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이게 뭔 난리야. -- >
"혼자 걸을게요."
찬바람을 쐬었더니 어느 정도 정신이 드는지 희선씨가 품에서 벗어난다. 뭔지 모를 허전함에 입맛을 다신다.
"이제 좀 괜찮아요?"
염려가 가득 담긴 내 말에 그녀의 고운 이마가 찌푸려진다.
"좀 나아지긴 했는데 속은 말이 아니네요."
술 자체가 약한 건지 아니면 오늘 과음을 한 건지 영 고통스럽다는 표정이다. 사실 나도 취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새삼 우리가 마신 술의 양이 적지 않았음을 느꼈다.
"오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영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편의점이라도 다녀왔는지 봉지 한가득 뭔가를 들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엘리베이터만 타면 만나는 게 얘는 엘리베이터에서 먹고 자나 싶을 정도다. 벌써 세 번째 만나는데 그게 다 엘리베이터다.
"어. 지영아. 왜 맨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냐. 혹시 맨날 오빠 기다리고 있는 거 아냐?"
농담 삼아 말했더니 혀를 낼름거리며 장난스럽게 반응한다.
"들켰다. 어떻게 아셨데요?"
헤죽거리며 어린애 같은 웃음을 짓던 지영이가 물끄러미 희선씨를 살펴본다.
"아. 지영아. 희선씨라고 오빠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야."
괜스레 민망해진 내가 지영이에게 희선씨를 소개한다. 사실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만난 사이인 지영이에게 굳이 소개를 시켜줄 필요가 있나 싶지만 워낙에 붙임성 좋은 녀석이라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우와. 이 언니 피부 좀 봐. 진짜 이쁘다. 언니 연예인이에요?"
호들갑을 떨며 희선씨를 살펴보는 녀석의 태도에 희선씨가 어색하게 인사한다. 녀석은 당장이라도 희선씨의 피부를 손으로 만져보기라도 할 듯 손을 들고 움찔거린다.
원래 이런 녀석이었나? 왠지 모르게 맹렬한 모습이라 나조차 당황해버린다.
"히잉. 부럽네요. 나도 언니처럼만 생겼으면 소원이 없겠다."
제법 귀엽게 생긴 지영이지만 희선씨에 비하면 어린아이와도 같은 아이라 스스로 생각해도 희선씨의 미모가 너무 부러운 듯 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까지 희선씨를 뚫어져라 보는 지영이 때문에 희선씨가 곤욕을 치른다.
다행스럽게 곧 내려야 할 층이 되고 작별 인사를 하는데 녀석이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든다.
"오빠. 그리고 이쁜 언니. 둘 다 좋은 시간 되세요!"
희선씨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당돌한 지영이의 한마디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져버린다. 지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기나 할까 모르겠네. 엉뚱한 지영이 녀석 덕분에 집에 들어가서도 둘은 말없이 딴청만 피우고 있다.
그렇게 가만히 있자니 괜스레 잡생각만 든다. 희선씨는 다소곳하게 침대에 앉아 고개만 숙이고 있다.
"아하하.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좀 지저분하죠?"
"아니요. 제 방보다 깨끗한 걸요. 근데 형준씨는 왜 앉지 않고 거기 서 있어요?"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덜어보려고 그녀에게 물었더니 나에게 자리를 권하는 그녀다. 별의 별 생각들이 머릿속에 스쳐간다.
그녀는 왜 하필이면 침대에 앉았을까.
그리고 왜 나에게 앉으라 하는 걸까.
혼자만의 망상에 벌써부터 존슨이 꿈틀거리려 한다.
안 돼! 존슨! 캄 다운! 그녀는 이러려고 온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망상은 깊어지고, 분위기는 점 점 어색해진다. 희선씨도 그런 분위기를 못 견디겠는지 자꾸 말을 걸어오지만 상황은 되려 악화일로다.
두서없이 주절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차라리 마음이 편해진다. 몇 번인가 집으로 여자를 끌어들인 적이 있지만 그녀들이 왔을 때와는 다르게 묘하게 설레임이 인다.
그렇게 마음이 가라앉고 나니 혼자 이 말 저 말 떠들어대는 그녀가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다. 귀까지 붉어진 피부가 한층 더 사랑스럽다.
저런 모습도 나쁘지 않은지라 좀 더 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대로 뒀다가는 도망이라도 칠 기색이라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내가 접근하자 눈에 띌 정도로 몸을 움찔 거리던 그녀가 눈을 질끈 감는다.
이래서야 병원에서 봤을 때하고는 딴판이잖아. 그때는 꽤나 경험이 많은 여자처럼 보이더니. 이래서 여자는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하던가.
"희선씨."
내가 자신을 부르자 고개를 든 그녀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이 놀란 토끼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긴장하고 있지 않아도 되요. 안 잡아먹을 테니 편하게 있어요."
생각 없이 한말이건만 왠지 내뱉고 나니 야하게만 들린다. 그녀 역시 얼굴을 더욱 붉게 만든다. 이래서야 뭐 대화라도 하겠어? 괜스레 이런 상황을 만든 지영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물이라도 좀 마실래요?"
그녀가 탈출구라도 찾은 눈빛으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아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고개를 흔들 때마다 역동적으로 흔들리는 가슴의 존재를. 참으로 훌륭하구만.
시선을 떼기 아쉽지만 일단 물이라도 마셔야 진정이 좀 될 그녀의 모습에 몸을 돌린다. 왠지 손해 본 느낌이라 억울하지만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네준다.
