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 이게 뭔 난리야. -- >
"데이트죠. 전에도 말했잖아요. 관심 있다고."
단도직입적인 그녀의 말에 순간 당황해버렸다. 장난기 하나 없이 말하는 그녀의 입매는 보기 좋게 올라가 있지만 어조는 진지하기 그지없다. 몇 번이나 봤다고 벌써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실까. 조금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보기 드문 미인의 이런 태도가 마냥 싫지만은 않다.
"기분 좋네요. 이런 미인의 호의라서."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니 그녀가 마주 웃어온다. 그때 마침 주문한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전채부터 시작해서 줄줄이 나오는 음식은 한정식이라기보다는 퓨젼 코스요리에 가깝다.
맛도 일품이었던지라 그녀와 나는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워낙에 요리가 끊임없이 나왔던 탓에 식사가 끝났을 때는 벌써 오후 네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원채 늦은 점심이기도 했거니와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식사가 끝난 우리는 극장으로 향했다. 마침 대화중에 영화이야기가 나와서 내친김에
같이 영화까지 보기로 했다. 즉흥적인 일정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학생 때로 돌아가 여자친구라도 만나는 기분이라 기분이 묘하다.
설레이면서도 어딘가 간질거리는 느낌?
좌석의 팔걸이에 올린 내 팔뚝이 그녀의 손과 마주 닿아있다. 팔짱도 꼈던 사이에 별 것 아닌 스킨쉽이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콩콩 뛴다.
오오! 김형준! 이게 왠 주책이냐!
바로 좀 전까지만 해도 희선씨에 대한 생각은 단지 이쁜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조금 미묘하다. 성적 호기심보다 인간적인 호감이 더 든다고 할까. 그녀는 그만큼 매력적인 여성이다.
어느새 영화는 감동적으로 결말이 나고 우리는 극장을 빠져나간다.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술집을 찾는다. 근처의 적당한 술집에 들어간 우리는 또 다시 대화에 몰두한다.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고 하루만에 이만큼이나 감정을 싹 틔운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 다행스럽게도 나 혼자만의 감정은 아닌지 이따금씩 보내는 그녀의 미소가 따뜻하기만 하다.
"처음에는 간호산줄 알았다니까요."
처음 병원에서 만난 일을 이야기 하니 그녀가 깔깔거린다.
"그냥 알려드릴까도 했는데 기왕 간호복 입은 거 장난 좀 쳐봤어요. 남자들의 로망이라면서요? 간호사, 스튜어디스, 메이드가?"
"음. 간호사가 최고지요 개인적으로. 흐흐흐. 희선씨 다음에 만날 때 한번만 더 입어주시면. 흐흐흐흐."
"형준씨 변태 같아요!"
능글맞게 웃으며 손바닥을 싹싹 비벼댄다. 그녀가 장난스럽게 나를 나무란다. 술이 한잔 돌고, 두잔 돌고.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발그레 해진다. 나 역시 잔뜩 붉어진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슬슬 깊은 이야기들이 화제로 나오고 있다. 희선씨는 취기가 상당한지 주절주절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있다. 술주정이라면 사양하지만 그녀의 진솔한 이야기에 그저 귀를 기울였다.
그늘 없는 모습에 비해 그녀의 삶도 마냥 순탄치는 않았던지라 가슴이 짠하다.
"그래서 전 가족적인 장면을 보면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담담하게 이야기 하는 모습이 더욱 가슴에 파고든다. 유니온이 모집한 고아 이능력자들 중 하나인 그녀는 어려서부터 유니온의 통제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덕분에 사람이 그리운 그녀지만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아 속상하던 차에 나를 만났단다.
"뭐 온몸이 붕대로 감긴 꼴이라 조금 웃겼지만 왠지 모르게 형준씨가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녀의 눈매가 깊어진다. 선량하고 따뜻한 그녀의 눈빛을 보고 있자니 내 입가가 절로 치켜올라갔다.
"저도 희선씨가 좋습니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마디, 그 뜬금없는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뜬다. 그리고 이내 보기 좋게 반달을 그리는 그녀의 눈매. 웃음 하나만으로도 넘치도록 매력적인 여자다.
"고마워요. 저도 형준씨가 좋아요."
숨기지 않고 막바로 부딪혀 오는 저 진심이 좋았다. 지금 술자리에서 끝날 한순간의 진실일지라도 지금의 나는 그녀가 좋다.
테이블에 올라와있는 그녀의 손을 잡는다. 피하지 않고 손바닥을 뒤집어 마주 잡아오는 그녀의 손길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말없이 주고받는 시선에 따뜻함이 흘러넘친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던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린다.
"꺄하하하. 왠지 민망하네요."
그녀의 웃음기 가득한 말에 나도 쾌활하게 대꾸했다.
"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네요"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이능력을 각성하면서 누군가를 마음에 품어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내려고 애써봐도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즐기는 상대들만이 이었을 뿐.
"약간 손해 보는 느낌이네요. 형준씨는 왠지 사람도 많이 만나보고 경험도 많은 거 같아서."
짐짓 토라진 투로 말하는 그녀가 사랑스럽다. 병원에서의 봤을 때는 경험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원체 쾌활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그렇게 보였다 뿐이지 사실 그녀는 사회 경험이나 그런 게 많지 않은 듯 하다.
"뭐,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가슴이 이렇게 간질거리는 느낌은 처음이네요."
다소 노골적이고 손발 오그라드는 말에 스스로의 얼굴에 열기가 느껴진다. 말 하고 바로 민망함에 후회하는 나와는 다르게 그녀의 미소가 짙어진다.
술이 몇 순배 더 돌고, 이제는 그녀나 나나 취기가 눈에 보일 정도다. 서로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안주삼아 시끄럽게 웃고 떠든다.
