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06. 삼파전 (4)
전예는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두드렸다.
“할 수 있는 모든 대처는 마쳤다.”
북해에서의 공성전을 피해 청주성으로 위협을 가한다.
일견 그것은 바로 원소에게 합류하기 위한 것으로도 보였지만, 순리적으로 생각해 청주성의 공성전에 오천 가령의 병사가 낀다고 그 시일이 크게 앞당겨지는 것도 아니었다.
우선 그 행보를 막긴 해야 하니 병력을 움직인다만, 그들의 목표가 자신들과 들판에서 전면전으로 끌고 가기 위함이라는 걸 이해했다.
공성전이 하기 싫어하는 적을 상대를 정석적으로 상대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공성전을 들판에서 시켜주면 그만이었다.
“준비는 끝났는가?”
“네, 도위 어르신. 내부로도 별도의 수레를 몇 쌓아두었으니 측면으로 군이 돌더라도충분히 대응할 수 있습니다.”
“궁수의 준비는?”
이에 부관은 살짝 표정을 흐렸다.
물론 북해 방위군은 어디까지나 수성하기 위한 병력이었기에 활은 잔뜩 마련되어 있었지만, 급조한 병사에게 활을 숙달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명하신 대로 시위를 메워 당기는 것은 가르쳤습니다만, 정확한 조준까지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걸로 됐다.”
어차피 목표는 저 들판 한가득 메울 것인데 구태여 위치까지 지정할 필요도 없었다.
이대로 버틴다.
보급선까지 늘어진 이상, 적은 청주성으로 향하거나 아군을 공격할 터. 전예는 이중 후자의 확률이 높다 보았고, 그렇다면 저 빈 수레의 성 너머로 적이 즐비하게 늘어질 게 뻔했다.
그리고 드디어 뿔 나팔이 울린다.
북을 치는 소리와함께 깃발이 힘껏 펄럭인다.
“오는가.”
녹색 깃발이 사방으로 펄럭인다.
확실히 서주에서 그간 진득하게 키운 정예다운 위용은 있었다. 대열 하나흐트러뜨리지 않고 보폭을 맞춰 천천히 다가오는 병력은 과연 장관인 것.
하지만 이쪽도 그에 맞춰 모든 걸 설계했다.
“적 방향을 향해 수레를 옮겨라. 벽을 세운 즉시 삼열로 늘어서 시위를 메우고 오늬를 먹여 대기하도록.”
“예, 도위 어르신!!”
적은 서주에서 출발해 청주 깊숙이 진군했다.
아마 이 이후로도 두어 차례 공세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것마저 전부 막아낸다면 그땐 아군의 차례.
보급도 끊어져연이어 무기력한 전선에 몸을 맡긴 군을 와해하는 것정도야 쉬운 일이었다.
전예는 지휘봉을 잡고 전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때, 뒤에서 의문의 함성이 일었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적 기병입니다!!”
“기병?”
서주군의 규모에 기병이라고 해야 수백 언저리밖에 되지 않는 것.
시선을 돌려 저 후방을 바라보니 과연 흙먼지가 일며 기병의 모습이 드러났지만, 그 숫자는 썩 많지 않았다.
전방이 두터우니 후방을 공략했는가.
전예는 그 또한 예상했다.
“허둥대지 마라. 후방으로 돌린 보병을 중심으로 밀집하라! 목책을 앞세우고 버텨, 이후에는 중앙의 군으로 포위하면 그만이다.”
그 귀한 기병 전력을 이렇게 허비하나.
그만큼 몸이 달아오른 듯싶었지만, 후방으로 침입한 기병만 포위해 섬멸할 수 있다면 적의 유일한 기동력도 끊어낼 수 있었다.
유비라고 했던가.
서주목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과연 행동에 조급함이 묻은 게 보였다. 이 고착을 파훼할 유일한 방책이던 기병을 헛되게 쓰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명백한 사실.
하여 전예는 씩 웃었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그 기병의 선두로 선 남자.
장비는 그 긴 사모를 견주며한껏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개인의 무력으로는 전장을 승리로 이끌 수 없다.
이것은 고금동서로 자명한 사실이었지만, 반대로 그 한 명의 존재로 전장의 판도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고는 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전군, 거차아아아아앙!!”
일반인의 키를 훌쩍 넘긴 사모로 전방을 가리킨다.
목책 몇과 보병의 밀집 대형이 보였지만, 지금 이 돌파력이라면 충분히 뚫어낼 수 있다.
장비는 십수 년이 넘게 전장을 구르며 쌓인 경험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적의 방비는 제법 견고해 보였지만, 그와 달리 병사의 질이 뛰어나지 못하다.
저런 병력은 첫 접촉의 기세로 찍어누를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려라! 그 선두에는 언제나 내가 있다!!”
그 이름 장팔사모.
