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이게 웬 날벼락인 줄 알았더니! -- >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멈췄던 카메라가 다시 돌기 시작하고 조금은 위축되어 있던 사람들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이한나라는 여자는 원래 기가 드센 건지 하얗게 질려있던 것도 잠시, 금세 나를 노려보며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조차도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연신 과장된 제스츄어를 취하며 입을 놀려댄다. 하지만 그래봐야 볼 것도 없는 동네에서 뭘 촬영할 게 많겠어. 역시나 이내 카메라가 멈추고 스텝들이 삼삼오오 몰려서 수근거린다. 가끔씩 나를 힐끔 거리는 게 느껴지는데 그중 대놓고 쳐다보는 시선은 이한나 밖에 없었다.
어느덧 D섹터에 들어선지 두시간 가량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을 텐데.
마침 통신기가 시끄럽게 울려댄다. 유니온이 별도로 지급한 이 휴대용 통신기는 외관만 보자면 핸드폰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유니온 전용의 회선이라는 것이 다를 뿐.
'현재 그 쪽으로 몰이 중. 15분 내로 도착합니다. 야차 두 마리. 다시 말합니다. 야차 두 마리 15분 내로 도착.'
꽤나 느긋한 음성 너머로 듣기 싫은 괴성이 들려온다. 지금 한창 몰이 중인가본데?
야차 두 마리면 그리 어렵지 않은 상대다. 일반적인 7~9급 능력자들이 사냥하는 저급한 것들이니 만큼 4급 능력자인 내겐 안중에도 없는 놈들이다.
자. 쇼 타임인가.
여기 저기 흩어져있던 스텝들에게 손짓했다. 한참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있던 그들이 나를 주목한다.
"카메라 돌리세요. 지금부터 정신없을 테니 각오들 하시고. 그 부근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전신의 능력을 개방하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정도까지 능력을 끌어낼 필요도 없이 처리가 가능한 놈들이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다. 그리고 기왕 보여주는 거 화려하게 가야 뭔가 그림이 나오지 않겠나 싶기도 하고.
유니온에서 지급한 짤막한 나이프를 꺼내들고 그대로 팔뚝을 죽 그었다.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에 눈살을 찌푸린다. 팔뚝위로 금세 방울져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여기저기서 침음성이 나온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단순한 자해로 보이겠지. 하지만 나의 이능력은 피를 대가로 바쳐야지만 발현되는 고약한 것. 지금 흘린 피를 제물 삼아 핏방울이 그 강대한 힘을 실체화시킨다.
"헉! 저게 뭐야!"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경악성이 다시 터져 나왔다.
피를 매개체로 한 붉은 갑옷의 실체화. 그것이 각성과 동시에 4등급에 랭크된 나의 이능, '피바라기'의 정체다.
완전한 이능력의 개방과 동시에 온몸에 힘이 넘친다. 오랜만에 해방된 이능이 기분 좋게 나를 감싼다.
작위적으로 만든 상황이지만, 전투는 전투다. 잡스러운 생각을 지우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저급한 놈들이라 하더라도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은 D섹터.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강대한 이능의 능력자가 가장 저급한 놈들에게 살해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온갖 왜곡된 의지들이 세상의 법칙을 비틀어 버리는 곳, 바로 여기 D섹터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마요. 자기 목숨 가지고 장난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자. 슬슬 움직여볼까.
마침 모습을 드러낸 D섹터의 몬스터 야차. 3미터는 되 보이는 우락부락한 괴인의 모습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댄다. 저급한 것이지만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괴물이다. 흉측한 이빨에 벌써부터 사람들이 겁에 질린다.
다른 능력자들에게 꽤나 험하게 당했는지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여기까지 몰이 당했지만 그 흉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라, 사람들을 본 놈들이 괴성을 지른다.
그리고 야차들과 촬영 팀 사이에 내가 들어선다.
한참 괴성을 질러대던 놈들이 그런 나를 발견하고는 멈칫한다. 다른 이들과 달리 침착하게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당혹스러운 듯 하다.
그렇게 얌전하게 있으면 안 돼지. 자 빨리 빨리 진행하자고.
일부러 무방비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한발 한발 다가간다. 양손을 늘어트리고 그저 무작정 걷는 모양새라서 놈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일단 생김새는 사람과 많이 닮아 있으니 표정을 읽는 게 어렵진 않은지라, 놈들의 표정이 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이제 좀 쉬게 해줄게.
천천히 내딛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다가 이내 쏜살과 같아진다.
눈 깜짝 할 사이 놈들에게 접근한 나는 바로 앞에서 놈들을 올려다봤다. 빠른 속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놈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지척에 도달한 나를 발견하고 괴성을 터뜨린다.
조잡한 나무 몽둥이가 올라가고, 다시 내려 쳐진다. 나는 허리를 비틀어 몽둥이를 피하고 한발 내딛었다.
어느새 드러난 놈의 널찍한 등판에 손바닥을 가져다댄다. 그리고 '피바라기'의 또 다른 권능이 발현된다. 놈의 피부가 울룩불룩하게 튀어나오며 요동을 친다. 마치 끓는 물처럼 기포가 일어나는 놈의 피부. 놈의 비명이 좀 전과 다르게 공포와 고통에 가득 차 있다. 그런 놈을 무감정하게 바라보던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터져라.