한참을 그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내 눈에 그녀의 가슴이 들어온다. 깊게 파인 V넥 티셔츠가 보기 좋은 그녀의 몸매를 드러낸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그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는지 그녀가 손으로 가슴을 가린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보니 싫은 표정이라기보다는 부끄러워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너무 뚫어져라 보는 거 아니에요?"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장난스럽게 이야기 하는 그녀의 어조가 파르르 떨려온다.
"하하하. 남자의 본능인데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내 태도에 그녀가 다시 토라진 얼굴을 해보였다.
"역시. 경험도 많아 보이고 왠지 손해 보는 기분이야."
애교스러운 그녀의 투정에 웃음이 나왔다. 얼마나 그렇게 더 즐거운 분위기를 즐겼을까. 이제는 나 스스로도 취기가 부담스러울 판이다. 얼핏 보니 희선씨 역시 눈이 잔뜩 풀려있는 게 만취 한 것 같다.
꾸벅꾸벅 졸다가 이야기 하다가 정신없어 보이는 그녀를 자리에서 일으켰다.
"희선씨. 이제 들어가죠.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부축했다. 역시 예상대로 그녀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계산대에 어찌 어찌 그녀를 끌고 가 돈을 지불하는데 알바놈의 눈빛이 기분 나쁘다.
마치 일부러 여자를 취하게 한 양아치라도 보는 눈빛이라 울컥했다. 그 음흉한 얼굴에 한마디 해 주고 싶지만 그것도 또 꼴불견인지라 서둘러 술집을 빠져나왔다.
찬바람을 쐬면 조금 낫지 싶어 그녀를 맞은 편의 공원 벤치에 앉혀 놓고 바로 건너편의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갔다. 물과 숙취 해소제 따위를 산 나는 부리나케 희선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혹시나 했더니 그새 쓸데없는 양아치들이 꼬여있다.
자리를 비운지 얼마 안 된지라 지금은 근처를 알짱거릴 뿐인 놈들이지만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내가 그녀의 곁에 앉아 물을 챙겨 먹이자 그치들이 곧 어슬렁거리며 물러난다.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이쪽을 살펴보는 게 정말 질이 안 좋아 보인다.
그래봐야 지들이 어쩌겠어. 귀찮게 굴면 아작 내주면 그만.
어차피 평범한 일반인은 몇이 덤비던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지금은 취해있는 희선씨조차도 정신만 말짱하다면 저딴 양아치들은 단박에 때려눕힐 수 있다. 어딜 넘봐. 넘보기를.
물을 마시고 한참을 멍하니 있던 그녀가 조금은 정신이 드는지 입을 열었다.
"형준씨? 속이 너무 울렁거려요."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 그녀가 마치 아이와 같다. 그 무방비하고 선량한 모습에 왠지 혼자 감동한다. 이토록 순수한 사람이라니.
잠시나마 삿된 마음을 가졌던 나를 자책하며 그녀를 일으켰다. 비틀거리긴 하지만 스스로의 몸을 어느 정도나마 가눈다.
"희선씨. 집이 어디에요! 데려다 줄 테니. 말해 봐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푹 수그린다. 갑자기 풀이 죽어버린 모습이라 당황스럽다.
"집 없어요. 유니온이 집이에요. 유니온 서울 지부로 가주세요..."
외롭다는 감정이 절절하게 전해져오는 말투인지라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녀가 고아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잠시 갈등 한다. 지금의 내 선택이 술김에 하는 충동적인 결정일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희선씨. 저희 집으로 갈래요?"
이대로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다. 그녀가 그 삭막한 장소로 돌아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이라 가슴이 아릿아릿하다.
"정말요? 그래도 돼요?"
혹시 내 말뜻을 곡해할까봐 염려했는데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되겠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 떠오른 것은 오직 순수한 기쁨.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가 새로운 주인이라도 만난 듯 그 열렬하고 맹목적인 감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데 그녀가 내게 안겨온다.
온기와 온기의 기분 좋은 맞닿음. 그 따뜻한 감촉에 한창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전의 양아치들이 나타난다.
"여어! 그림 좋은데!"
어쩌면 고전적인 불량배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대사를 치는 그들. 어디선가 양아치 교습소에서 기본 멘트에 대한 걸 교육시키는 게 아닐까. 어쩌면 저렇게 하나같이 몰 개성한지.
"형이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봐줄 테니 썩 물럿거라 아그들아."
아직까지 상황도 모르고 내게 얼굴을 파묻은 그녀 탓에 조용히 양아치들을 타일렀다. 하지만 말로 설득이 될 놈들이라면 양아치가 아니지.
"이 색퀴가 미쳤나. 어디서 허세질이야!"
역시나 격하게 반응을 해 오는 놈들이다.
"희선씨. 잠깐만 있어봐요."
자꾸 품을 파고드는 그녀를 떼어내어 벽에 기대 세워두고는 양아치들 앞에 나섰다. 어차피 말도 통할 인사들 같진 않아서 바로 행동에 옮긴다.
"형씨. 우리가 누군... 악!"
한참 주둥이를 나불거리던 놈 하나를 그대로 날려버리고는 주변에 늘어선 놈들에게 핵펀치를 한방씩 먹여준다. 어차피 시답잖은 놈들의 으름장을 들어주다가 결국은 이리 될 것. 순서를 몇 개 생략했을 뿐, 순리대로 따른 내 행동에 놈들이 바닥에 널부러져 죽겠다고 아우성을 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희선씨의 어깨를 감싸 안고 집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오늘은 연애질만 한 가득이네요. 지루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곧 피딱지가 마르지 않는 액션의 세계로 갈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선추코는 글쟁이를 연참하게 하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