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8화 (8/223)

< --  1. 이게 웬 날벼락인 줄 알았더니!  -- >

사람들이 딴에는 서둘러 이동을 시작하지만 내 눈에는 한 없이 느려 보일뿐이다. 뛰어가도 모자를 판에 카메라니 뭐니 이런저런 장비들을 가지고 가는 그들의 이동속도가 빠를 리가 없잖은가.

제길. 이 순간에도... 초조한 마음으로 그들을 인솔해 차량으로 돌아가 보니 벌써 시간이 꽤나 지나 있다. 속은 점점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데 그들이 벌써부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멍청한. 4등급 몬스터라면 달리는 차량 따위 순식간에 따라잡힌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을까. 막 차량에 탑승하여 출발하려는데 우리를 엇갈리듯 스쳐가는 인물들이 보인다. 유니온소속의 인물들인지 전투복을 차려입은 그들은 비장한 얼굴로 달리고 있다.

각기 능력을 개방했는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리는 인물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분명 전선에 투입되는 인물들이겠지만 고작 열명도 안 돼는 인원이다. 고랭크의 능력자가 할 일 없이 이 부근에 있었을 리는 만무하니, 분명 높아봐야 5등급의 능력자일게 분명한 그들의 질주가 눈에 박힐 듯 들어온다.

저들이 가봐야 변하는 건 없으리라. 단지 민간인들이 빠져나갈 시간을 버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리고 대가로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겠지.

숨이 거칠어지지만 일단 이들을 먼저 안전지역까지 호송하는 게 우선이다.

그때 마침, 통신기가 울려댄다.

'상황이 좋지 않다. 유니온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다.'

통신기에 들려오는 냉담한 음성. 윤민아 그녀다.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그녀의 음성이 이리도 반가울 줄이야.

'추가지원이 갔지만 지금은 여력이 없다. 일단 민간인들이 안전한 지역까지 벗어나면 전선을 물린다.'

그녀의 음성도 내심 편치는 않은지 가늘게 떨리고 있다.

"방금 스쳐간 인원들의 랭크는 어떻게 됩니까."

혹시나 하는 기대에 그녀에게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 다르지 않다.

'5등급 능력자 2명. 6등급 여섯명이다.'

침음성이 새어나온다. 4등급 몬스터에 비하면 턱도 없는 전력이다. 그나마 처음부터 전선의 능력자들과 합류했다면 모르되 지금 가봐야 순차적으로 몬스터에게 살해당할 뿐이다.

"그걸로 될 리가 없잖습니까!"

나도 모르게 음성이 올라간다. 동승하고 있던 사람들이 움찔하고 놀라지만 나는 그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일단은 민간인들을 호송하는 것만 신경 써라. 피해를 줄이는 방법은 그거 하나뿐이다. 정 걱정되면 안전한 곳에 민간인을 대피시키고 전투에 합류하도록.'

그걸 끝으로 통신은 종료되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결국 돌아온 답은 절망적인 것들뿐. 무엇 하나 희망적인 게 없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파동이 연달아 터져 오르더니 그 위치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다시 통신기에 통신이 들어온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놈이 지금 차량들의 뒤를 쫓고 있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

다급한 남자의 통신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폭음이 치솟는다.

앞서 달리던 차량들이 잇따라 급정거 한다. 당황한 사람들의 욕설과 고함소리가 난무하는데 가장 앞선 차량이 도무지 다시 출발할 생각을 안 한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나는 차에서 급하게 내렸다. 선두의 차량에 다가서니 그들이 왜 출발을 하지 않았는지, 아니 왜 못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사람 죽었어요? 전 잘못 없어요! 그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전 잘못 없어요. 그 사람이 튀어나와서. 전 잘못 없어요. 전 잘못 없어요. 전 잘못 없어요. 전 잘못 없어요."

운전석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핸들에 머리를 쳐 박은 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운전자. 그의 앞에 피투성이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인물이 보인다.

유니온의 능력자인데 낯이 익다 했더니 오전에 집으로 마중 왔던 능력자중 하나다.

허겁지겁 달려가 확인해보니 아직 숨은 붙어있다. 통째로 뜯어낸 듯 어깨부터 양팔이 사라져 있다.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꿀럭대며 나오고 있다. 저 정도면 능력자에게도 치명상이다.

서둘러 소매를 찢어 지혈했다.

한참 내가 정신없이 응급조치를 하고 있는데, 능력자의 눈이 번쩍 뜨인다.

"도망쳐! 민간인들을 데리고 어서!"

마치 미친 사람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남자의 모습에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제길 유니온의 같지도 않은 짓거리 때문에...

"도망치라고!"

계속해서 소리치는 능력자 탓에 멈춰진 차량들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피투성이의 남자를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호들갑을 떤다.

"내가 친 게 아니라고!"

운전석에서는 여전히 패닉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전사의 절규가 들려오고 사방이 아수라장이다.

한참을 소리치던 남자의 고함이 멈추고, 그의 고개가 푹 고꾸라진다. 부릅뜬 눈조차 채 감지 못한 남자의 표정은 마지막의 그 다급함 그대로다.