장비라는 인물을 나타내는 병기이기도 했지만, 기병 돌격을 할 때의 사모는 창으로 돌변하여 그 길이에서 오는 힘을 한껏 뽐내고는 했다.
달려오는 기병과 마주하는 보병.
흙먼지와 함께 드디어 보병의 무리로 기병의 충돌이 벌어질 때. 장비는 사모를 힘껏 젖혀,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 크게 휘둘렀다.
* * *
전열에서의 싸움은 먼저 화살 세례를 방패병을 앞세워 막아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방패를 무기로 하여 그저 앞으로.
그렇게 목책에 도달한 순간부터는 그것을 기어오르거나 당겨내 치우고자 하는 아군의 몸부림과 끝까지 지키며 창을 내지르는 적군의 혼전으로 접어들었다.
몸이 가볍다.
땅을 한 번 크게 박찬 것만으로 인간 하나 높이만큼 뛰어오를 수 있었다.
그대로 빈 수레를 하나 딛고, 재차 박차며 앞으로 뛴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이었는데, 이 넘칠 듯한 힘에서 본능적으로 행동까지 이어졌다.
수레 벽 안쪽으로는 청주병이 잔뜩 밀집한 게 보였다.
그곳에 단독으로 뛰어든다.
평소라면 미친 자살행위라고 규탄할 일이었지만, 이 무슨 일인지도 몸이 물처럼 자연스레 움직이며 적의 움직임에 대응할 수 있었다.
다 대 일의 상황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죽고 싶은 것부터 앞으로.”
이게 자신감인가.
예전이랑은 상상할 수도 없는 상태.
게다가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였을 뿐인데도 눈으로 상대하는 적 다수의 움직임을 쫓을 수 있었고, 반대로 그것을 가볍게 몸 비튼 것만으로 피해 반격을 꽂아 넣었다.
혹시 나, 진짜 강해진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을 무렵.
“뭐 이런 잡병들한테 고전해?”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없다.
그런 간단한 상식이 지금 이자리에서 부서진다.
내 눈으로 확인한 것만 다섯.
여포는 이쪽으로 다가오며 고작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그 화극의 창대에 맞아 무려 다섯이나 딸려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분명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하여간, 진짜 주인이는 여전히 약골이네.”
“미치겠네. 그쪽이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응. 이건 그냥 주인이가 약한 거야.”
주인이라는 저 이상한 칭호는 달갑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왕 주인이라고 부르는 거 배려라는 부분까지 챙겼으면 어떨까 싶었다.
여포는 빙긋 웃으며 내 옆에서, 어깨를 맞댔다.
“그러니까 내가 지켜줄게.”
“……염병.”
방금 자존심이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그와 별개로 여포의 존재는 큰 도움이 됐다.
유비를 돕겠다고 했지만, 이미 빈 수레의 벽에 도달해 난전으로 이어진 이상 내가 도울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고, 그렇다면 그 한 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돕고자 한 상황.
그런 난전에서 강자의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돌파구가 되는 법이다.
바로 이렇게.
“자자! 전쟁이잖아, 싸움이잖아!!”
속도도 속도였지만 힘 자체가 차원을 달리했다.
그녀의 방천화극은 내 눈으로도 겨우 쫓을 정도의 속도를 자랑했는데, 그에 베이는 적은 물론이거니와 그 경로에서창대에 맞은 이도 바닥으로 나뒹굴며 쓰러진다.
그런 일방적인 공방에 주변 적병의 기가 질린 게 눈에 띄었다.
이게 천하무쌍.
그 한 번의 휘두름에는 힘이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꺼림칙한 감각. 그것이 아군의 것이라면 그 무엇보다 든든하겠으나, 반대로 적으로 만난다면 어떠한가.
그 월아의 끝자락이 나를 향한다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너무 앞서가지 마쇼!”
“안 그래. 곁에서 안 떠날 테니까 안심해.”
아니, 내곁을 떠나지 말라는 게 아니고….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겁먹은 것 같잖아. 물론 여포보다야 한참 후학이었고, 약자라고 꼽힐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천하무쌍과 견주었을 때의 얘기.
내게는 여포처럼 한 번의 휘두름으로 공기까지 찢어버릴 듯한 힘은 없었다. 속도 또한 그녀와 비교할 수 없는 게 사실.
그렇지만 나 또한 어디서 약하다고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일 검, 또 일 검.
그렇게 적병 하나씩을 순차대로 눕힌다.
과거와는 다른 게 적의 움직임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움직여야 할 경로를 자연스럽게 탐색할 수 있었다.
판단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게다가 이 검, 이름은 청강이라고 하던데 이것의 예리함도장난이 아니어서 창대로 막는 적병은 그 창대째로 베어버린다.
“저기요! 무리 좀 하지 마세요!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나와 여포가 등졌던 수레가 치워지며 그 안으로 유비가 병력을 거느리며 다가왔다.
