 놈.

왠지 모르게 승리한 기분에 더욱 신나게 소란을 떨다보니 어느새 1차가 끝나고 2차로 이동할 시간이 됐다.1차지만 술이 약한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뜨고, 남은 이들 중 스무명에 가까운 인원이 참석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동창회의 총무란 희창이 놈이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많이 남을 줄 몰랐던지라 2차 예약을 따로 하질 않았단다.

사람들이 은근히 눈빛으로 질책을 하자 희창이 놈이 여기 저기 전화하는 시늉을 해보는데 별로 신통치 않다.

"어이. 희창. 따로 예약한 데 없으면 내가 가는 데로 가지?"

내 말을 들은 척도 안한 놈이 다시 전화를 걸지만 역시나다. 몇몇 동창들이 다가와 내게 묻는다. 옆에서 열심히 전화를 해대는 희창이를 힐끔 보고는 자리가 있는 가게가 있을 거라고 하니 녀석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자신이 알아보겠다던 희창이 놈은 동창들의 핀잔에 입을 다물고 묵묵히 내 뒤를 따르는 중이다. 내 곁에 서서 이런 저런 일들을 묻는 동창생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묘한 충족감을 느꼈다. 주목받는 학생도 아니었고 교우관계가 좋은 학생도 아니었던 나인데 이런 대우라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어쨋건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동창들이 웅성댄다.

"여기 겁나 비싸 보이는데?"

"야야. 우리 그냥 2차도 그냥 고기 집으로 가자."

빈티지하지만 세련된 외관에 주눅이 들은 동창들이 소란을 떨지만 난 말 없이 가게 문을 열었다.

"야. 애들 말 안 들려? 여기 부담 된다고 다른 데 가자잖아!"

희창이 놈이 좋다고 달려들어서 나를 붙잡는다. 마침 다가온 매니져가 대충 상황을 파악했는지 미소를 짓는다.

"오셨습니까. 사장님."

평소와 다르게 극진한 인사라 어리둥절하지만 난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내 우쭐대기 좋아하는 가벼운 성격을 알거든.

막 내손을 붙들었던 희창이 놈의 표정이 가관이다. 나는 한껏 거들먹거리는 투로 멍하니 있던 동창들에게 말했다.

"뭐해. 들어가자니까. 여기 내 가게야."

그 뒤로는 난리법석이었다. 한 층을 통째로 동창들을 위해 내주고는 그들의 감탄을 즐기고 있다. 눈치 빠른 매니져는 내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인지 수시로 바텐더들을 올려 보내 갖은 쇼를 보여주고 별의 별 것들을 다 보여줬다. 나이가 있지만 이런 웨스턴 바는 처음인 게 분명할 동창들이 넋이 나간 채로 그것들을 구경하고, 그 함성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왔다.

희창이 놈마저도 처음의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고 어느새 내게 달라붙어 감탄을 토해낸다.

캬. 동창회 오기를 잘 했어. 그간의 스트레스가 왠지 모르게 확 풀리는 기분에 술을 연신 들이킨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떠들다보니 또 다시 술 약한 인원들이 떨어져나간다. 이제 남은 인원들은 약 열명 정도. 기훈이와 나를 비롯해 희창이, 심은정 패거리 다섯, 그리고 고등학교 때 퀸카라고 소문났던 이지은과 이름도 기억 안나는 남자애 하나.

노래방 어쩌구 거리며 3차를 물색하던 도중 희창이 놈이 다시 나댄다. 나이 먹고 노래방 가기엔 쪽팔린다며 가라오케를 가자는 희창이 놈의 말에 머뭇거리는 모습들이 돈이 부담되는 모습이다. 희창이 놈이 괜히 나를 쳐다보고는 호기롭게 외쳤다.

"3차는 내가 쏜다!"

아이들의 머뭇거림이 금세 환호로 바뀌고 희창이 놈이 우쭐대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미안. 나는 못가. 다들 재미나게 놀아."

이미 원 없이 놀았던지라 내가 불참을 표하자 희창이 놈의 얼굴이 바싹 구겨졌다.