고맙다고 말하고 바로 목을 치켜들고 생수병을 원샷하는 그녀의 모습. 급하게 마시느라 입가로 흘러내리는 한줄기 물방울이 묘한 상상을 불러 일으켰다.
음. 무기로구나. 무기야. 뭘 어떻게 해도 성적 매력이 풀풀 넘치는구나.
이제는 하룻밤 상대가 아닌 인간 김희선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정없이 남심을 흔드는 그녀의 매력에 눈이 즐겁다.
물론 은근슬쩍 몸을 일으키는 존슨 탓에 조금은 곤란하지만.
단번에 생수병을 원샷 한 그녀가 조금은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베시시 웃는다. 몸에 차가운 기운이 돌자 민망함도 가셨는지 예의 그 맑은 미소다.
"좀 괜찮아요?"
"네. 물 마시니까 좀 낫네요."
새삼 그녀가 방을 둘러본다. 이곳저곳을 신기하게 살펴보던 그녀가 입을 오물거린다. 뭐라 할말이 있는 듯 한데 그걸 속으로 곱씹는 모양이다.
"왜요?"
"아. 아니오. 보통 다른 사람의 방은 이렇게 생겼구나 해서요. 유니온의 숙소들은 전부 침대하고 책상 하나가 다라서요. 개인 소지품도 검열이나 제한이 있어서. 남자방인데도 불구하고 제 방에 비해 훨씬 분위기가 좋네요."
아무것도 아닌 척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유니온에서 그들을 어찌 대우하는 지 알 것도 같았다.
빌어먹을 유니온.
능력자들의 유대감이 상당한 데에는 유니온에 대한 반감도 한 몫 했으리라. 그렇다고 해봐야 어쩔 수도 없거니와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으니 그저 애증의 관계라고 할까. 나도 모르게 그녀를 감싸 안는다.
"형준씨?"
영문을 몰라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의 내 마음에 충실하겠다.
"희선씨. 갑작스럽겠지만. 유니온 나올래요? 지낼 곳 없으면 여기 있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그녀의 몸이 움찔거린다.
"갑자기 왜 그래요?"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그녀가 가엾기만 하다. 내가 어찌 남의 인생을 평가하겠냐마는 유니온의 충실한 하수인으로 평생을 살게 될 그녀의 운명에 진심으로 동정한다.
"저. 뭔가 오해가 있는가본데. 저 괜찮아요. 유니온의 대우도 나쁘지 않고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어조가 도리어 유니온의 편을 든다. 제길. 유니온 소속의 능력자들은 한결 같지. 어려서부터 유니온의 정신교육에 세뇌라도 됐는지 한결 같이 사명감과 소속감에 불타는 인물들.
그녀 역시 그런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하다.
"형준씨? 갑자기 왜 그러는 지 모르지만 저 당황스러워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차갑게 식는다. 술기운 탓인지 갑작스럽게 감정이 폭주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이 괜찮다 말하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더 말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우린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그녀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리고 그토록 격렬했던 감정을 대신해서 민망함이 고개를 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멀리 갔나싶다.
"그냥. 나중에라도 생각해보라고요."
무안한 마음에 대충 변명을 하니 그녀가 나를 떼어낸다. 나를 바라보는 맑고 올곧은 눈에 민망함이 배가 된다.
"기뻐요."
쌩뚱 맞은 그녀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가만 보니 뺨이 묘하게 붉고 눈빛도 심상치 않다. 이건 또 무슨 상황?
"갑작스럽지만 저 싫지 않아요. 형준씨가 저를 그렇게나 생각해주다니. 너무 기쁘네요.
저도 이런 감정 처음이라 뭐라 말씀 드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제안해주니 너무 고마워요.
"잠깐. 이 아가씨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당황스러운 심정도 모르고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아. 저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거 꿈꿔왔어요. TV나 영화를 보면 그런 거 볼 때마다 되게 부러웠거든요. 나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늘 소망했죠. 근데 형준씨가 그렇게 말해주니 저 되게 행복해요."
아니. 이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영문을 알 수 없다. 그녀는 지금 내 말을 오해한 듯 했다. 유니온의 하수인으로 사는 그녀에 대한 내 안쓰러움이 언제 이런 사랑으로 바뀌었지? 물론 나도 그녀가 좋은 여자라는 걸 알고 충분히 호감이 있지만 마치 그녀는 결혼에 대해서 얘기라도 하는 듯 하지 않은가!
"그래도 바로 대답은 할 수 없으니 잠시 생각 할 시간을 줘요."
얼이 빠져버린 나를 두고 그녀가 멋대로 결론까지 내 버린다.
그리고는 대담하게도 내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다. 눈까지 감고 살짝 내민 도톰한 입술을 보며 나는 그저 당황할 뿐이다.
그리고 입술을 통해 전해져오는 촉촉하면서 보드라운 감촉. 무의식중에 그녀를 받아들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다.
물론 그런 고민도 잠시 이내 입술을 열고 그녀를 거칠게 탐하기 시작한다. 언뜻 남자는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내 혀가 갑작스럽게 자신의 입술을 비집고 들어서자 희선씨가 놀란 듯 힉하는 소리를 낸다. 설마 첫키스는 아니겠지?
============================ 작품 후기 ============================쩝. 다음 편에는 빼도박도 못하게 붕가붕가씬이겠네요.
다소 수위가 있을 예정이니 혹여 그런 것에 거부감이 느껴지시는 분들은 스킵해주세요.
여러분의 선추코가 다음 편이 얼마나 불타오르는지를 결정하겠지요. 흐흐흐흐불타는 다음화를 기대하신다면 다 같이 선! 추! 코!
그리고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쿠폰을 주신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 전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