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 겨우 살았다 했더니... -- >
"하실 말씀 있으면 지금 하십시오. 앞으로 얼굴 볼 일 없었으면 좋겠으니."
좀 멀리까지 나간 감도 없잖아 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질러 버렸다. 어차피 앞으로도 영영 유니온에게 끌려 다닐 생각은 없으니 크게 잘못된 행동은 아니리라.
한참 기분에 취해 말을 하다 보니 지부장의 표정이 이상하다. 화라도 낼 줄 알았던 그녀의 표정이 더 없이 즐거워 보인다. 뭐지? 이 여자 미친 여잔가?
"용건 더 없으시면 집에서 나가주시죠. 더 이상 대답하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명백한 축객령이건만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점점 짙어진다. 그리고 그녀가 소파에 깊게 파묻었던 몸을 바로 했다.
"아. 그렇게 기분 나빠 말라고. 한번 떠본 거니. 제대로 인사하지. 서울지부의 지부장 신은혜다. 잘 부탁한다."
난데없는 자기소개에 인사라 어안이 벙벙한데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진즉부터 2등급으로 각성했다는 건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힘이 있더라도 비루먹은
개꼴이라면 대우를 해줄 생각이 없었다 뿐이지. 그런 놈은 금세 미국이니 어디로 가버리거든."
그녀가 처음으로 우호적인 미소를 짓는다. 농염한 외모에 어울리는 꽤나 아찔한 미소다.
"좀 전에 방문했던 남자 있지? 꽤 무례하게 군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도 사과하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그녀 탓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런 내 기색을 눈치 챈 그녀가 다시 설명했다.
"말했잖아. 진즉부터 각성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근데 그치들 중에도 운으로 각성한 놈들은 거들먹거리다가 대우 좋은 나라로 가곤 하거든. 당신도 그러지 말란 법 없잖아. 이 정도 기개가 없으면 뭐 우리 쪽에서도 대우 해줄 필요성을 못 느낀달까."
결국은 떠본 거로군.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런 나를 보고 그녀가 다시 사과를 한다.
"멋대로 떠봐서 기분 나뻤다면 다시 사과하지."
생각지도 못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녀다. 꽤나 거만해 보이는 여자였는데 처음에 봤을 때랑은 이미지가 딴판인지라 의외다.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민아를 바라보니 그녀는 웬일인지 어두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 단도직입적인 걸 좋아하는 거 같으니. 바로 본론을 말하지. 당신 유니온에 들어올 생각이 없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다시 지부장을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에 어린 짙은 미소가 보인다.
"그냥 유니온 직속 타격대니 뭐니 이런 걸로 들어오라는 게 아니야. 간부로 초빙하는 거다."
그냥 영입제의도 아니고 간부란다.
"알다시피 2등급 능력자는 우리나라에도 오십 명이 채 안 돼. 당신정도의 힘이면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 그러니 한번 생각해봐."
그녀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용건이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킨 그녀가 나른한 어조로 속삭였다.
"잘 생각해봐. 유니온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한 곳이니까."
마치 유혹이라도 하듯 아찔하게 속삭인 그녀가 그대로 몸을 돌려 집을 나선다. 아직까지 어정쩡하게 남아있던 민아가 그제야 입을 연다.
"형준. 유니온에서는 이번..."
뭔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을 꺼내려던 그녀의 말이 지부장의 부름에 끊긴다.
"윤민아 팀장! 뭘 꾸물 거려!"
그녀답지 않은 태도에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민아가 작게 속삭이고는 자리를 뜬다.
"서울 지부, 조심해라."
마치 경고와도 같은 한마디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의아할 정도의 염려. 저년이 뭘 잘못 먹었나 왜 저래.
대수롭지 않게 그녀의 경고를 받아 넘기곤 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가 몇 번인가 울리다가 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이. 중대장 아저씨."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유니온에서도 더는 연락이 없고, 간간히 희선씨나 용모만이 전화를 줄 뿐이다. 나는 그저 방에서 데굴 데굴 굴러다니며 오랜만의 휴식을 즐기고 있다.
하릴없이 인터넷이며 TV며 잉여로운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동창생 김기훈이다.
"여! 기훈 오랜만이다!"
할 일도 없던 차라 반갑게 전화를 받으니 저쪽에서 대뜸 핀잔이 날아온다.
