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07. 이름을 부른다 (3)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역시 얘기만으로는 딱 와 닿는 그런 게 없다. 적대 관계였던 여포와 나의 간단한 과거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그녀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움츠리고 벌벌 떠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래도 말이야.”
“……어?”
“그걸 전부 겪었던 내가 그래도 널 받아들였다며.”
그 이유는 모르겠다마는, 적어도 과거의 나는 그 관계를 전부 이해하고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많은 고통과 고뇌가 따랐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기억 잃기 전의 나는 여포를 받아들였다.
“너는 날 예전부터 아는 사람일지 몰라도, 현재 나와는 거의 초면이나 마찬가지라고. 그 부분에서 거리감만 조금 조심해준다면, 나도 그쪽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는 있어.”
“……안 버릴 거야?”
“무슨 헛소리야.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버리긴 어떻게 버려? 게다가 밀어낸다고 쉽게 떠날 거요? 어디 묶어두려고 달려들지 않을까 무섭구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절대 안그래!!”
“솔직히 좀 이해하기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천천히 알아가자고. 나는 오는 사람 안 거절하는 주의거든?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
“……어. 주인이는 예전부터 그랬지. 그래서 항상 주변에 여자가 많았고, 그래서….”
“아니,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여자가 많아?
뭐야, 뭔데. 여포로 끝이 아니었어?
“……진짜로?”
“응. 많았어.”
아니, 이건 곤란한데.
기억 잃기 전 나는 대체 얼마나 씨를 이곳저곳 뿌려둔….
아니, 잠깐만.
“그럼 혹시 나 애도 있어?”
“아니, 그건 없는 거로 알아.”
그녀는 울먹이면서도 그 부분은 확실하게 답해줬다.
그래, 애만 없으면 된다.
애까지 있다고 하면 도무지 감당이 안 되잖아.
안 그래도 여포 한 명으로도 복잡해 미칠 지경인데, 애까지?
그런 미래는 감당할 수가 없다.
솔직히 여포만 해도 계속 내 반응 하나하나에 울고 웃으며 몸 움찔거리는 게 여간 복잡한 게 아닌데 만약 애까지 있었어봐.
“뭐 아무튼, 그건 그거고.”
우선 여포의 불안증세를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예전의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말없이 떠나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 좀 안심하라고. 언제까지 그렇게 벌벌 떨 거야.”
“그치만, 그때 주인이는 아무 말 없이 사라졌는걸.”
그러게. 내가 왜 그랬을까?
이건 기억이 돌아오지라도 않는 한 절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을 것 같다. 주변 사람들에게 언질조차 주지 못하고 떠날 이유가 있었던가?
“그거야 잘 모르겠고, 적어도 난 그래.”
“모르겠어. 여전히 시야에서 주인이가 없으면 막 불안하고, 언제 다시 그때로. 당신이 없던 그 겨울로 돌아갈 걸 생각하면 막, 막, 그래서. 불안해서.”
이렇게 보니 그녀는 아기처럼도 느껴진다.
부모가 없으면 불안에 떠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싶고 기대고자 하는 어린아이.
물론 그렇게 몸 움츠리는 부분에서는 살짝 감정이 동하기도 했지만, 언제까지 딱 붙어서 행동할 수는없지 않나.
“천천히 이해해. 나는 그럴 생각도 없고, 또 댁이 어디 보통 여자야? 천하에 둘도 없다는 천하무쌍. 응? 내가 만약에라도 도망가면 붙잡으면 되잖아.”
“……나랑 거리를 둘 생각이야?”
“사람은 모두 누군가에게 의존하며 살아. 그게 당연한 거지만, 그 과정에서 오롯이 자기 자신을 찾는 것도 중요하니까.”
“모르겠어. 그런 건 나한테는 너무 어려우니까.”
사실 나도 그렇다.
그 경계를 구별하는 것은 아마 누구에게나 어려운 문제겠지. 당장 나만 해도 유비군과의 거리감을 잘 잡지 못했고, 그들에게 조금씩 엮여 가담하는 관계에 이르렀다.
“적어도 내가 없다고 울지 않기. 그것부터 시작하자고.”