나는 조용히 그의 시체를 안아 길 한켠으로 물러섰다. 사람들이 여전히 소란을 떠는 가운데 그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두고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나이프를 꺼내 거침없이 내 팔뚝을 그어버린다. 차량에 탑승하면서 풀렸던 피의 갑주가 다시 내 몸을 감싼다.

때마침 격렬한 폭발이 후미차량의 바로 부근에서 연달아 터져 나온다. 폭음과 함께 내려선 이들은 유니온의 전투복을 입은 능력자들이다.

격렬한 전투를 증명하듯 온통 피투성이인 그들은 착지조차 제대로 못해 바닥에 나뒹구는 이들이 태반이다. 제길. 살아남은 건 이들뿐인가?

불과 스무 명도 되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이를 바드득 간다. 그나마 태반이 좀 전에 스쳐갔던 지원 병력들이다. 먼저 막아선 이들은 그세 놈에게 당한 듯 하다.

그중에서 가장 만신창이인 몸을 하고 있는 남자가 내게 말한다.

"죄송합니다. 역부족이었습니다."

낯익은 음성이다 했더니 전에 통신을 했던 5등급 능력자인 듯 보인다.

"4등급 능력자 콜 싸인 '피바라기' 김형준입니다. 전투에 합류합니다."

비통한 음성의 그에게 바로 전투에 합류할 것을 알렸다.

"거부하고 싶지만, 지금은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군요. 5등급 능력자 콜 싸인 '싸울아비' 진태식입니다."

넝마가 된 꼴을 하고도 제법 강단 있게 말하는 모습에 입맛이 쓰다.

유니온 직속의 능력자들은 각기 이윤에 따라 유니온의 지령을 따르는 다른 능력자들과 달리 순수한 사명감에 불타는 이들이 태반이다. 주어진 힘에 걸맞는 의무. 그들의 신조다.

"5등급 저 하나, 6등급 열여섯입니다. 좀 버거운 거 같군요."

버겁다 말하면서도 거리낌이 없는 그의 태도에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미소가 새어나온다.

그 사이에 다른 능력자들이 부상이 심한 동료를 차량에 태우고, 민간인들을 대피시킨다. 빠른 일처리에 과연 유니온의 정예들이다 싶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그 짧은 시간동안 스무명이 넘는 피해를 입은 존재가 4등급 몬스터다.

막 차량이 거친 배기음을 내며 출발하려는 찰나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놈의 모습은 흡사 기괴하기 짝이 없다. 5미터는 넘는 덩치에 여덟 개의 팔과 네 개의 다리. 각 팔에 쥐고 있는 도끼며 장검이며. 게다가 세 개나 달린 머리는 신화 속의 용과 같다.

"용아병?"

나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어쩐지 아무리 4등급이라지만 유니온의 정예들이 입은 피해가 무지막지하다 했더니 4등급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속하는 용아병이다.

나를 포함해 4등급 하나와, 상처투성이 5등급 하나, 역시 만신창이 6등급 능력자 열 둘. 이런 반편이 전력으로 상대할만한 놈이 아니다.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유니온에 얽혀서 좋을 일이 없건만 요 근래 일들이 잘 풀린다 했더니, 결국 이 꼬라지구나.

"일단은 시간을 버는 정도로 가봅시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쾌활하게 말했다. 어차피 D섹터에서 경험한 절망만 해도 셀 수도 없을 정도. 팔다리 멀쩡하고 같이 싸워줄 동료들이 있다. 스스로를 고무시킨다.

자! 마음껏 발버둥 쳐주마!

놈의 긴 사정거리에 단병으로 달려들었다가는 순식간에 거덜이 날 수도 있다. 손끝에 맺힌 핏방울을 대가로 피의 창과 방패를 생성한다.

내가 전투 준비를 마치자 힘없이 늘어서 있던 능력자들이 각기 검이니, 창이니 또는 자신만의 고유의 이능력을 꺼내든다.

용아병에 비해 부족한 전력이지만 그래도 잘 연마된 그들의 기운들에 투지가 가득하다. 나 역시 그들에게 지지 않고 투기를 뿜어낸다.

아아아아아!

기괴한 외모와는 다르게 청아한 놈의 울음소리와 함께 전투가 시작된다.

그 시각 비장한 각오로 용아병과 대치중인 능력자들을 뒤로 하고, 달려가던 차량들 중 한 대가 멈춰 섰다.

거듭 터져 나오는 만류의 고함 소리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맨 한명과 내린 여인.

"아까와는 비교도 안 돼는 놈이라잖아요! 이것만 찍어도 우리는 대박 나는 거라고요!"

이한나가 긴장과 기대감이 서린 표정으로 차문을 쿵하고 닫는다.

"멀찍이서 보기만 하는 건 문제 없을 거야."

그녀의 다부진 표정에 전염된 듯 카메라맨 역시 결연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최대한 땡겨서 찍으면 뭐 별 일 있겠어? 아까 보니 능력자라는 사람들도 잔뜩 있고."

두려우면서도 설레이는 상반된 감정을 안고 나서는, 둘의 걸음이 향하는 곳에서 폭음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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