'야! 넌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영문을 몰라 눈을 꿈벅대는데 저쪽에서 짜증 어린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오늘 동창회라고. 8시까지 홍대역 KFC 앞에서 만나!'
금시초문이었던 이야기라 뭐? 하고 반문하자 기훈이가 한숨을 쉰다.
'희창이가 연락 안했어?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어. 어쨋건 이제 알았으니 꼭 나와!'
갑자기 빈정이 확 상했다. 희창이란 놈은 고등학교 때 반에서 분위기를 좀 주도하던 놈인데 당시에 나랑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관계로 동창회 모임에 나를 일부러 빼먹은 것 같았다.
"야! 내가 이런 대우 받고도 가야겠냐? 싫어 나 안가!"
굳이 홀대 받으면서도 가고 싶은 자리도 아니라 안 간다 하니 기훈이 녀석이 노발대발한다.
'너 이새끼야. 나도 고등학교 때 친구 별로 없었던 거 알지? 내가 놀 사람이 너 밖에 더 있냐! 저번에도 갔다가 뻘줌해 죽는 줄 알았으니 잔말 말고 나와! 이번에도 안 나오면 연 끊는다!'
그러고는 전화가 뚝 끊겼다.
괴수니 희생자니로 나라 분위기가 흉흉하기 그지없는데 갑자기 동창회라니. 조금 어이없지만 M섹터 때문에 모든 일상이 중단되는 것도 우스우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동창회... 동창회... 고등학교까지의 나는 별로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성격도 좀 소심하고 어울리던 친구라고 해봤자 기훈이를 비롯한 몇몇이 다였다. 게다가 각성 시에 일어난 사고 때문에 반 친구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었고. 굳이 가야 하나 싶었지만 오랜만에 기훈이놈 얼굴이라도 볼까 해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덟시까지면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은 건 아니라 바로 준비를 시작했다. 그래도 처음 나가보는 동창회가 조금은 기대가 된다. 당시 조막만 했던 반 친구들이 어떻게 컸는지 어떻게 사는지도 궁금하고. 물론 그 희창이 놈은 빼고.
평소처럼 빈티지한 복장을 입으려다가 다시 옷을 벗는다. 그래. 졸업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린데 너무 없어 보이면 안 되겠지. 근데 생각해보니 부모님 댁에 갑자기 온지라 입을 옷이 별로 없었던지라 딱히 마땅한 옷이 없다. 결국은 벗었던 옷을 다시 주워 입었다.
그래. 옷이 중요한 게 아니야. 마음이 중요한 거야.
좀 찝찝하긴 했지만 딱히 다른 방법도 없던지라 그저 되도 않을 소리로 자기를 납득시킨다. 대충 준비를 마친 나는 홍대로 향했다.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꽤 남았지만 한참 신경 쓰지 못했던 가게에도 들려볼 생각이었다.
오랜만에 가게를 가보니 그날 이후로 거의 세달 가까이 찾지 못했던 터라 감회가 새롭다. 악착같이 돈 모아서 이 가게를 차렸을 때는 그렇게 물고 빨고 했었는데. 이제는 마냥 뒷전이니 역시 사람은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가 다른 법이다.
"어? 사장님?"
입구에 나와 담배를 피고 있던 매니져가 눈을 휘둥그레 하게 뜬다.
"오랜만입니다. 매니져님."
반갑게 인사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오픈준비를 마친 직원들이 전부 곁으로 몰려든다.
"그간 저 없이 잘 지내셨죠?"
매니져와 바텐더들, 그리고 홀 서버들에게 그간의 안부를 물으니 너도 나도 아우성이다. 원체 사이가 좋았던 직원들이기도 하고 또 그간 세상이 워낙 흉흉했으니 호들갑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지나가는 길에 들려본 건데 다들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수고했다고 그간의 수고를 치하하니 내가 이능력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고마운 직원들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개중에는 뉴스를 봤는지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하고 내 몸이 어떤지를 묻는 이들도 있다.
역시 알바생들을 포함해 전원 5년 이상 함께 일한 이들의 가족스러움에 소소한 감동이 밀려왔다. 한참을 호들갑을 떨며 안부를 묻던 직원들이 다시 각자의 자리로 흩어지고 매니져와 둘이 대화를 나눴다.
그간의 월급지출은 어떻게 했는지, 또 매상은 어떤지, 에로사항이 있는지 물으니 별 특이사항 없이 혼자서 알아서 잘 굴린 듯 하다.
