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08. 서주 공방전 (10)
그녀와의 거리는 불과 삼십 걸음도 안 될까.
그 보랏빛 머리카락의 여인은 이쪽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나도 아련하여, 도무지 이 전장에서 볼법한 표정이 아니었기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는 시선을 고정한다.
“아저씨.”
몸이 떨렸다.
어디선가 느껴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정신을 차린 이래로 종종 들려왔던 환청과 기시감은 여포와 만난 이래로 점점 강해졌고, 그것은 이 여인과 마주하게 된 상황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저예요.”
그녀가 한 발짝 다가온다.
아직 거리는 제법 있는 상황. 그런데도 나는 그녀가 한 발짝 다가옴과 동시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상황을 피하려는 듯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알아요?”
“……그건….”
“재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절망하고, 그러면서도 한 줄기 희망에 기대며. 그것조차 무의미할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당신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아요?”
보랏빛의 여인은 나를 너무나도 잘 안다는 듯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다.
현 상황은 아직 조조군에게 밀리고 있는 와중.
그녀의 복장은 누가 보아도 일반 병사의 복장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것은 오히려 군의 지휘관 내지는 문관의 복식과 흡사한 면이 있었다.
이 방면에서의 지휘관은 저 여인인가.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를 잠시 주시하며 거리를 쟀다. 짧다고는 할 수 없으나, 한 번 속도를 붙인다면 금세 따라잡을 수 있을 거리.
저 여인을 죽인다면 이번 전투를 끝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도무지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적어도 내가 저 여인의 목에 검을 겨눈다는 그림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기억하지 못하는데도 몸이 기억한다.
그 기묘한 기시감에발목이 잡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저씨?’
순간 귓가로 이명이 들린다.
목소리는 분명 눈앞의 여인과 비슷하되 조금 더 어린 듯한 느낌. 과거에도 종종 느낀 적 있는 현상이었지만, 마주한 이의 모습과 겹쳐 현실감을 떨어뜨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나는 너를 모른다.
‘이쪽으로 와요. 나 아직 말 오를 줄 모른다고요.’
그런데도 그 목소리는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한다. 가슴 떨리듯, 그것은 이내 살 떨리듯 눈앞에 허상과도 같은 풍경을 비춘다.
‘바둑 그렇게 두는 거 아닌데.’
나는 바둑을 둘 줄 모른다니까.
어느새 자연스레 그 허상과 이명에 속으로나마 작게 답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정신병이 아닐까 싶었지만, 그 감각은 썩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전쟁이 펼쳐지고 있는 상황.
사람이 죽어가는 전장을 배경으로 나와 그녀는 마주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당장 몸이 움직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저 애처로운 시선과 마주하면 자연스레 몸이 굳는다. 무언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감각은 최악이었다.
나는 저 여자를 죽일 수 없다.
그것을 몸으로 느끼며 칼끝을 내렸다.
“아저씨, 지금이라도 돌아와요.”
“……못 가.”
전투 속 우리의 시간이 멈춘 느낌마저 들었다.
나와 그녀.
둘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사라져버린느낌. 그만큼 그녀의 작은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고, 그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뚜렷했다.
어째서 몸은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점차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인지모르겠지만, 내가 모르는 이들에게 휘둘리는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왜요.”
그녀는 표정을 어둡게 내리깔고 물었다.
“적어도 이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왜 저희가 아니고, 왜 하필 유비예요?”
답할 말은 없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 이 전장이 끝나기만을 바랄 따름. 시선을 살짝내리면 내 발치에서 숨을 헐떡이는 유비의 모습이 보였다.
장료와의 대치 과정에서 그녀가 입은 부상은 제법 컸다.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등을 돌리려 했다.
“아저씨! 왜, 제발 부탁이니까 대답해줘요.”
“기억 잃고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니까.”
만약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 처음 만난 이들이 저들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저곳에 있지 않았을까.
확신은 없지만,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가슴 한편이 술렁거림을 느꼈다.
애당초 조조라는 인물에게는 좋은 기억이 없었다.
어릴 적 소년병으로 전장에 참전하였던 시기.
그녀는 황건적 토벌 과정에서 비무장한 이들을 전원 처형하는 과정을 거쳤고,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 머무르며 전쟁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게 했다.
과거의 나는 그런 그녀와도 잘 지냈던 것인가.
“기억…? 그게 무슨.”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볼 수 있겠지.”
그리 답하며 주변을 돌아봤다.
아군의 합류 이후 전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장료라는 남자는 제법 분투하고는 있었지만, 여포에게 당해내지 못하고 계속 밀려나기를 반복하는상황.
돌파력의 주력이 될 기병과 그 선두에 섰던 장수가 발걸음을 멈추니 아군 또한 다시 그 기세를 회복하여 적을 계속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버틸 수 있다.
곧 해가 떨어진다. 야간까지 이어가며 전쟁을 치르는 경우가 아예 없지는 않으나, 그것은 정말 극한의 상황에서만 이뤄지는 일.
적어도 이런 규모의 전장에서는 야전을 벌일 이유가 없다.
곧 끝난다.
