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 이게 웬 날벼락인 줄 알았더니! -- >
내가 단 댓글을 보며 혼자 큭큭거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니온.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아무 생각 없이 현실 도피를 하다가 떡하니 현실과 마주한 기분이랄까? 그간 스스로 피해 왔던 현실에 갑자기 머리가 아퍼온다.
조심스럽게 통화연결을 누르니, 예의 그 차가운 음성이 들린다.
"내일 오전에 기자들과의 인터뷰가 있으니 메일 확인 하도록. 예상 질답은 다 나와 있으니 외워서 숙지하고, 자세한 건 내일 오전에 만나서 얘기 하지."
저 할 말만 하고 뚝 끊어버린다.
잠시 어안이 벙벙해서 핸드폰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발광했다.
"아! 거만한 년! 도도한 년! 나쁜 년! 정나미 없는 년!"
인사도 없이 용건만 전달하고 뚝 끊어진 통화에 약이 올랐다. 가뜩이나 지들 멋대로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려는 마당인데 이런 배려 없는 짓거리라니.
"얼굴만 이쁘면 다야! 언젠간 먹어버릴 거야!"
스스로 되도 않을 소리를 지껄이다가 이내 침대에 몸을 눕힌다. 아. 진짜 할 일 드럽게 없네.
몇 번을 뒤척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유니온에서 온 메일이나 확인 해보자.
간단한 조작을 하고 나니 유니온의 홈페이지가 나오고, 보안코드와 기타 접속 절차를 받는다. 화면 하단부에 반짝이는 신규메일을 확인했다.
"장난해? 이걸 하루 만에 다 외우라는 거야..."
첨부파일을 열어보니 얼추 A4용지로 마흔장은 될법한 분량이라 욕부터 튀어나온다. 다시 한 번 그 정나미 떨어지는 여자와 유니온을 욕했다.
제길. 그래도 별 수 있나. 까라면 까야지.
시끄럽게 울려대는 벨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잠결에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5시다. 어떤 미친 인간이 이 시간에 매너 없이 전화질인가 봤더니 유니온이다.
가뜩이나 인터뷰내용을 확인하느라 잠도 못 잤구만. 무시하고 자려다가 발신자를 보고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들려오는 냉담한 음성이 아침부터 재수 오지게 없다.
"지금 문 앞에 스타일리스트가 기다리고 있으니 문을 열도록."
딸칵.
또다시 저 할 말만 하고 끝나버린 통화에 차라리 체념한다. 뭐라는 거야. 푹신한 베개를 끌어않고 다시 눈을 감는데 퍼뜩 정신이 든다.
이런 썩을!
일찍도 얘기해준다. 아침부터 이게 왠 난리야. 팬티바람이었던 차에 후딱 옷을 걸치고 문을 여니, 왠 아리따운 아가씨가 서 있다.
"안녕하세요. 유니온에서 나온 이지혜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에는 그래도 정상적인 사람이라 예의를 제법 차린다. 잠결에 문부터 덜컥 열었더니 새삼 방 꼴이 걱정된다. 역시나 그녀의 시선이 내 뒤편을 훑는가 싶더니 눈매가 고양이처럼 휜다.
뻘줌하게 늦은 인사를 건넨다,
"아. 김 형준이라고 합니다. 방금 일어나서 꼴이 말이 아닌데."
상큼발랄한 외모에 걸맞게 시원한 성격인지 내 반응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그녀가 방에 들어선다.
"일단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바로 작업에 들어갈게요."
들어서자마자 뭔가 거창한 박스를 열어 보인 그녀가 내 몸을 이리 저리 훑어댄다. 미모의 아가씨가 보내는 시선이 기분이 나쁘지 않아야 정상이지만, 자다 일어나서 원체 추례한 꼴이라 몸을 이리 저리 비틀며 그녀의 시선을 피한다.
작게 쿡쿡대며 웃은 그녀가 먼저 샤워부터 하고 올 것을 부탁한다.
묘한 기분인데? 미녀가 샤워부터 하라니... 쓰잘데기 없는 망상을 하며 샤워를 마치고 나니, 그녀가 어느새 작업 준비를 마치고 나를 반긴다. 보는 것만으로는 그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온갖 것들을 늘어놓은 그녀가 나를 자리에 앉히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
제길. 인터뷰라더니 어디 신랑화장이라도 할 생각이냐.
속으로 궁시렁 거리는데 꽤나 공을 들인 그녀의 작업이 끝난 건 얼추 8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역시 유니온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네요. 정말 멋지세요."
자신의 작품을 만족스럽게 감상하던 그녀가 눈웃음을 살살 친다. 고것 참. 한입에 먹어도 안 비리겠구만.
그녀가 준비해온 검은색 수트를 입고 나니 진짜 아닌 게 아니라 제법 근사해 보인다.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스스로를 감상한다. 어머니 이렇게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흐흐.
"시간 없으니 바로 내려가세요. 담당자분이 기다려요."
담당자라는 말에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아 좋았던 기분 다 날아가네. 제길.
그런 내 표정을 보며 상큼한 웃음을 짓는 지혜씨. 아. 눈이 정화되고 있어.
잡스러운 생각을 하며 건물을 내려가니 주차되어 있던 차 한 대가 라이트를 밝힌다. 검은 선팅이 짙게 된 리무진 차량.
지이잉하고 창문 내려가는 소리마저 왠지 격조 높게 들리는데 그 얼음덩어리 같은 여자의 얼굴이 보인다.
"타. 시간이 별로 없다."
속으로 그녀를 욕하고는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그 우아한 자태만큼이나 매끄럽게 달리는 리무진 안에 이름도 모르는 그녀와 나만이 불편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니. 불편한 건 나만인가.