마지막으로 수고를 부탁하고 가게를 나서니 벌써 여덟시다. 마침 기훈이 놈이 전화를 해온다.
'야! 어디야! 왜 안와!'
"어. 잠깐 가게에 볼 일 있어서 들렸다 가느라. 나도 지금 홍대야."
'지금 애들 얼추 다 와서 이동 중이야. 너도 그쪽으로 와. 어디냐면 삼겹살 집인데...'
기훈이가 알려준 약속장소로 가니 한창 저녁시간이라 바글바글한 가게의 한 켠에 낯익은 얼굴들이 뭉쳐있다.
가까이 다가서는데 아무도 아는체 하는 이가 없다. 기훈이 놈도 벌써부터 올려둔 고기를 뒤집는데 한창이고. 좀 맥이 빠지는 기분으로 기훈이놈의 곁에 가 앉으니 녀석이 힐끔 나를 쳐다보고 고기를 뒤집는다.
"왔냐? 밥 안 먹었지? 금방 익는다."
언제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것과 같은 태도의 녀석이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기분이 든다. 역시 친구란 이런 거지. 고개를 둘러 주변의 얼굴들을 살피니 고등학생 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있는 몇몇이 보인다. 중간에 몇몇이 눈이 마주치고 나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따로 아는 체를 하는 이는 없다.
동창들이 기억하는 나는 키도 작고, 여드름도 가득한 소심쟁이였을 테니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알아볼 이들은 없으리라. 그저 동창생들이 어떻게 변했나 본 것 정도로 만족하고 기훈이 녀석에게 술잔을 권했다.
"잘 지냈냐?"
여전히 고기 굽기에 한참인 녀석이 건성건성 소주잔을 맞부딪히고 훌쩍 원샷을 한다. 지난 뉴스에 내가 공개 되어 대략적인 상황을 아는 녀석이 안부를 물어온다.
"뭐. 대충 알잖아? 지금 이렇게 멀쩡히 있는 거 보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녀석이 다시 소주를 따라 원샷을 한다. 아까까지만 해도 쾌활하던 녀석이 갑자기 분위기를 잡아대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뉴스 봤다. 그 난리 통에 말려들었다지? 울 엄마도 네 소식 듣고 걱정 많이 하셨다."
녀석의 어머니라면 고등학생 때 한창 찾아가서 진상을 부렸던 전적이 있던지라 뜨끔해서 술잔을 비웠다.
"야이 새끼야. 어쨋건 이렇게 사지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 됐지."
무거운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호들갑스럽게 말하니 녀석이 피식 웃는다.
"그래. 오늘은 간만에 만났으니 진탕 마시자고!"
기훈이와 주거니 받거니 벌써부터 술판을 벌이는데 주위가 시끄러워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뒤늦게 합류한 동창생들이 이제야 도착한 듯 우르르 자리로 몰려왔다.
면면을 보니 역시 낯익은 얼굴들이지만 딱히 친했던 이도 없어서 그냥 무시하고 다시 기훈이와 술잔을 마주했다. 그러고 보면 나나 이녀석이나 참 친구도 없이 둘이서만 어울려 다녔었구나. 당시에는 그런 둘을 보고 사귀네 마네 유치한 놀림감 취급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어엿하게 성인이 되어 멀끔해진 기훈이를 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렇게 우리 둘만의 해후를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곁에 다가온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훤칠한 키, 겉모습만 멀쩡한 희창이놈이다. 무시하고 기훈이랑 이야기에 열중하려는데 녀석이 아는 체를 해온다.
"김 기훈 진짜 오랜만이다! 아. 아니다. 저번 모임에도 나왔었던가? 워낙에 존재감이 없어서 왔는지 안 왔는지 알수가 있어야지."
농담이랍시고 하는 말이 조롱에 다름이 없다. 발끈해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기훈이가 조용히 나를 잡는다.
"야. 오랜만에 친구 만나서 기분 좋으니까 넌 저쪽 가서 니 패거리랑 놀아."
기훈이가 점잖게 타이른다. 아닌 게 아니라 기훈이 녀석 운동이라도 했는지 몸도 탄탄하고 덩치도 있는 편이라 그렇게 말하니 무게감이 느껴진다. 희창이 놈도 그런 기훈이의 위압감에 찔끔했다가는 어느새 주변의 이목이 자신에게 몰려있자 한 번 더 이죽거린다.
"아. 오랜만에 만나니 많이 컸네. 김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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