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07. 이름을 부른다 (1)
꿈을 꾸었다.
바닥에 쓰러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그런 나를 대신하여 누군가가 앞으로 나섰고, 죽어간다. 한 명이 아니었다. 이제는 떠올릴 수도 없는 풍경을 반복한다.
그것은 죽음이었다.
압도적인 폭력. 나로서는 감히 저항할 수도 없는, 간신히 맞섰으나 곧 죽음이 내 목을 거두려던 것을 누군가가 끌어낸다.
중요한 이들이었노라고 떠올렸다.
그런 이들이 나를 끌어내, 그 죽음의 앞에 목을 내민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혈액은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대장은 살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그 검은 그림자 드리운 죽음은 계속 무언가를 휘두른다. 그끝자락에 보이는 월아가 눈에 선명하게 새겨질 때쯤, 갑자기 시야가 반전한다.
선명한 꽃내음이느껴지는 풍경.
화사하게 드리우는 봄철의 햇빛을 배경으로 나와 마주하는 그림자. 음영이 잔뜩 끼어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그림자는 떨리는 손길을 뻗는다.
‘나도 미안해.’
누구에게 고하는 사죄인가.
감정이 요동친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앞서 내게 다가오던 죽음과 이것은 같은 이였다. 그것의 정체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몸은 천천히 그것에 다가가 끌어안는다.
그것과 나는 서로에게 사죄의 뜻을 비쳤다.
의미는 모른다.
이유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 가슴에 요동치는 감정뿐. 단지 눈앞에 일방적으로 비추는 회상과도 같은 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분명 그것에 손을 뻗었다.
그것을 용서했고, 또한 그것에 용서를 구했다.
이것은 누구의 꿈인가.
그조차 모르며 나는 꿈에서 깨어난다.
* * *
“……인아, 주인아?”
“어으, 머리야.”
잠에서 깨자마자 심한 두통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돌렸는데, 여포는 이쪽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몇 시일까. 아직 막사 바깥으로 빛이 드리우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날이 밝지는 않은 듯싶었다.
“괜찮아?”
“뭔가 꿈을 꾼 것 같아.”
희뿌연 기억 가운데 선명하게 내 목 언저리까지 드리우던 죽음을 느꼈다. 그것과 교류하던 감각까지도 선명했지만, 그 상세한 과정까지는 떠올릴 수 없었다.
이건 내 잃어버린 과거의 일일까.
“그나저나 왜 내 침상에 누워있는 거야?”
“……걱정돼서?”
아니 뭔 걱정 된다고 옆자리에 누워있나.
심지어 그녀의 손은 여전히 내 앞머리를 향해있어, 바로 얼마 전까지 내 앞머리를 쓸어내리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 돼. 침상으로의 침입만은 허락할 수 없어.”
“쯧.”
왜 혀를 차나. 이건 당연한거야.
“그나저나 무슨 꿈을 꿨기에 그래? 식은땀도 잔뜩 흘리고, 끙끙 앓는데 진짜 걱정했다구. 이건 진짜야.”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실제로 흐릿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원래 꿈이라는 게 다 그런 것이었지만, 이번 건 더 특이하게도 기억이 금세 날아갔다. 분명 떠오르는 건 한두 가지 정도인데.
“내가 바닥을 나뒹굴고, 누군가가 날 죽이려고 다가와. 그런데 주변에 있는 이들이 날 지키겠다고 그것에몸을 던지더라. 무슨 개꿈인지.”
“……그건….”
문득 그녀의 표정이 흐려진 게 보였다.
개꿈이긴 하지. 물론 이게 내 과거와 연관된 흔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전부 떠오르지 않은 단편적인 것이기에 의미도없는 것이었다.
“모르겠다. 정작 그게 무슨 꿈인지도 모르겠고, 정작 마지막에는 서로 미안하다고 하는 식으로 꿈이 끝난 것 같은데, 잘 떠오르질 않아.”
“……기억이 돌아오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물론 귀찮은 일도 함께 몰려올 듯한 느낌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아예 모르는 것은 시작부터 달랐다.
“아마 그건 나랑 관계된 기억일 테니까.”
“그쪽이랑??”
여포는 씁쓸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 말하고 싶지 않은지,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는 다시 침상에 몸을 눕혔다. 문제는 여기가 내 침상이라는 것.
“슬슬 댁 자리로 돌아가지?”
“오늘만, ……안 될까?”
