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이게 웬 날벼락인 줄 알았더니! -- >
'왜 이렇게 연락을 안 받는가! 한참이나 찾았지 않나!'
대뜸 언성을 높이는 그녀의 태도가 평소와 달리 급박하다. 여유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그 어조에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치고 전화를 받는다.'지금 있는 곳에서 서둘러 벗어나라. 그쪽에서 왜곡의 조각이 활성화됐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당장 그곳을 벗어나라'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왜곡의 조각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D섹터에서도 깊은 곳에서 간혹 발견 되는 그것은 왜곡된 의지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물리법칙을 뒤틀어버리는 그것. 그게 왜 D섹터도 아닌 곳에?
의문을 표하자 윤민아 그녀가 강압적으로 대꾸한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일단 자리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정문을 나와서 나온 방향 그대로 200미터가량 가면 유니온에서 파견 나온 이들이 있을 거다. 합류한 뒤에 다시 연락하지.'
그녀의 지시대로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희선씨를 깨우려다가 문득 의문이 든다.
"민간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 질문에 대답이 들려온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침통한 음성의 그녀는 서두를 것만을 지시하고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일단 왜곡의 조각은 능력자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로 알려졌으니 병원 내의 능력자들이 철수하는 게 우선이다.'
자신을 흔드는 손길에 희선씨가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뭐에요? 뭐 추가 지시라도 내려 온 거에요?"
한가롭게 기지개를 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니 그녀가 소파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서둘러요!"
자면서 침이라도 흘렸는지 입가를 쓱 문지른 그녀가 내 손을 잡고 이끈다. 과연 유니온 직속의 이능력자라 그런지 지시에 즉각적으로 따르는 모습이다.
이미 진즉에 환복을 마친 후였기 때문에 나또한 서둘러 그녀를 따라 나선다. 나가는 길에 복도에서 마주친 간호사나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그대로 비상구를 통해 병원을 빠져나간다.
희선씨가 있으니 헤맬 일도 없이 최단코스로 병원의 정문에 다다르는데 문득 위화감이 든다. 스물스물대며 등골을 오르내리는 벌레들의 행진이라도 있는 냥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마치 D섹터에서나 느껴봤던 그 끈적끈적한 느낌.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는데 희선씨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이.. 이게 뭐죠?"
비전투계열의 이능력자인 그녀는 D섹터에 들어가 본 경험이 없는지 이 음울한 기운에 당혹스러워한다. 밝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이 혼란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진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로비를 오가던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보고 있다.
제길.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늦었나.
이제 막연한 정도를 떠나 점차 실체화 되는 왜곡을 느끼며 이를 악문다.
"희선씨. 이대로 나가서 그대로 쭉 가요. 200미터만 가면 유니온에서 파견 나온 이들이 있을 겁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하게 퍼져가는 왜곡의 향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잡고 흔들었다.
"희선씨. 정신 똑바로 차려요! 이대로 나가서 쭉 달리는 겁니다! 도와줄 사람들이 있을 테니 가서 상황을 설명해요!"
몇 번인가 거칠게 흔들었더니 그제야 초점이 돌아온 눈동자를 한 그녀가 물었다.
"형준씨는요?"
겁에 질렸지만 염려 가득한 그 음성에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톱을 세워 팔뚝을 그었다.
제길. 회복된지 얼마나 됐다고.
점차 유형화되는 이능 '피바라기' 속에서 나는 그녀를 다시 한 번 떠민다.
"가요! 어서!"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꺄악! 괴물이야!"
갑작스럽게 등장한 내 모습에 괴물이니 뭐니 소리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 평생을 시달려왔던 트라우마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던 그녀가 마침내 저 바깥으로 사라지고 나서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나 될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병원. 이대로 나마저 벗어난다면 얼마나 피해가 생길지 모른다.
왜곡의 의지가 발현됐다는 건 곧 병원 자체가 D섹터와 동기화 된다는 것. 뭐가 나와도 나올 것이다.
이능력자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왜곡의 의지. 원래대로라면 유니온의 지시대로 병원을 벗어나는 게 맞겠지만 벌써부터 이렇게나 진하게 풍겨오는 기운을 보면 이미 늦었음을 알 수 있었다.
실체화된 피의 갑옷을 두르고 있자니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매스컴을 통해 질리도록 공개됐을 모습이지만 현장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 듯 했다.
괴물이니 뭐니 비명 속에 섞인 갖은 폭언들. 붉은 투구 안의 내 표정은 아마 잔뜩 일그러져 있으리라. 마음을 다잡고 병원의 로비를 이리저리 쏘다닌다. 조금이라도 왜곡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방향을 찾으려 해보지만 소용없다. 일반인보다 몇 배는 뛰어난 감각도 별반 기능을 하지 못한다. 마치 안개 속에라도 들어선 듯 답답하기만 할 뿐.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음울한 기운에 감각이 둔해진 탓이다.
결국 몸으로 뛰는 수밖에 없나.
