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08. 서주 공방전 (5)
생각보다 전열이 그리 두텁지 않다.
조금 전까지 그리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던 군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 마치 실이 끊긴 인형처럼여포의 돌격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적 대열을 바라보며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쉽게 풀려간다.
전장에서는 언제나이런 상황을 경계해야 한다고 배웠다. 상대도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분명 모종의 대응은 있어야 정상인데, 그러한 것이 없다?
“부관님! 여포 장군, 계속 진격합니다!”
그녀는 개별적으로 보아 유비군 소속 장군은 아닌데.
잠시 그런 잡생각을 떠올렸지만, 지금에 이르러 호칭 따위야 아무래도좋은 것. 여포를 따르는 전열은 이미 내가 지휘하는 중앙에서도 꽤 거리가 있을 정도로 돌파를 이어갔다.
생각해라.
상대의 함정이라고 생각된다면 물릴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나는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없어 기껏해야 감과 흐름으로 이 전장을 파악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감각을 곤두세운다.
할 수 있는 게 그런 것뿐이라면 그것만이라도 해낸다.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여포는 정말 내 부탁에 충실하여, 원래 아군이었을 조조군 상대로도 자비를 두지 않으며 방천화극을 마구 휘둘렀다.
마치 가로막는 이 하나 없이 달리는 듯한 속도.
분명 지금의 흐름은 이상하다.
하지만 그 내심 어딘가에서 나 자신의망설임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도 계속 내적 갈등을 빚는 것이 다소 한심하게도 느껴진다.
여기서 망설여서 어쩌려고.
이미 화살이 내 손을 떠난 시점에서 조조군과의 관계를. 잃어버린 기억을계속 의식한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정작 기억을 잃지 않은 여포조차도 내 부탁에 응해 저렇게 고전분투하고 있는데, 정작 그것을 부탁한 내가 미묘한 관계에 휘둘려 계속 주저하는 모습.
혹시나 후회하면 어떡할까. 그런 생각에 계속 사로잡혀 유비를 돕는 과정에서도, 또한 조조군을 상대하는 상황에서도 다소의 고민이 있던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속도를 올린다.”
이제 그것을 끊겠다.
나는 현재를 사는 인간이지, 나이 들고 은퇴하여 이제 과거를 추억할 뿐인 신세가 된 기억은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온전한 추억으로도 남지 않은 것이라면 망설여 무엇할까.
“선두에 뒤처지지 마라. 이대로 뚫어낸다.”
제갈량이 내게 부탁한 것은 단 하나.
순간적인 돌출로 적의 연계를 끊고, 더 나아가 적 부대의 중단을 끊어내 조조군 내에서의 원활한 병력 움직임을 차단해줄 것.
그렇다면 지금은 설사 상대가 무언가를 꾸몄다고 해도.
“계속 전진한다! 깃발을 더 높게 내걸어라!!”
행동이 자연스럽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만한 숫자의 군을 이끈적이 없는데, 잃었던 기억 저편으로 몸에 스며든 경험이 있었을까. 여차하는상황이 되자 정말 자연스럽게도 몸이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이대로 뚫어낸다.
분명 의아한 부분은 있다.
지금까지와는 너무 판이하게 변한 적의 움직임. 혹시나 함정이면 어떡할까 하는 걱정은 있었지만, 이미 적 전력 대다수는 아군 본대와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로 병력을 숨길 곳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와 전장의 흐름이 달라졌다.
“적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 호기를 놓치지 마라!”
아군의 기습적인 돌출이 예상외였을까.
그런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건 적 내부에서부터 무언가 이상 징조가 잡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쉬이 뚫릴 리는 없으니까.
전진을, 그저 앞만 보고 계속 내달렸을까.
적의 지휘부까지 얼추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무렵, 선두에 섰던 여포와 그런 그녀를 따르던 부대가 움직임을 멈춘 것이 보였다.
저 멀리 여포와 한 장수가 대치한 모습.
주변으로는 아군과 적이 서로 뒤엉켜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지금까지와는 달리 적 또한 대열을 갖추고 아군 병력을 틀어막은 형세였다.
“전군, 이대로 밀어낸다! 적 지휘부는 목전이다!!”
그렇게 외치고는 한 손에는 청강검을, 다른 한 손에는 유비군의 대장기를 직접 거머쥐고는 앞으로 나섰다.
