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이게 웬 날벼락인 줄 알았더니! -- >
잠결에 시끄럽게 울리는 알림음에 눈을 뜬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뒤집어버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 새벽에 누구야.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데 이번엔 병실의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김형준씨! 비상입니다!"
다급한 음성과 함께 들어온 이는 '치유하는 손' 김희선이다. 워낙에 급박해 보였던지라 잠이 순식간에 달아난다.
"유니온 소속 이능력자들 전원 2급 경계태세입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워낙에 갑작스러웠던 일인지라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하기만 하다. 내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속사포처럼 입을 놀리며 내 가슴팍에 손을 얹는다.
"자세한 사정은 하달되지 않았지만, 유니온 각 지부도 비상인거 같아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내 가슴위에 얹어진 그녀의 하얀 손에 빛이 멍울지기 시작한다. 백색으로 발광하는 빛이 점차 커지다가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전신을 휘감는 청량한 느낌과 함께 온몸에 활력이 넘친다.
그녀의 이능 치유가 발동된 듯 하다. 전에도 몇 번인가 치유계열 이능력자에게 치료를 받아본 적이 있지만 신기한 건 매한가지. 감각이 없던 팔과 다리에 감각이 돌아오고, 온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이다.
다른 능력자들과는 다르게 꽤나 즉각적인 효과라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고운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하다.
"유니온에서 4등급 이상의 전투계열 능력자들은 따로 소집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도 따로 연락이 왔는데 당장 김형준씨를 전투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보내랍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작은 일은 아닌 거 같네요."
별다른 집중이 필요한 능력은 아닌지 그녀가 이능을 발현하는 와중에도 설명을 한다. 꽤나 버거워 보이지만 그녀는 유니온 직속의 능력자. 그만큼 유니온의 사정이 급박하다는 거겠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지 않나요?"
워낙에 호들갑스러운 모양새라 물어보니 그녀가 고개를 도리질 친다.
"저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요. 다만 전국에서 이상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는 말밖에는 듣지 못했어요. 정확한 내막은 곧 다시 공지가 내려오겠죠."
초반의 다급한 모습에 비하면 한결 여유로운 모습이지만 여전히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잠시 치유의 이능이 주는 청량감을 즐기고 나니, 점점 빛이 사그라든다. 그리고 그녀가 가슴팍에 올려두었던 손을 치웠다.
"워낙에 재생력이 강한 신체라 생각보다 더 깔끔하게 치유가 됐네요."
온몸이 땀에 절은 그녀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음성으로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온몸에 활력이 넘쳐나는 게 오히려 부상 전보다 힘이 넘친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온몽의 붕대며 깁스를 풀러 가는데 흉 하나 없이 완벽하게 치유가 된 모습에 감탄이 절로 인다.
이정도면 5등급의 능력이 아니겠는데?
새삼 감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데, 잠깐 이능을 발현한 것 치고는 굉장히 지쳐 보인다.
"제 이능은 피드백이 좀 심해요. 꽤 쓸 만하지만 중상자는 한명이 고작입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이능의 발현 대가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보자니 더 이상의 이능 발현은 힘들 것 같다.
"좀 나와봐요. 눕게."
침대에 걸터 앉아있던 나를 밀치며 그녀가 침대 위에 몸을 던진다.
"아. 진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네요. 잠시 이대로 쉴게요."
황당하게도 환자의 침대를 강탈한 간호사복장의 그녀, 물론 진짜 간호사는 아니지만. 여튼 그런 그녀가 침대에 누워 있으니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음. 남자의 로망인데?
심각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실감이 그다지 가지 않는 관계로 잠시 쓸데없는 망상을 하며 헤죽거리던 나는, 그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고마워요."
무안한 탓에 뒤늦어버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피로가 가득한 그녀의 눈이 보기 좋게 휘어오른다.
"아래쪽도 건강해진 것 같군요. 킥."
그녀의 말에 하반신을 보니, 얇은 재질의 환자복 안쪽에 잔뜩 성이 난 존슨이 보인다. 으악! 이게 웬 주책이야!
연신 키득거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는 그녀를 피해 몸을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붉어진 얼굴로 딴청을 피우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연다.
"그것도 제 이능의 피드백 중 하나에요. 킥."