염병.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에 약하다고.
애절하게, 그러면서도 무언가를 바란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본다. 살짝 떨리는듯한 시선에 그만 그녀에게 등을돌려 침상에 누웠다.
“……오늘만이요.”
“응. 앞으로도 종종 같이 자자.”
사람 얘기 제대로 들었나?
이미 등 돌리고 누운지라 여포의 표정까지는 볼 수 없었지만, 내 몸통을 살짝 끌어안는 통에 그 체온이 너무 선명하게 다가왔다.
부드러운 몸의 감촉이. 특히 등 언저리로 맞닿은 그녀의 말캉한 가슴이 내 등에 짓눌려 꾹 눌러오는 게 느껴진다. 나쁜 감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걸 쉽게 받아들이기도 조금 그런데.
“아니, 들러붙지 말라고.”
“싫어?”
“아니 좋긴 한데. 그건 그런데.”
“그럼 됐잖아.”
그녀는 픽 웃으며 내 뒷덜미에 제 이마를 맞댔다.
“주인이도 참 이상한 데서 까탈스럽다니까.”
에라 모르겠다.
그래 뭐, 나 좋다는데. 물론 그 이유를 몰라 살짝 거리감은 들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 애절한 마음을 쉬이 내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당장 시야 바깥으로 내가 사라지면 눈물부터 펑펑 쏟는 여인을 두고 내가 뭘 하겠나. 이것 또한 천천히 고쳐가야 할 부분이겠지만, 우선 날 이렇게 필요로 하니 조금은 받아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잘자.”
“응, 주인이도 잘자.”
찝찝한 꿈 이후로 재차 잠을 청한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여포는 내 꿈의 내용을 듣고 아마 그건 자신의 이야기일 거라고했다는 점.
그 부분에서 우리가 어떤 관계였는지 재차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본인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이런 건 천천히 알아가면 좋을까.
안 그래도 여포는 정신적으로 다소 몰려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런 그녀를 닦달하며 과거를 캐내고 싶지 않았다.
“주인아.”
그녀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사랑해.”
나는 그 사랑의 이유를 모른다.
그러니 답해줄말도 궁한 것.
그렇기에 나는 침묵했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한 모양인지 등 뒤편으로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렸다.
* * *
북해의 함락.
전예의 항복으로 인해 청주의 판도는 크게 흔들렸다.
우선 청주자사 전해가 이끄는 군은 북해를 포함해 청주 동부에서 지원을 받아 군을 꾸렸는데, 그 보급로가 차단당한 것이 가장 뼈 아픈 부분.
게다가 청주자사라고 해도 공손찬이 멋대로 임명한 것이었기에 청주 내 지지를 완벽하게 얻은 것도 아닌지라, 이번 패배로 청주 토박이를 비롯해 전해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움직임도 더러 포착되었다.
그 기회를 몰아 원담은 맹장 장합을 선봉으로 내세워 대대적인 청주성 공성에 돌입했다.
병력으로만 치면 아직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후방에서 들려온 대패의 비보로 떨어진 사기와 등 돌리기 시작한 청주 내부의 분위기 탓에 전해의 군은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도의 집무실.
조조와 진소연을 마주하여 가후와 장수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리 만나니 반갑군.”
“……대장군의 무한한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 올리겠습니다.”
“황족의 일원이며 황실에 거역하는 유표가 잘못이지, 상관의 명을 거역하지 못한 그대가 어찌 죄인이겠는가.”
북형주는 결국 조조의 압박에 항복의 깃발을 내걸었다.
조운과 조인을 필두로 한 조조 정예병의 공세는 아무리 지략을 짜낸다고 하여 쉽게 맞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대들이 지금이라도 진정한 황제 폐하를 보필할 일원으로 아군에 합류한 것에 감사를 표한다.”
“하옵시면 저희는….”
장수의 말에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정식으로 조정에 출두하도록. 황제 폐하께서는 그대들을 친히 맞이하고 싶다 하셨고, 그 부분에서의 조율은 그 성은에 감읍한 이후로 해도 좋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대장군.”
가후는 마지막까지 조조를 살폈다.
현 조조군은 서주와 하북, 사예주까지 적이 많았다. 가담할 것이라면 지금 가담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지만, 조조의 대응에는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본 조조의 모습과 각 세력의 정세로 보아 조조가 장수와 자신을 섭섭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론을 냈다.
그렇게 장수와 가후가 떠난 직후.