다른 누구라면 모를까, 여포가 막히는 것은 예상외의 사태.
그에 따라 지원을 나갈 생각으로 주변 병력 수십만을 간추려 전선으로 달려나갔고, 그곳에는 이를 꽉 깨물고 방천화극을 치켜든 여포와 이쪽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손 흔드는 무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형씨, 진짜로 살아있었네?”
혹시 알던 사람일까.
여포는 그와 대치한 상태로 이만 벅벅 갈고 있었다.
“누이가 뜬금없이 서주군에 있다고 해서 당황했는데, 이러면 인정이지. 우리 어린 참군 아가씨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사마의도 여기에….”
여포의 질문에 그는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똑 부러지는 참군도 이번에는 어린 애처럼 몸을 벌벌 떨던데. 어떻게든 형씨를 확인하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을 후방으로 돌렸지.”
“왜. 그냥 이쪽으로 보냈어도 됐잖아.”
“왜긴 왜겠어.”
그는 여포의 말을 뚝 자르며 본인의 손에 든 언월도를 치켜들었다.
당장은 나와 여포, 둘 모두와 연관이 있는 인물로 보여 대화를 듣고 있었지만, 그의 태도나 기세는 누가 보아도 우리를 적대하는 측에 가까웠다.
자세를 잡자마자 느껴지는 기백이 다르다.
여포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노라고 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이길 상대는 아니라는 건 감각만으로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하여 장료라고 불렸던 이가 이를 드러내며 말 잇기를.
“아직 전쟁 중이니까.”
“장료, 너….”
“누이가 그곳에 있는 건 의문이야. 형씨가 살아 그곳에 있는 건 더더욱 의문이고. 알고 싶은 건 많지만 말이야.”
한 바퀴.
언월도를 가볍게 돌린 그가 자세를 낮춘다.
“전쟁이라는 건 대화로는 성립하지 않는 법이잖아?”
“장료 너 이 새끼.”
이에 여포 또한 방천화극을 그에게 겨누었다.
“많이 컸네? 이 누님 상대로 네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야 못 이기지. 단독으로 그 여포를 어떻게 이겨. 내가 미쳤어? 혼자서 싸울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 애초에 단독으로 싸우는 건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지.”
그는 주변을 가리켰다.
조조군의 숫자는 아군보다 다소 적었지만, 그 병사 한 명 한 명의 기세가 아군보다 좋았다. 이건 솔직히 말해 내가 지금껏 전장을 전전하며 보았던 그 어떤 군사보다도 뛰어났다.
게다가 여기서 발이 묶이면 문제가 하나 생기는데.
“하후돈 장군도 바보는 아니거든. 이미 지휘부에서 소란이 일었을 때부터 병력을 나눠 이쪽으로 병력을 돌렸을 건데, 여기서 발만 묶으면 포위당하는 건 누님이랑 형씨 쪽이라는 걸 왜 모르실까.”
“……너.”
“과거의 연이지만 지금은 적. 애당초 천하무쌍의 상장을 상처 하나 없이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
적 지휘부가 물러간 것은 최상의 결과.
아군 본대와 마주하던 병력이 후방으로 빠진다면 그만큼 본대에는 여유가 남겠지만, 반대로 아군의 퇴로가 차단당한다.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지금, 빠지려면 바로 지금뿐이었다.
“여포, 퇴각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발끝으로 창 하나가 박혔다.
“형씨, 곱게는 못가지.”
“이 새끼가, 지금 누구한테!!”
“누구긴. 한때의 동료였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을 박차는 소리가. 그것이 채 귀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여포가 장료라던 남자의 언월도를 가로막은 게 보였다.
“지금은 내 적이지.”
문답 무용.
누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여포와는 친분이 있는 것으로 보였지만, 적이라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그 남자의 표정이 싹 돌변해버렸다.
저것 또한 짐승이었다.
한 번 적으로 간주한 이상 그 목덜미를 물어뜯으려는 짐승. 이대로 우리의 퇴각을 지연시켜 포위, 섬멸하겠다는 의도가 강하게 느껴졌다.
“그러니 순순히 항복해줬으면 좋겠는데.”
“네가? 나를? 이 나를 잡겠다고?”
“누이 없는 사이에 조금 컸지? 남자의 성장은 고개 돌리면 그때마다 달라진다는데, 그걸 몰라본 누이 잘못이지.”