“……주인이한테는 그게 민폐였어…?”
“어. 적어도 화장실은 혼자 가게 해주라고.”
그 앞까지 따라오는 건 조금 너무하지 않나.
이 말에 여포의 표정이 다소 허망하게 변했다. 물론 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너무 직설적이었던 부분이 있다.
그래서 그냥 웃었다.
“나는 댁이 싫지는 않아.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도, 그래도 왠지.원래라면 질색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가슴 한편에서 자꾸 감정이 술렁거려서 말이야.”
이건 어쩌면 기억과는 별개의 영역일 수도 있었다.
설사 기억하지못하더라도 몸이 기억하는 게 있다. 여포와 나의 관계도 그런 부분에서, 기억이 아닌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이지않을까.
“난 어디로 안 가.”
“진짜로?”
“진짜로.”
그녀는 내 옷깃을 붙잡았다.
“진짜, 진짜로?”
“진짜에 진짜를 몇 번 덧대도. 적어도 아무 말 없이 떠날 생각은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그러니까그 손 좀 놓고, 앞으로는 같은 막사에 지내기보다는….”
“그건 싫어.”
어우, 이건 또 단호하네.
아예 고개까지 가로저으며 싫다고 하면 뭐라 답할 말도 없다. 그래도 다 큰 남녀가 한 공간에서 잠자리에 드는 건 어떨까 싶은데.
그, 이상한 실수가 생길 수도 있는 거고.
그러고 보면 여포와 나는 그걸 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주인아.”
“어? 어어! 왜?”
“……왜 그렇게 당황해?”
아니, 그냥 이상한 생각이.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 ……아니지. 이건 조금 중요한 문제였다. 잘 생각해보면 남녀 관계에서 성교 여부는 생각보다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주인이가 정말 안 떠날 생각이라면. 그러면 나도 조금은, 적어도 주인이가 없더라도 안심할 수 있게 힘내볼게.”
“그, 그래? 그러면 다행이지.”
“그러니까… 나한테 그 안심을 줘.”
여포는 내게 한 발짝.
그렇게 다가와서는 내 몸을 꽉 끌어안았다.
“떠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줬으면 해.”
* * *
돌이켜 생각하면 그건 맹수의 시선이었다.
마치 날 먹잇감처럼 바라보는 뜨거운 시선이었다고.
“자자, 일단 물부터. 대체 뭐가 급해서 숨까지 헐떡이면서 찾아오셨어요?”
유비는 숨 헐떡이며 달려온 나를 침착하게 받아주었다.
“아니, 그. 맹수가 있었어.”
“맹수요? 북해 내에 그런 게 있다고는 들은 적이 없는데.”
북해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아주 가까이에 있더라고.
그건 진짜 까딱 잘못했다간 바로 잡아먹혔다.
물론 그런 미인이 내게 열 띈 시선을 보내는 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감정을 정리하고 서로에 대해 조금 더 가까워진 이후로 해야 후회도 없는 게 아니겠나.
“그러고 보니 평소에 항상 데리고 다니던 여포가 없네요.”
그게 내가 피해 도망쳐온 맹수의 정체다.
“아무튼, 잠깐 실례 좀 합시다.”
“저야 환영이죠. 차라도 좀 우려드릴까요?”
“아니, 그냥 물이면 될 것 같아.”
심장이 떨려 주체할 수 없었다.
마지막에 아쉽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아직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확신을 달라고? 확신이라는 건 그런 행위로 생기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행위 자체를 거절하는 게 아니다만, 그걸 받아들이면 왠지 속박당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 진짜로.
그래서 잠시 유비와 단둘이 숨을 고르고 조금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여전히 죽간 여럿을 살피며 군무에 집중하고 있었는데,이번 북해 원정에 승리했더라도 청주성 공방전의 행방에 따라 아군의행보도 바뀌었기에 군무를 느슨하게 처리할 수는 없다던가.
“조금 바쁜가 봐? 뭐라도 도와줄까?”
“아뇨, 이건 정말 단순한 거라서요.”
유비는빙긋 웃으며 거절했고, 그래서 난 또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관찰하며 잠시 시간을 죽였다.