그녀는 뭐가 그리 바쁜지 서류 따위를 검토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 지혜씨는 왜 같이 안가지.
재미없게 이런 여자랑 단 둘이라니. 모처럼 리무진을 탔는데 좀 더 상큼한 아가씨가 동행하면 좀 좋아?
"근데 저희 어디로 가는 거?"
그녀가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대답한다.
"기자회견장."
예상대로 짤막하기만 한 대답이라 쳇 하고 고개를 돌린다. 그러다가 이내 심심해져서 다시 그녀를 귀찮게 굴기 시작했다.
"그게 어딘데요?"
"몇시가 회견인데요?"
"그쪽 이름은 뭐에요?"
나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져서 더 이상 서류를 못 보겠는지, 그녀가 탁 소리가 나게 서류철을 덮는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서늘한 눈동자에 찔끔하는데, 의외로 그녀가 선선히 대답해온다.
"쉐라톤호텔이 회견장이다. 지금이 여덟시 반이니 기자회견까지는 삼십분 정도 남았고. 내 이름은 윤민아다."
헹. 의외로 평범한 이름이네. 하는 짓이나 분위기를 봐선 얼음나라 공주 프랑소아 뭐 이딴 이름일 거 같더니.
"심심한가본데 어제 준 인터뷰 내용이나 한 번 더 숙지하도록."
쌀쌀맞은 태도에 코웃음을 치곤 여전히 그녀에게 말을 건다.
"근데 이능은 어디까지 공개해야 하죠?"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절레 절레 저어댄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처럼 말 많은 남자는 처음 본다. 쓸데 없는 질문 말고, 질답에 나와 있는 것만 신경 써라. 그 외의 질문은 내가 대신 대답할 거다."
쳇. 인간미 없는 년 같으니. 도무지 대화의 즐거움을 몰라.
그녀와의 대화를 포기하고 멍하니 있다 보니 어느새 차의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다 도착했나 싶어 창밖을 보는데 번드르한 호텔입구에 왕창 몰려있는 기자들이 보인다.
저게 다 나 때문에 온 거야?
민간에 이능력자로 신상이 털리고 난 후에 사실 별다른 실감을 못 하고 있었는데 바깥세상에서는 이리도 열기가 뜨거웠나보다.
못 해도 수십 명은 되 보이는 기자를 보고 감탄해버렸다. 촌놈처럼 입을 벌리고 그 꼴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민아년이 입을 열었다.
"분명히 허가 받지 못한 기자의 출입은 통제하라 했을 텐데. 도대체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사람이 없군."
입이 떡 벌어진다. 저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기자들이 허가를 받지 못한 떨거지라니. 과연 유니온은 뭔 일을 해도 스케일이 크게 하는구만.
저 기자들의 뭉탱이를 어떻게 뚫고 가나 했는데 차는 입구가 아닌 다른 곳으로 유유히 빠져나간다. 정문과는 다르게 사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곳에 내린 나는 왠지 좀 허탈함을 느꼈다.
그런 생각도 잠시, 마중나온 호텔관계자를 따라 가다보니 회견장에 금방 도착했다.
마침 시간이 다 됐다는 말과 함께 나는 덜컥 기자들 앞에 던져졌다.
오 맙소사.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지만 수백 쌍은 되 보이는 기자들의 눈빛에 지려버릴 판이다.
찰칵찰칵.
시끄러운 셔터음과 플래시 세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여기 저기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자신쪽을 봐주기를 청한다.
어벙하게 그리 주춤하고 있으니 윤민아가 나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봐서 자존심이 왕창 상해버렸다.
네가 그래서 인간미가 없는 년이라는 거야.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정상이라고.
되 먹잖은 자기합리화를 하며 어찌 어찌 마련 된 자리에 가 앉는다. 곁에 앉아 마이크를 잡은 얼음공주가 기자들에게 정숙을 요한다.
"조용. 소란 피우는 분은 질문할 기회를 드리지 않겠습니다."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던 기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다. 아 진심 감탄했다. 저 년 정말 난 년이다. 그녀의 한마디에 조용해진 기자일동. 그녀의 차가운 말에 압도되어 플래쉬 마저 멎어버린다. 대충 주변이 정리 된 것 같자 그녀가 바로 회견을 시작한다.
"그럼 지금부터 정부가 공개한 이능력자 사건. 그중 신상이 노출된 김형준씨의 기자회견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저는 김형준씨의 대변인이자 전권 대리인으로써 제 의뢰인에 대한 모독이나 기타 명예를 훼손하는 분께 강경하게 대응하겠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실제 김형준씨의 신상을 무단으로 노출하고, 그를 마치 테러리스트와 같은 반사회적 인물로 몰아간 언론에 이미 고소절차가 진행 중이오니, 이에 참고하시고 수위를 지켜주시기를."
시작부터 으름장이다. 얼음물 뚝뚝 떨어지는 저런 말투라니. 기자들의 얼굴빛이 안 좋아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기자양반들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저 여자는 태어나기를 얼음나라에서 태어났거든. 애초에 인종이 다르니 괜히 얼굴 붉힐 필요 없어.
속으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긴장을 풀고 있는데 그녀의 한마디로 장내가 소란스러워진다.
"질문 받겠습니다. 질문하실 분."
너도 나도 손을 들어대는 기자들이지만 얼음덩이는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것처럼 고민도 없이 그 중 하나를 고른다.
"주선일보의 곽경태 기잡니다. 이능력자라고 하셨는데 정확하게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시며, 이능력자의 세계는 어떤지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질답 예상지에 있던 질문이라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윤민아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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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팍팍!
그러면 연참도 팍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