“이걸로 문제는 반쯤 처리됐군.”
조조는 그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간 계속 골머리를 앓던 북형주의 일이 해결됐다. 완까지 아군 수중에 넘어왔고, 그곳만 잘 틀어막을 수 있다면 유표의 문제는 일단락 정리할 수 있는 것.
소연 또한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남방으로는 우선 안정이네요.”
사예주는 아직 혼란한 상태였지만, 그 부분에서 걱정하였던 동탁계 잔존 세력이 점차 와해하기 시작한 것을 포착했다.
아예 신경을 거둘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그 방면으로 돌렸던 병력 일부분은 다시 허도로 귀환시켜도 괜찮을 것 같았고, 그러면 당면한 문제는 오직 하나.
“그대여. 본인이 그대의 생각을 한 번 맞춰볼까?”
“또 뭔데요.”
“유비를 찢어 죽이는 게 옳다고 생각했지 않은가.”
소연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는데, 그녀는 그 반응도 즐겁다는 듯 살짝 웃었다. 사실 예전부터 진소연은 유비를 쳐야 한다고 조언하던 부류 중 하나였다.
조조는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다리를 꼬았다.
“왜 그리 유비를 의식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아군의 손을 쳐내고 원소와 협력한 것에서 적임은 명백해졌다.”
“유비는 직접 청주로 병력을 이끌고 떠난 상황이에요.”
“그 여자와도 참 연이 깊구나.”
반동탁 연합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주 공방전과 원술 토벌전까지.
아군으로 만나 적으로 재회했으나, 다시 아군으로 뭉쳐 함께 싸웠다. 그리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또다시 적으로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이것은 그녀와 자신의 운명일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인의 길을 가로막는다면 그 누구라도 용서치 않는다.”
“그러셔야죠.”
소연은 살짝 눈을 감았다.
그간 천하를 통일하여 혼란을 잠재우겠다는 목표 하나에 몇이나 되는 인명이 희생당했던가. 그중에서는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제 그 누구도 멈춰 세울 수 없다.
“조인과 조운을 불러들이도록.”
“조인 장군은 혹시 모르니 그 방면을 담당하도록 하는 게 좋지 않나요?”
“무얼. 유표 그 늙은이가 직접 군을 이끌 것 같은가? 과거 젊었을 시절의 유표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는 너무 늙었다. 스스로 몸을 움직이기에는 제 가진 것이 아까워 한참 망설일 노인네에 불과하다.”
완에 방위군을 배치하는 것만으로 유표는 틀어막을 수 있다.
이제 원소의 편을 든 서주마저 점거하고 난다면 모든 사안은 끝. 아직 공손찬과 일진일퇴를 반복하는 원소에 대비하여 군비를 확장하는 일만 남게 된다.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눈을 감는다.
저 너머에는 원소의 형상이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원소에게 다가가는 길.
그 남자만 잡으면 천하의 절반을 손에 거머쥘 수 있다.
“소연, 조금만 더 고생하도록.”
전호가 죽은 이래로 소연은 어딘가 망가졌다.
조조 또한 가끔 사색에 잠겨 쓸쓸함을 느꼈지만, 진소연의 경우에는 가끔 정신이 나가 몸을 벌벌 떨며 자해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던 것이 유일하게 남은 불안이었다.
처음 그 장면을 보았을 때 얼마나 식겁했던가.
그런 그녀의 말에 소연은 혀를 차 일축했다.
“괜찮으니까 당장 앞으로의 일만 생각하세요.”
“하여간, 그대도 참 쌀쌀맞구나.”
소연은 이를 꽉 깨물었다.
유비와의 전면전을 두고 다른 잡생각을 떠올릴 여유는없다.
그 여자가 서주에 묶여있을 지금 쳐내는 것이 이상적. 만약 형주로 도망가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원래 정해졌던 역사를 재차 반복하게 될 우려가 있었다.
삼국지의 역사에서도 유비는 마지막까지 조조의 발목을 잡아 천하를 세 갈래로 쪼개지게 한 장본인과도 같은 것.
죽일 수 있다면 반드시 죽여야 한다.
“이번 기회에 유비는 반드시 죽여야 해요.”
“그대도 참, 유비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지.”
조조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그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외부의 일은 어느정도 해결됐고, 이제 조조군의 창끝이 겨냥할 곳은 바로 서주.
유비와의 오래 묵은 악연을 청산할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