잠시라고 생각했던 것이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정신 차리고 주변을 바라보니 우리 둘 주위로 숱한 시체가 누워있는 풍경이 보였다.
그 비릿한 혈향도 이제야 겨우 코에서 느껴진다.
“갑자기 안쪽으로 사라져서 진짜 걱정했잖아요.”
“응? 귀 크… 아무튼! 내가 붙어있는데 네가 왜?”
“……그건….”
이러는 사이에도 전장은 가열되고있었다.
유비를 따라 나와 여포가 달려든 부근의 수레를 치운 병사들이 물 밀듯몰려오고 있었고, 그 균열은 점차 넓어져 벌어지기 시작한 것.
“거, 수다 떨 시간이 있던가?”
적의 견고하게만 보인 수레에도 빈틈이 생겼다.
그 과정에서 조금 더 조직적인 대응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작 나와 여포가 그 안쪽으로 뛰어들었음에도 적의 포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건 장비가 성공했다고 보는 게 옳을까.
“우선 이대로 진군합니다. 호세 씨, 이젠 제 뒤를 따르세요.”
“그 명, 받들겠나이다.”
픽 웃으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전예의 전술은 분명 정석적이었다.
보편적인 방법으로는 수레까지 대거 동원한 방진을 동일 병력으로 뚫기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닌 것.
물론 기동력에는 큰 하자가 생기겠지만, 싸울 생각이 없는 북해 방위군에게는 그런 건 결점조차 아니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그 상대가 나빴다는 것일까.
기병의 돌파력은 그 선두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유비군 기병대의 선봉은 장비. 비록 관우에 비해 이름은 덜 알려졌지만, 아는 이는 아는 것으로 실질적인 무력 자체를 놓고 비교한다면 그 관우보다 우위를 점하는 게 바로 이 남자.
그 장팔사모의 끝자락은 예리했다.
가로막는 모든 이들을 길이에서부터 압도하며, 그 긴 사모를 마상에서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목책을 걷어내고 적병을 가른다.
“허, 이 무슨.”
전예는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지금 보는 이게 현실은 맞는가.
고작 한 명이었다.
기병 전력이 아무리 강대하다고 해도숫자의 한계는 명백. 게다가 목책을 세워 방진으로 대응한 시점에서 결집력은 갖췄다고 생각했는데,저 중앙을 돌파하는 남자의 힘에 그 모든 게 무너져내렸다.
강력한 힘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략이 된다.
그는 예전 스승에게 들었던 말을 상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후열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 균열에 대응하지 못한 사이 전방의 수레 벽에도 균열이 생겨, 그것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견고한 방진은 작은 균열만으로도 깨질 수 있으니.
전예는 그것을 바라보며 지휘봉을 던졌다.
“아군의 패배다.”
적의 전투력을 간과했다.
물론 서주의 병력이 정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개인으로 전세를 바꿀 수 있는 맹장의 존재까지 염두에 두지는 못했다.
애당초 그런 무장의 존재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전예는 허망함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전략은 분명 도중까지는 완벽하게 맞아들어갔다. 어쩌면 장비와 여포라는 천재지변에 마주한 것이 불행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 두 무장을 탓하기보다는 그저 이 패전을 수긍했다.
“……공손 장군께서도 이걸로 끝이겠군.”
아직 승패가갈린 것은 아니었지만, 북해가 적에게 넘어간다면 그곳을 통해 청주성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었다.
당장 청주의방위군이 원소군과 수평선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기존 방위시설과 청주성을 수중에 두고 있었던 덕분이었는데, 북해가 무너지며 그 이점 또한 점차 까먹기 시작할 것.
청주가 넘어간다면 공손찬에게는 정말 유주밖에 남지 않는다.
반면 원소는 이번 청주 원정을 성공 짓게 된 순간 부로 병주와 기주, 청주에 이르는 하북 삼주를 손에 넣어 그 물자를 토대로 공손찬을 압박하게 된다.
“이 또한 운명인가.”
전예는 쓸쓸히 웃었다.
모시는 군주의 패배를 직감하는 것은 부하 된 도리가 아니었으나, 이미 전세는 예전부터 공손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있었다.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의 일은 더더욱 공손찬에게 가혹하게 돌아갈 것. 그나마 군신의 예를 다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행보는 점점 저 자신의 미래를 지워 자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게 마지막 군신의 예였다.
“항복이다. 백기를 걸어라.”
“도위 어르신….”
“고작 첫 교전에서 패할 줄은 몰랐지만, 패배는 패배. 이대로 전투를 이어가면불필요한 희생자를 낳을 따름이다.”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전예의 대장기는 내려가고 그 자리를 백기가 대체했다.
한 번의 충돌과 완전무결한 패배.
북해의 전투는 시간이 지연됨과 동시에 질질 끌렸지만, 단 한 번의 교전으로 승자와 패자가 결정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