말 그대로 놈은 폭발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피와 살점. 꽤나 그로테스크 한 그 광경에 뒷 편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아. 조금 과격했나?
화려한 걸 보여준다는 게 괴기스러운 모습을 보여줘 버렸네. 남은 한 놈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놈이 도망가서야 나머지 분량 채우기가 쉽지 않을 거라 걱정인데 다행스럽게도 놈이 내게 달려든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용맹한 건지.
방금 전의 놈과 하나 다를 게 없는 패턴이 반복된다. 몽둥이를 내려치고 나는 피하고. 그리고 다시 놈의 등 뒤.
자. 이번에는 어떻게 마무리 한다.
고민하고 있는 와중에도 놈의 공격은 계속된다. 단순한 패턴의 공격이라 어렵지 않게 피하며 생각을 하던 나는 결국 고전적인 방법으로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중세시대 기사의 모습과도 비슷한 피의 갑옷, 그에 걸맞게 핏빛 장검 하나를 생성해낸다. 그리고 놈이 몽둥이를 질러대는 사이, 검 날로 목을 베어간다.
놈의 못생긴 머리통이 너무나도 수월하게 바닥에 굴러 떨어진다. 그리고 솟아오르는 피 분수.
너무도 순식간에 끝나버린, 전투라 하기에도 뭐한 싸움에 주변이 고요해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제각각이다.
얼이 빠졌거나, 공포심 가득하거나. 그들의 각양각색의 얼굴에 떠오른 공통된 감정은 경악이다. 영화에서만 보았던 괴물과, 기괴한 이능력자의 싸움. 현실감 없이 지나간 전투가 그들의 넋을 온통 빼놓은 듯 하다. 혹시나 해서 카메라를 확인해 보니 제대로 돌고 있다.
그래. 내가 뭣 때문에 이런 광대 같은 짓을 벌였는데. 한나라는 여자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 걸 시작으로 사람들이 여기저기 나앉고 소란을 일으킨다.
"대.. 대체 저건!"
그들 중 한명이 내지른 음성이 잔뜩 떨린다.
"제가 말씀 드렸죠. 이 땅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어떤 논리와 법칙도 적용되지 않는 별개의 세상. 방금 보신 놈들은 이곳의 주민 중 하나, 야차라는 놈입니다."
조금은 으스대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설명을 해주니, 그들이 이제는 허탈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 믿었던 그들의 생각이 산산조각 나고 무너졌으리라. 충격이 적지 않을 테지.
그때 통신기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경계선 밖에서 4급 몬스터 출몰. 현재 경계선을 지키고 있던 능력자들이 방어에 나섰으나 역부족. 조속히 자리를 이탈하기 바람.'
급박한 음성이 속사포처럼 자기 할 말만 쏟아내고는 이내 끊어진다.
같지도 않았던 전투에 풀어졌던 몸이 순식간에 굳는다. 그리고 빠르게 정신을 집중해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심상찮은 파동이 느껴지는 게 멀지 않은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듯 하다.
야차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대하고 사악한 무언가의 의지가 이곳까지 넘실거리며 느껴졌다.
"대박이다! 제대로 다 담았지?"
충격도 잠시, 자신들이 촬영한 영상에 대한 희열이 가득 담긴 촬영 팀이 요란법석을 떨어댄다. 그런 그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장비 챙겨요! 아니 버려도 좋으니까 최대한 빨리 차량으로 돌아가요!"
제길! D섹터에 들어와서 편하게 일정이 끝날 리가 없지. 나도 유니온도 안일했다. 우리가 세운 계획 따위는 얼마든지 비틀어버릴 수 있는 저 사악한 의지가 일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둘리가 없다.
내 급박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되도 않을 소리를 지껄여댄다.
"형준씨. 수고하셨습니다. 덕분에 좋은 영상 건졌어요!"
상황도 모르고 지껄이는 꼴에 순간 분기가 치솟아 오른다.
"닥치고 빨리 도망가라고!"
갑작스러운 폭언에 사람들이 멍한 얼굴을 해 보인다. 제길. 우리가 꾸물댈수록 능력자의 희생은 커진다.4등급 몬스터라면 최소 5등급 이상이 20명이 달려들어야 처리 가능한 무지막지한 놈이다. 그런 놈을 지금 6등급 서른명과 5등급 세명이 막아서고 있다니, 벌써부터 그들의 비명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방금 놈과는 비교도 안 돼는 놈이 와요! 다른 사람들이 막고 있지만 오래 못 버팁니다!"
전신의 근육이 불끈거린다. 지금이라도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른다.
제길. 어줍잖은 광대놀음 때문에... 갑작스레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지금도 분명 누군가가 피를 뿌리고 있을 그 곳이 눈에 보이는 듯 해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이능력자들은 태생적인 이유로 유대감이 상당하다. 일반인의 사회에 섞여 들어서도 무언가 공허한 그 감정을 채워주는 것은 오직 같은 이능력자들 뿐. 평소에는 으르렁거리고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아도, 사실 우리는 형제라는 유대감으로 묶여있다.
그런 그들이 지금 이 되먹잖은 짓거리에 스러져가고 있다.
"빨리 가라니까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소리 지르니 그제야 느리게나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를 악문다. 침착하려 노력하지만 자꾸만 정신이 흐트러진다. 저 멀지 않은 곳에서 명멸하는 힘의 격돌에 초조함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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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는 저의 힘!!!!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