분명 대화는 가볍기 그지없었지만, 그기백이 남달랐다.
예리하게 잘 벼려진 칼이 바로 그러할까. 그는 현 천하 최강이라는 여포를 상대로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창을맞대었다.
그렇게 연이어 교전이 벌어진다.
한 번 창끝을서로 맞댈 때마다 주변으로 바람이 바뀐다.
그 충돌이 얼마나 컸는지 소리가 몸에 울려 전해졌고, 바닥으로는 크게 흙먼지가 몇 번이나 일고, 또 일었다.
여포가 강하다는 것은 이미 천하가 인정한 것.
하지만 장료라 불린 남자의 힘은 무엇인가.
“나는 누이를 죽이고 싶지 않고, 형씨도 죽이고 싶지 않아. 왜 거기에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오면 어때?”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그렇게 수합가량의 교전을 서로 팽팽하게 이어갔다.
장료가 빠르게 공세를 이어가면 여포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친다. 언월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주변으로 반짝이는 섬광만이 보였는데, 그녀는 그것을 손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막아 세운다.
이러는 사이로도 주변에서는 계속 교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반 병사야 당연히 죽기 싫으면 여포와 장료 근처로 접근조차 하지 않겠지만, 이 근방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피아 구분 없이 서로 뒤엉켜 서로의 목덜미를 노리고 피를 토해내는 혼전의 양상.
이것을 뚫어내려면 여포가 장료를 꺾는 수밖에 없다.
“여포!!”
“걱정하지 마.”
내 외침에 여포는 고개를 까닥였다.
“이 시건방진 새끼. 너 진짜 몇 년 안 맞고 살았다고 벌써 기고만장해져서, 누님 위대한 줄을 벌써 까먹었네.”
“일단 이게 임무니까.”
“살면서 네가 날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
여포가 씩 웃으며 방천화극을 세게 내질렀다.
그간 그녀는 장료의 공격을 그저 받아낼 뿐이었는데, 이 한 번을 기점으로 둘의 공수는 완전히 전환되어 이제는 그녀가 몰아치고 그가 수비 일변도로 버티는 상황이 되었다.
“악! 으, 워어!! 자, 잠깐!”
그 말이 끝나기도 전, 여포는 마치 몽둥이를 잡고 휘두르는 듯 방천화극을 요상하게 잡고 한 번 크게 휘둘렀는데, 이에 장료는 그것을 막았음에도 몸이 붕 떠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이렇게 쉽게 결판이 난다고?
잠시 당황할 무렵, 여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아, 이제 가자.”
“어? 어어. 그, 그래야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장 그가 내뿜던 기백으로 보아 관우, 장비와 비견할 수 있을 무인으로 보였다. 그런 이를 이렇게 쉽게 날려버리는 게 말이나 되나?
물론 놀라움과 별개로 지금 상황은 최적.
아군은 결국 여포와 그 선두의 돌파력을 살려 적을 뚫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그녀를 붙잡고 있던 장료라는 남자를 밀어냈으니 이제 회군할 일만남았다.
이미 아군의 가장 큰 목표는 성취했다.
물론 이것으로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아까와 같이 적에게 그저 휘둘리는 전쟁의 양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
“전군! 퇴각한다!!”
적의 규모는 비록 정예라고는 해도 아군보다 소수.
뒤가 조금 잡히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퇴각해야 했고, 이미 저 멀리 아군 본대와 교전하던 무리에서 병력이 뒤로 빠져 이곳으로 향하는것이 보였다.
저것을 피하려면다소 무리해서라도 우회해야 할까.
그렇게 회군하던 차에 여포에게 다가갔다.
“대단하네, 그런 남자도 쉽게 이기고.”
“이긴 거 아냐.”
평소 내가 이런 칭찬을 하며 어깨 으쓱이고는 잘했냐고 했을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놈, 고작 저 정도는 아니거든.”
“그러면?”
“저 머저리가 그냥 놔준 거야.”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돌려 아군이 퇴각하기 시작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분명 여포에게 당해 크게 나가떨어졌을 장료가 어느덧 가장 선두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쯧, 멍청한 새끼. 독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만.”
“……일단 돌아가자.”
생각할 것은 있다만, 이곳에서 발을 멈추면 어떻게 되건 모두 죽는다.
우선은 퇴각에 전념하고, 이후의 일은 차후 생각하는 것이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