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05. 당신의 이름 (1)
청주군과의 대치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애당초 상대의 목적은 아군의 차단. 그게 불가능해진 지금, 아군과 전면전을 벌이건 퇴각하건 둘 중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는 셈이라던가.
설령 아군을 격파하더라도 황하 이북에서 움직이고 있을 원소의 군은 또 어떻게 상대하겠나. 전력을 조금이라도 더 온존해야 할 청주 방위군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도 설마 현까지 버리고 도망갈 줄은 몰랐는데.”
나름대로 방비를 갖춘 곳이고, 무엇보다 피아의 병력 차이는 2배에 달했는데도 이리 쉽게 버린다고?
그 의문에 량이 꼬맹이가 고개를 들었다.
“적에게 중요한 것은 원소군의 대비. 아군은 그 조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 그들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아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싶을 것.”
“그러면 우린 이대로 계속 휘두르면 되나?”
“너무 깊게 나가면 역으로 공세에 놓일 우려 존재.”
적당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걸까.
사실 생각해보면 이 전쟁은 결국 원소 놈 좋으려고 하는 전쟁이었다. 구태여아군이 출혈을 각오할 필요도 없는 셈.
유비에게 있어 조조와 원소 모두가 상처 입어주면 감사할 테니까.
어차피 내가 고민할 문제도 아니어서 어깨를 으쓱이고 재차 발걸음을 놀렸다.
“그나저나 청주는 뭐 없네.”
나름 이곳이 현 내에서는 가장 발전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정작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딱히 이렇다 할 특별한 것도 없었다.
뭐, 중앙에서 벗어난 현이란 대부분 이런 걸까.
“다소 변방이니까 어쩔 수 없음.”
“나름 내륙이니까 괜찮을 줄 알았지.”
황건적이 휩쓸고 간 이후로도 제대로 일어서지못했을까. 듣자 하니 얼마 전까지는 도적 떼도 만연하여 내부적으로 재건이 이뤄지지 않았다고들었다.
실제로 이 근방으로 계속 돌아다닌 결과, 실거주 인구보다 발전하지 못한 걸 느꼈다.
청주 중심부라는 북해나 제는 좀 나으려나.
“뭐, 그래도 있을 건 있겠다. 썩 나쁘지는 않네.”
물론 기대했던 것보다는 다소 떨어졌지만.
앞으로 한동안은 이곳에 진을 치고 주둔할 예정이었다. 기존 주민들의 불안함을 고려해 진영 자체는 다소 떨어진 곳에 세웠지만, 잠시 돌아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꼬맹아,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없음.”
“그러면 키 안 자란다고 했지. 뭐라도 좀 먹자.”
일단 내가 배고팠다.
청주라고 해도 서주와 그리 동떨어진 곳은 아니었기에 식생활에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다마는, 그래도 이 지역에서만 먹는 음식이 있지 않을까?
물론 봄철도 오지 않아 크게 기대할 수는 없겠다만.
하여 꼬맹이의 손을 붙잡고 이곳저곳 돌아봤는데, 정작 돌아보면서 느낀 게 생각보다 노점상 같은 것도 드물다는 거였다.
그래도 이 근방으로 호의 숫자만 천 이상은 된다고 들었는데.
“와, 포기. 진짜 뭐 없네.”
“적당히 먹으면 안 됨?”
“안 된다고.”
아무리 십 대 중반이라고 해도 내가 보기엔 그저 꼬맹이였다.
이런 애를 데리고 무슨 술 파는 곳이냐. 물론혼자였다면 홀라당 들어가서 술 한 잔 걸치겠지만, 동행이 있다면 조금 괜찮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조금만 더 돌아보고 없으면 그냥 돌아가자.
그런 생각으로 조금 돌아봤을 무렵.
문득 시야 끝자락에 붉은색이 스쳐 지나간 걸 느꼈다.
너무 순식간이라 제대로 살필 수 없었지만, 분명 붉은 무언가가 저 골목길 한편에서 비추다가 이내 사라졌다.
왠지 모를 기시감에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
“아, 별거 아냐.”
누군가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아 그게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세상에 뻘건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드문 것도 아니겠거니와 이쪽에 해를 가할 것 같지도 않아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나저나 청주는 진짜 아무것도 없네.
어떻게 식사 한 끼 제대로 해결할 곳도 드무냐.
* * *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시야라는 것은 가끔 거짓말을 할 때가 있는데, 가령 미친 듯이 술을 마시면 가끔 아른거리며 제 앞에 거짓된 허상을 비추고는 했으니까.
다시는 보지 못할 거로 생각했던 얼굴이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몸을 먼저 숨겼다.
“야, 너 돌아가면 장기나 두자.”
“약해서 재미없음.”
“미쳤냐? 나도 그동안 잔뜩 공부했거든.”
그는 즐겁게 웃으며 소녀 한 명을 데리고 길을 걷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 오른쪽 턱밑과 콧잔등에 난 상처부터, 당당하게 웃는 얼굴까지. 하물며 그 목소리는 지금도 눈 감으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달뜬 숨을 내쉬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서려 했고,
이내 또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 다른 사람이면 어떡하지?
진짜일 수도 있어. 하지만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잖아.
그래도, 그냥 기적적으로 닮은 사람일 수도 있어. 기대하면 안 돼. 그치만 저 모습은 그의 생전 모습과도 너무 유사한데?
그런 의문과 반박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았다.
애당초 진짜 살아있었다면 왜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았겠나. 그가 자신들을, 그 진소연을 버리고 떠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복잡한 생각과는 별개로 그녀의 호흡은 점차 거칠어졌다.
그야 꿈에 그리던 풍경이니까.