오늘 하루만 버틴다면, 어떻게든 재정비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터.
그렇게 마음먹고 등을 돌려 유비를 부축하던 차, 저 멀리서 나팔 소리가 들렸다. 적과 아군 모두가 뒤엉켜 싸우고 있었기에 그런 소리가 들릴 리도 없을 텐데.
저 언덕 위로 기병 무리가 보인다.
숫자는 천은 훌쩍 넘는 숫자. 고지를 잡고 이 전장을 관망하듯 주둔한 그 모습에 한 번 놀랐지만, 그 군이 내걸고 있는 깃발을 보며 재차 이를 꽉 깨물었다.
검은색 군기.
그곳에 흰색으로 수놓은 글자는 분명….
“조가의 대장기.”
현 상황에서 조가의 대장이라면 오직 하나뿐이었다.
* * *
예주 방면으로 3만, 연주 방면으로 1만.
그렇게 서주의 서부와 북부를 동시에 교란하는 것이 이 작전의 핵심이었지만, 조조가 생각하기에 유비라는 여인을 상대로 그 전력은 부족함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여 2만의 추가 징집.
조조 본인이 직접 그것을 이끌고 서주에서의 전장을 결정짓는다.
연주와 예주의 식량도 넉넉하지 못하기는했지만, 이번 기회에 서주와 유비를 정리하지 못한다면 내내 앓는 이로 남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조조의 2만 군은 태산 방면으로 출발했다.
청주에서 서주로 회군하는 유비의 군단이 아군과 전투 중이라는 보고도 들어왔고, 그렇다면 그 방면으로 침투하여 빠르게 서주의 본진인 서주성을 공략한다.
그러던 차 들어온 보고에 조조는 입술을 씰룩였다.
“……그이가 살아있다고.”
한의 중랑장이자 그녀의 연인.
물론 전호 본인에게 묻노라면 기억을 잃기 전에도 그녀를 연인으로 여겼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했겠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 그라는 남자는 애틋함을 불러오는 이였다.
죽었을 거로 생각했다.
허도 염상.
그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불길 속으로 사라진 남자. 그 뒤로 행방도 묘연하고 시체조차 건지지 못했으니 혹시나 살아있을 것도 기대했지만, 만약에라도 살았다면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을 리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2년, 이제는 3년인가.”
그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다가 갑자기, 그것도 유비의 곁에 머무르며 그녀의 편을 드는가.
혹시나 거짓 정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보고서를 보낸 것이 하후돈과 사마의라는 점에서 잘못 보았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홀로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무엇을 하고 지냈는가.”
그대는 왜.
조조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며 주먹을 쥐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이상한 것이 너무 많았다.
그 불길 속에서도 살았다면 왜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까. 애당초 그 당시 허도는 내외로 하여 그 어떤 출입도 금하였기에 그곳을 빠져나갈 방법도 요원했다.
게다가 살았다면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도 이상했고, 무엇보다 그 남자가 훌쩍 떠나서는 대뜸 유비에게 가세한 것도 의문이었다.
“영문을 모르겠군.”
이유는 알 수 없다.
그가 왜 그곳에 있는지, 또한 왜 아군을 적대하는지.
물론 전호의 성향이 조조 자신과 같은 이라고는 볼 수 없었지만, 그것이 아예 자신과 서로 무기를 겨누고 다툴 정도로 갈등이 심화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대는 왜 그곳에 있는가.”
짧게 읊조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2만가량의 본대가 태산을 돌아 하후돈이 이끄는 군단까지 도착하려면 앞으로도 하루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녀는 밖으로 나와 대기하던 장교를 향해 말했다.
“군의 모든 기마를 대동하라. 기병을 중심으로 선행한다.”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현 군단의 기병은 총 이천.
그 정도면 반나절 정도 빠르게 주파하여 서주 내부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궁금한 것도 있다.
의문인 것은 더더욱 많다.
그렇다면 제 한 몸 이끌고 직접 찾아가겠다.
조조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군단 내부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내 이천 규모의 기병이 대기하여 그녀의 명령을 기다린다.
물론 이대로 하후돈과 사마의의 승전보를 기다리며 예정대로 군을 움직인다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전호가 직접 전장에 나섰다면 하후돈은 몰라도 사마의 그 여아에게는 다소 어려운 전장일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공적인 이유가 아니다.”
그저 본인의 몸이 달아올랐을 따름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이가 살아난 것은 그녀에게 있어 모종의 희열로 다가왔다. 여기서 그녀는 재차 자신의 감정에 깨닫고는 말에 오른다.
곁에 있을 적에는 이렇게 감정이 끌렸던 줄 몰랐을 것이 정작 잃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우스워 저 자신을 자조하듯 웃고는 고개를 돌렸다.
목적지는 서주.
“지금부터 기병은 선행하여 전선의 아군을 돕는다.”
그녀의 등에 멘 검은 망토가 펄럭인다.
이제 그이가 있는 전장으로 간다.
잃어버렸던 것. 그렇게 믿었던 것을 다시 거두고자 떠나는 길.
“전군, 진격하라.”
그녀치고는 드물게도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