활기라는 게 그저 느낌만이 아니었구만. 거 참 민망한 능력일세. 어찌 됐건 간호사복을 입은 그녀가 침대에서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지라 그 뒤로도 내 존슨은 한참이나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된 건 그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어느 정도 이능의 대가가 상쇄됐는지 기운을 차린 그녀와, 간신히 존슨이 진정된 나는 소파에 앉아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몇번의 공지와 지령이 더 내려온 뒤로 유니온에서 별도의 지시는 없었다. 일단 대기하라는 명령도 특정장소를 명시한 게 아니라 그저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야밤에 떨어진 경계령이 당혹스러운 탓에 호들갑을 떨었던 것도 잠시 그녀와 나는 시시껄렁한 대화를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다.
"바텐더를 하면서 가장 쪽팔릴 때가 언젠 줄 아세요?"
시덥지 않은 유머를 던져본다.
"언젠데요?"
그녀는 역시나 열렬히 리액션을 취해준다.
"손님이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서 김형준이라고 대답했는데, 칵테일 이름이요. 할때요."
썰렁한 이야기지만 내 이야기에 그녀가 배꼽을 잡고 웃어댄다.
"꺄하하하하! 그게 뭐에요!"
뭐 대충 이런 식이다.
대체 왜 새벽에 그렇게 공지를 때려댔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그 뒤로는 연락이 없는 유니온이다. 뭐 덕분에 미녀와 야밤의 데이트를 즐기고 있지만.
그녀는 밝고 유쾌하며 유머까지 있는 여자다. 다른 여성능력자처럼 쓸데없는 피해의식이나 그런 것도 없다. 치유관련 이능력이라 전투에 참여할 일도 별로 없어서인지 성격도 음울하지 않고.
'여성능력자는 성격이 드세다.'
라는 내 편견을 날려준 그녀를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직도 채 마르지 않은 땀 탓에 딱 달라붙은 간호복. 여전히 존슨의 웅심을 불러일으키는 자태다.
한참 얘기 중에 보낸 내 눈빛을 눈치 챘는지 그녀가 다시 예의 그 아찔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왜 그렇게 봐요? 같은 이능력자들 끼리는 가족 같다면서요? 지금 그 눈빛은 가족을 보는 눈빛이 아닌데."
놀리듯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아. 편견이라는 것은 사람의 선택에 이다지도 장애를 주는구나.
"흠. 제가 뭘 어쨋다고요. 이렇게 순수한 눈빛이구만?"
능청스럽게 대꾸하자 그녀가 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그늘 한구석 없이 밝은 아가씨다.
태생적인 이유든, 전투의 후유증이든. 우리 능력자들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가 보이지 않는 특이한 아가씨다.
"그래서 가게가 어디라고요?"
내가 운영하는 가게에 한번 놀러오라고 했더니 눈을 빛낸다.
"홍대에요. 근처 오면 전화해요. 내가 마중 갈 테니. 희선씨라면 서비스 만땅으로 해드릴게요."
잠깐 사이치고는 상당히 친근해진 우리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시간을 죽였다. 당장이라도 연락이 올 것 같았던 유니온은 깜깜 무소식이고 우리는 곧 시큰둥해졌다.
일단 밤도 깊었고 이능의 피드백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던 희선씨는 금세 잠이 들어버린다. 간호사 복장으로 무방비하게 잠든 글래머 아가씨라니.
꽤나 존슨을 자극하는 모습이다.
군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를 감상한다. 특히 몸매 쪽을 감상한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다이나믹하게 나와 주신 그녀의 신체에 감탄한다.
오! 사진이라도 찍어서 남겨두고 싶은 광경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야 범죄겠지.
음.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정말 일이라도 칠 것 같아서 애써 시선을 돌리지만, 의지를 벗어난 눈이 자꾸만 그녀의 몸을 훑는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발신자는 윤민아. 사태가 벌어진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연락이 왔다.
============================ 작품 후기 ============================으아닛! MEMORIZE의 작가 로유진님의 추천 덕에 선작이 눈에 띄게 늘었군요.
전에 아름다운 세계를 추천해주신 데 이어 이번에도 ㅜㅜ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연참으로 보답드릴게요. 이어서 본작들도 오늘 업뎃 들어갑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