마침 술도 얼큰하게 올라오는 와중이라 부모님 댁으로 가지 않고 바로 근처의 내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뭔가 후련한 기분에 한참을 키득거렸다. 그 잘난 척 좋아하는 희창이 놈을 완전히 물 먹였으니 기분이 날 듯이 좋다.

게다가 훤칠하게 변한 내 모습을 보고 달라붙는 여자 동창들이 어찌나 많던지 온 몸에 여자 향수 냄새가 진동할 지경이다. 신기하게 내가 이능력자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지. 워낙에 어려서의 소심한 이미지가 강했으니 그저 좀 닮은 동명이인 정도로 생각하는 건지, 어떤건지.

침대에 누워 집에 연락을 하니 엄마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술 먹고 돌아가는 게 더 힘들다고 하니 알았노라 하고 내일 후떡 돌아오란다. 가만히 누워서 잡생각을 하며 키득거리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음을 토해낸다.

'야! 너 가고 분위기 금방 파토 날 판이다! 난 술이 고프다고!'

기훈이 놈의 문자라 피식 웃고 답문을 하려는데 전화기가 울린다. 처음 보는 번호라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받으니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야! 김형준! 나 심은정인데 기훈이가 네 집이 근처라고 하더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든다 했더니 이거였구나.

"어. 근데 좀 나 피곤한데?"

동창회에서 봤으면 됐지 여기까지 그 많은 사람들을 들이고 싶진 않은 터라 곤란하다는 투로 대답했지만 그녀가 알았다고 하고 끊는다. 대체 뭘 알았다는 건지, 좀 술에 취한 거 같았는데 집에나 잘 들어가려나 몰라.

대충 신경 끄고 잠이나 자려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들긴다. 멀쩡한 초인종 두고 두들기는 꼴이 불안했지만 설마 설마 했다.

"하하하. 미안. 은정이가 집 위치 말 안하면 죽는다고 해서..."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하는 기훈이가 은정이의 팔에 목이 감긴 채로 말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돌격하듯 들어온 심은정과 김기훈, 김연철, 이지은, 희창이놈. 그래 다 좋은데 희창이 넌 왜 온거냐. 노골적으로 면박주기에는 희창이 놈의 표정이 참담했던지라 그저 말없이 자리를 권했다. 혼자 사는 집이지만 주방 쪽에 놓인 식탁은 육인용이다. 불청객들이 앉기에 충분한 자리다.

자리에 앉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봉지에서 소주를 잔뜩 꺼내는 심은정이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연철이가 덩달아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이지만 이미 상황은 통제 불능이다.

"안주 없냐?"

기훈이 이놈은 한술 더 뜬다. 가뜩이나 불청객을 끌고 온 게 이놈이라 얄미워 죽겠는데 속 편한 소리를 한다. 냉장고에 잔뜩 붙어있던 배달음식 전단을 몇 개 떼서 기훈이놈에게 주니 머리를 긁적거린다. 제 놈도 미안한 게지.

"너 이 새끼 나중에 보자."

내가 작게 속삭이니 기훈이놈이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인다. 으아. 저 웬수땡이. 딱 보니 은정이 기지배한테 마음이 있어서 헤롱거리다가 휩쓸린 꼴이라 차마 심하게 타박도 못 하겠다. 내가 알기론 모태솔로인 놈이니 어쩌랴.

그나마 다행인 게 열 놈 가까이 되던 동창들이 반절은 떨어져나간 거랄까.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즐기기로 하고 껴들으니 대화가 가관이다.

"그래서 말이야. 희창이 저 놈이 지은이한테 들이대다가 된통 망신 당하고 분위기 뻘줌해져서 파토가 난거라 이 말씀이지."

당사자들을 앞에 두고 하는 말 치고는 거침없는 은정이의 태도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내가 폭소를 터트리자 발끈하고 달려드는 희창이다.

============================ 작품 후기 ============================무한갑질의 시작은 동창회부터입니다. ㅋㅋㅋㅋㅋ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 드립니다. 선작과 추천 코멘트는 글쟁이가 연참하는 원동력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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