내 개인적인 일과는 별개로, 유비 또한 현재 갈림길에 선 걸 느꼈다.
우선 원소의 손을 들었지만, 언제까지 그들과 함께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분명 언젠가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인데, 그때 과연 올바른 선택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
“상황이 조금 복잡하지.”
“정말이에요. 만약 청주성에서 원소가 패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그게 아니라, 조조랑 원소의 얘기야.”
그 부분에서 유비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
“솔직히 말해 내가 보기에는 조조나 원소나 그게 그거야.당장 조조의 손을 잡을 수 없어 원소에게 가담한 건 좋지만, 그것도 잠깐이잖아?”
“……그렇죠.”
“조조군이랑 언제 전쟁으로 번질지모를 일이고.”
그 말에 그녀는 대뜸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껏 고민하고 걱정하는 표정. 유비의 한숨에는 분명 그러한 감정이 여럿 뒤섞여 응축된 무언가를 느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분명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쭉 달려오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제가 어디에 서 있는지도 모를 때가 생기니까요.”
앞만 보고 달리는것은 좋다.
그녀의 이상은 분명 훌륭한 것이었지만, 현 천하는 난세.
안 그래도 한 치 앞도 모를 불안정한 정세에서, 그녀는 약소한 세력을 이끌고 쭉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길을 잃을 때도 있을 것.
“원소와 조조의 균형은 현재 팽팽해요. 적어도 원소가 하북 통일을 이루지 않는 한, 그 대치는 쭉 이어지겠죠.”
“난 모르겠다만, 적어도 둘 중 하나가 침묵을 깨고 움직인다면 그때부터는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쟁이 시작될 것 같은데.”
당장 중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조조와 하북 통일을 목전에 둔 원소.
그들이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만 단위로 끝날게 아니었고, 아마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된다면 십만 단위의 인간이 서로 뒤엉켜 목숨을 불태울 터.
“저는 제대로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걸까요?”
그건 타인의 말을 빌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매정한 말이지만, 선택한 것은 유비 본인. 이 난세에 직접 검을 빼 들고 나선 것도 그녀 본인이었고, 그 이상을 내걸어 사람을모은 것도 그녀였다.
그러니 그것은 오롯이 군주가 짊어져야 할 업이겠지.
내가 답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댁이 마음에 들어.”
그래서 그냥 느낀 점만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옳다, 그르다.
제삼자의 시선으로 그것을 말하기는 쉽겠지만, 정작 나는 그 발언에 책임을 질 수 없었다. 그럴 위치도 아닐뿐더러, 그녀의 선택에 간섭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래요…?”
그런 두루뭉술한 답변이었지만, 유비의 표정이 다소 풀어졌다.
“그럼 다행이네요.”
“아랫것들을 돌봐주겠다는데, 그 아랫것인내가 마음에 들어야지. 그냥 선호와 불호의 영역이니까, 선택은 어디까지나….”
“알아요. 제가 하는 거죠?”
바로 그거다.
적어도 군주라면, 누군가를 이끄는 이라면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후회할 수도 있고, 고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은 것은 오롯이 군주의 영역.
“참, 호세 씨도 가끔 보면 엄격하다니까요?”
“나한테 물어본 게 잘못이지. 난 권력자에 그리 옹호적인 사람은 아니잖아?”
“그도 그러네요.”
그녀는 빙긋 웃으며 다시 죽간을 집어 들었다.
이후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죽간을 움직이며 부딪치는 소리와 가끔 들려오는 그녀의 한숨. 정적 사이로그런 소리가 섞여 멍하니 있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겨울의 한기가 걷혀제법 푹한 온도였고, 한 번 눈을 감으니 금세 노곤하게 풀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렇게 점차 축 늘어졌을 때쯤.
“유공, 실례하겠습니다.”
“어머? 제갈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잠깐 잠들었던가.
눈을 떠보니 천막을 걷고 제갈근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그런데 표정이 썩 좋지 않은 게.
“……유공. 조조가 군을 일으켰습니다.”
“네?”
“목적지는 서주. 이미 팽성 일대는 공격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의 보고는 분명 유비군의 행보를 크게 뒤흔드는 정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