그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사람. 죽을 만큼 그리웠던 사람. 내 몸과 심장, 마음까지도 전부 가져갔으면서 홀연히 떠난 야속한 사람.
그녀는 그에게서 새로운 삶을 얻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여포는 고개를 들어 닿지 않을 손길을 뻗었다.
“주인아.”
정말 당신이 맞느냐고 묻고 싶었다.
만약 진실이라면 왜 지금까지 연락 한 번 없었냐고. 왜 그렇게 홀연히 모습을 감췄냐고 묻고 싶었다.
허도 염상의 밤.
그녀는 죽을 기세로 사방을 뒤졌고, 결국 찾아낸 것은 다 불타 사라지기 전 겨우 발견한 그의 호패뿐이었다.
이렇게 기대했다가 다른 사람이라면 어떡할까.
지금이라도 손만 뻗으면 그 등을 쫓을 수 있었다.
닿고자 하면 언제든 닿을 수 있었지만, 그녀는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해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무서웠다.
갑자기 세상이 뒤집힌 것만 같았다.
이런 기대와 희망을 언제 느꼈던가.
가슴 한편에 부풀어 오르는 벅찬 감정은 간질간질하여 지금 당장에라도 앞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 모든 게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게 너무 두려웠다.
그렇게 다가갔는데, 만약 아니라고 하면.
여포는 그 상실을 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천하무쌍 여포.
그녀는 제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게 무슨 천하무쌍이야.”
그저 진실을 확인하는 게 무서워 주저앉고 말았는데.
지금의 자신은 그저 한 명의 여인에 불과했다.
세상을 살며 처음으로 접한 온기에 녹아내렸다. 심장을 꽁꽁 얼린 얼음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곳에 남은 것은 한 사람에게 일희일비하는 겁쟁이였다.
그러는 사이 그 등은 점차 멀어져만 갔다.
* * *
동무 일대에 진을 치고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전해군은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제갈 자매의 예상대로 황하를 건널 원소군을 주력으로 잡고 전쟁에 준비하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나는 제갈량과 함께 군을 조련하기에 앞섰다.
유비가 내린 명령은 요 꼬맹이에게 주어진 부대를 관리하고, 제갈량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
요컨대 부관이 된 셈이었다.
하여 오늘도 아침부터 바로 시찰이 있을 예정이었다.
“……이건 또 뭐야.”
침상에서 일어나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 내 막사 바로 앞에 놓인 꽃 한 송이를 보았다. 누군가가 꺾어 일부러 올려둔 것 같은 그것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이런 계절에도 꽃이 피네.”
평소라면 꽃에 흥미를 두지 않겠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눈에 밟혔다.
그 샛노란 꽃망울이 썩 볼만해 땅에서 주워 품 안에 넣었을 무렵.
“부, 부관 어르신!!”
저 멀리서 병사 여럿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저마다 허둥지둥하여 부산하기 그지없었는데, 다짜고짜 이쪽으로 달려와서는 예의도 갖추지 않고 날 에워싸기 시작했다.
물론 예의 같은 걸 갖추라고 할 생각도 없다마는.
“아니, 또 뭔데.”
“귀, 귀신이 나타났습니다요!!”
……뭐?
“내가 잠이 덜 깼나.”
“귀신입니다요, 귀! 신!!”
착각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귀 아프니까 소리는 좀 적당히 질러라.
머리를 흔들어 잠을 깨고 주변을 돌아보자니 이 자리에 모인 병사들은 저마다 귀신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아니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세상에 귀신이 어딨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다 큰 어른들이 이리 몰려와 행패냐? 너희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는 거야?”
“아닙니다! 진짜, 진짜 귀신이 있다고요. 이 친구가 봤답니다!!”
어이가 없어서 시선을 옮겼는데, 여 병사가 손을 들고는 내게 다가왔다.
“부관님. 진짜예요. 그, 시뻘겋게 피 머금은 머리카락. 게다가 연신 울면서 무언가 중얼거리는 귀신을 분명 봤습니다.”
이에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
잠시 입을 다무니 저마다가 자신도 보았다며 입을 열었다.
물론 나 자신이야 귀신 같은 것에 흥미를 느낀 적도 없고, 또한 그런 괴력난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만 병사들의 불안을 못 본 척 넘어갈 수도 없다.
“그래서, 발견된 곳은?”
“저, 저는 그…, 부관님의 막사 근처에서 보았습니다.”
“저는 밤에 소피나 보러 나갔다가, 지나가는 그것을…. 그건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어찌 하늘을 날고, 또 어찌 그리 빠르게 움직인답니까요!”
귀신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차례차례 들어오는 목격담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귀신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당장 아군 군영 내부에 신원 불명의 누군가가 침입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이걸 유비에게 보고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도 이내 그들을 향해 말했다.
“한 명이라도 좋으니 목격했다는 이들은 정보를 취합해라.”
“그, 혹시 청주에서 죽어간 황건적의 원한이….”
“아냐, 그건 처녀 귀신이었다고. 분명 님을 잃고 고독하게 죽어간 귀신이 짝을 찾아 배회하는 게 분명해!”
내 어이가 없어서.
하여간, 진짜 다 큰 어른들이 모여 이 무슨 망신이냐.
“아이고, 머리 아프다. 일단 정보나 취합해라. 알겠냐?”
“예, 부관 어르신!”
하다 하다 이젠 귀신이냐?
진짜 어이가 없다 못해 가출하실 지경이다.
일단 병사들의 목격담을 모아 경로를 따자.
귀신 소동으로 유비에게 즉각 보고할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 밤 내가 직접 순찰해보고 정말 외부인의 침입이라면 그 부분은 한 번 얘기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았다.
“처녀 귀신은 진짜 처녀일까?”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부관님 앞이잖아!”
……아이고, 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