일단 1층부터 훑어봐야겠다 싶어 자리를 이동하려는데 겁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 탓에 정신이 산만하다. 투구 부분이라도 실체화를 해제할까 싶지만 그런다고 딱히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질 것 같진 않아 그만둔다.
어슬렁거리며 병원을 해매고 다니기를 잠깐, 둔감해진 감각너머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진다. 사이하고 괴기스러운 기운은 금세 희미해지다가 사라진다.
방향조차 가늠할 틈도 없이 사라져버린 기운 탓에 당황하는 찰나, 주변의 공기가 바뀐다.
공기에도 무게라는 게 있다면 한층 무거워졌다고 할까. 마치 뜨겁게 달궈진 사우나에 막 들어섰을 때처럼 숨통이 막혀온다.
"꺄아아악!"
그리고 때 마침 들려오는 비명소리. 방향을 가늠하여 바로 내달린다. 강화된 신체와 한껏 고조된 이능 탓에 복도가 쑥쑥 뒤로 밀려갔다.
그리고 도착한 현장은 참혹 그 자체였다. 사방이 붉다. 마치 처음부터 붉었던 것처럼 벽이니 바닥이니 붉은 액체로 가득하다. 그 사이 사이 보이는 머리카락과 살점의 조각들이 액체의 정체가 피라 말한다.
침음성이 잇새로 비어져 나온다. 온 사방에 가득한 육편, 그리고 비릿한 혈향. 범인은 그 짧은 시간에 자리를 벗어났는지 그 어떤 조짐조차 발견할 수 없다.
악다물어진 이빨이 까드득 거리는 소리를 낸다.
"제기랄!"
미처 막지 못한 참사의 현장에서 나는 분노에 몸을 떤다.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생명의 소중함? 그딴 거 모른다. 그저 내 눈앞에서 벌어진 참사에 치가 떨릴 뿐.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죽음에 무력감을 느낀다.
전신의 힘을 개방하고 끌어올린다. 만약 지능이 있는 놈이라면 내 기운을 느끼고 행동을 조심하리라. 이처럼 쉽게 사람들을 해치진 못하겠지. 반대로 나보다 강대한 기운을 가진 놈이라면 에너지 넘치는 먹잇감을 두고 다른 엉뚱한 곳으로 가진 않으리라.
힘을 최대로 끌어올린 채로 병원을 나섰다. 정문 바로 앞에 마련된 널따란 주차장에 서서 병원을 노려본다. 만약 싸움이 일어난다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병원 안에서보다는 이곳이 낫겠지.
당장 병원을 벗어나자 둔해졌던 감각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숨통을 조이던 무거운 공기가 사라진다.
동기화의 영역은 저기까지인가.
거리를 가늠해보고 있는데 문득 기분 나쁜 시선이 느껴진다. 그 끈적거리는 시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드니 5층의 병실로 보이는 곳에 이질적인 존재가 나를 살펴보고 있다.
커튼 뒤에 숨어 고개만 내놓은 채 나를 관찰하는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커튼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만으로도 이미 구역질이 날것만 같은 형태다. 그런 놈이 마치 도깨비와 같은 얼굴로 나를 살피고 있다.
아마. 내가 만만한 먹잇감인지, 또 먹음직스러운 지 궁리하는 거겠지.
눈동자만을 움직여 놈의 행동을 살폈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놈이 도망가기라도 해선 피해가 커질 뿐이다.
제길. 유니온은 아직인가.
빠르게 경고를 해줬던 것에 비하면 늦장대응이나 다름없는 유니온의 행태에 속으로 욕을 해댄다. 당신들의 존재 이유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니었나?
속으로 유니온을 욕하고 있는데 놈이 사라졌다.
지원을 기다렸다가 조금 수월하게 놈을 처리하려 했던 계획이 어그러져버렸다. 나는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가 튀어 올랐다.
일단 부딪혀보자!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한 폭음이 터져나가고 몸이 붕 떠오른다. 놈이 숨어있던 병실의 창문이 가까워지고 곧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창이 터져나간다.
제길. 여기도냐.
늘어선 네 개의 침대는 주인의 것으로 짐작되는 피와 살점들로 잔뜩 더럽혀져있다. 좀 전에 보았던 현장과 다를 바 없는 참혹한 모습인지라 와락 얼굴이 일그러진다.
취향 한번 더럽구나. 반드시 잡아서 족쳐주겠어.
지금은 당장 놈의 위치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박살이 난 병실문을 지나 복도로 나가보니 복도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다. 마치 지옥으로 통하는 입구라도 되는 냥 피와 육편으로 가득한 모습이다. 그리고 복도 저 끝에 놈이 서 있다. ============================ 작품 후기 ============================우아! 선작과 조회수가 어마어마하게 붙는군요. 이것이 바로 로유진님의 추천이 주는 효과인가요. 과연 인기작가분은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 하군요!
독자분들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재미없다는 분도 있으신 듯하고 글이 마음에 안 드시는 분도 계신 듯 합니다.
그저 흥미위주의 글이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편하게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도저히 못 보겠다 싶으면.... 그저 죄송할 뿐입지요.
어쨋건 읽어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연참 들어갈게요! 다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