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04. 가치 없는 것, 가치 있는 것 (3)
그녀가 보았던 세상이란속된 말로 빌어먹을 곳이었다.
강자는 태연하게 약자의 것을 빼앗는다. 인간 됨을 지키는 이라면 응당 나서 그 부조리에 고개 들었어야 했거늘, 그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다.
유비가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천하란 모순 그 자체였다.
학자들은 의와 예를, 이어 충을 논한다.
인간의 참된 뜻을 가리키며 그 본모습에 대해 설파한다.
그 말에 따르면 인간이라면 타인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부모에게는 예를 다해야 했으며, 군주에게는 충의를 다해 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인간성이노라 말한다.
그런 그들에게 그녀는 물었다.
하면 백성들의 생이란 무엇인가.
그저 누군가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삶인가. 짓밟힐 수밖에 없나. 군주에게 충성하고 예를 다해, 의를 지킨다면 그들에게는 무엇이 돌아가지?
유비의 의문에 누구 하나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이치라고, 그것이 유교 전통의 예법이라고 읊을 따름.
그녀는 예전부터 그런 학자들이 너무 싫었다.
그런 입바른 말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배부른 자들이었다.
학문을 갈고닦아 관직에 오른다.
그건 그만큼삶이 윤택해야 가능한 일이었는데, 하면 그들은 그 잘난 관직에 올라 본인들이 입 닳도록 설파했던 인간성을 지켰는가.
누구나가 아는 간단한 이치를 실행했다면.
본인들의 입으로 말했던 의를 지켰더라면 천하 백성이 저 자신을 잡초에빗대어 자조하듯 그저 참고 견디지는 않았을 터.
“천하 백성들은 고개를 들어라.”
그녀는 그저 고고히 선포했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이 너른들판을 눈 아래 둔다.
현 천하에서 백성이란 모든 욕구와 욕망을 거세당해 그저 노예로 부려지는 게 전부였다.
하여 이들은 권력자에게는 한낱 장기 말에 불과했고, 그저 쓰이고 버려지는 삶을 반복한다.
유비 자신 또한 말이 황족이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해 그저 그런 범인으로 남을 뻔했던 걸 기억했기에 누구보다 그 신세에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의문으로 여겼다.
이 천하에서 가장 숫자가많은 것은 백성이다.
권력자가 아무리 힘이 강하더라도 그 원천은 전부 백성들의 생명에서부터 말미암아 탄생하는 것.
그러니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한 것은 바로 백성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한없이 밑바닥을 기는 것 또한 바로 백성이었다.
“공손찬의 의는 무엇인가. 하여 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힘이다.”
전해는 그런 그녀를 마주하여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는 그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이민족을 꿇렸고, 이대륙에서 누구 하나 이민족의 침입에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이끄셨다.”
“하면 그것은 평화인가.”
“죽음보다 비참한 것은 없지.”
전해의 대답에 유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손찬의 밑에서 그녀는 수많은 슬픔을 보았다.
그가 행하는 토목공사는 백성들의 원한을 샀고, 그 겨울에도 공사를 강행해 숱한 이들이 얼어 죽거나 사고로 죽어감에도 그는 동요와 점괘라는 미심쩍은 것이 의존해 그들에게 노역을 강행했다.
그것이 평화인가.
만약 진정 그들이 이걸 평화라고 부른다면 유비는 그들마저 부정할 생각이었다.
그녀가 보았던 공손찬은 약자를 생각할 줄 몰랐다.
그 또한 서자에서 올라온 출신임에도. 그 미천한 출생 탓으로 모진 고초를 겪었으면서 강자가 되자마자 돌변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약자를 탄압하여 멸시했다.
한때 유비가 기대했던 군자로서의 공손찬은 이미 죽었고, 그녀가 본 것은 장군이자 강자로 선 북방의 맹자뿐이었다.
이는 국한 공손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그 모두가 백성을 저버린다.
하여 그들이 가진 저력을 무시하고 그저 부속품이자 노예로 전락시켰다.
강자라고 부르짖어 소리치는 이들은 모두 백성을 저버렸다.
천하에서 가장 큰 잠재력을 지닌 이들을 길가의 돌로밖에 여기지 않았고, 그저 본인들의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원으로만 여겼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모두가 망각했다.
그렇다면.
누구 하나 너희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 가치를 몰라보고 길가의 돌멩이로 여겨 발로 걷어찬다면.
“내가 거두겠다.”
유비는 고개 들어 사방으로 부르짖었다.
“너희는 그저 언제나 참고 견뎠을 따름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신음조차 되지 못한 비명을 내질렀고, 그저 빼앗기는 삶에 익숙해져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했겠지.”
전해가 의문스러운 반응을 보임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하늘로는 푸른 창천이 드리우고 있었다.
“백성이란 곧 약자다.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진 노역자다. 인류를 짊어지어 제국을 지탱하고 국가의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너희였다!”
그런 이들이 버림받았다면.
내로라하는 강자들이 너희를 거두지 않는다면 내가 거두겠다.
유비는 그저 소리친다.
그 목소리가 한 명에게라도 더 닿기를.
“하면 내가 거두마. 천하에서 그 누구보다 강자일무리를 내가 거두어, 이 품 안에 넣겠다. 그러니 약자들은 고개를 들어라.”
공손찬에게 의외 도리란 무엇인가.
그는 상관이던 유주자사 유우를 베어 의를 저버렸고, 잦은 수탈과 노역으로 백성을 핍박하여 도리를 저버렸다.
그녀가 한때 존경하던 사형은 사라졌고, 이제는 그저 흔하디흔한 강자로서의 공손찬만이 남아 저 자신을 백마장군이라고 자칭하고 있었다.
“이 유비의 의를 논하는 공손찬은 제 상관을 베었고, 유주에서는 비탄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그저 힘만을 추구하는 남자가 어찌 천하를 논할까!!”
“닥쳐라!!”
“그러니 내가 품겠다.”
백성이란 곧 천하의 주춧돌.
그들을 품는다는 것은 곧 천하의 기반을 이 손아귀에 넣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그녀는 목소리 부르짖어 하늘을 바라보며, 이어군중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길가에 버려진 이들은 내게 오라. 내 너희를 사람으로 대하겠다. 백성조차 되지 못한 천민들아, 그 불쌍한 천것들아. 유비가 너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마.”
너희가 그 힘을 그저 강자에게 빼앗길 뿐이라면.
모든 것을 내어줘 한없이 선량하며, 또한 미련한 천것으로 전락했다면 그것을 거머쥐겠다.
그리하여 너희만의 강자가 되겠다.
그녀는 속삭였다.
응당 그것은 공손찬의 휘하에 전하는 말이 아니었다. 넓게는 이 천하 전체, 모질게 핍박받는 모든 이들을 향해 유비는 그저 고고하게 선고했다.
“역천을 꾀하라. 하여 강자를 끌어내려라. 약자로 전락한 삶을 증오하고, 주어진 삶에 순응하지 말고 저항하라. 불합리한 처사에는 고개를 들어 그 피륙을 다해 강자와 맞서라.”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불경이라고 한다면?
좋다.
그렇다면 이 유비, 온 천하에 불경함이 퍼지는 것을 응원하겠다. 약자의 반란을 응원하고, 세상이 비정상이 되기를 원한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한나라 제국을 내려다보시는 창천이시여.
“공손찬의 만행은 도를 지나쳤다. 그저 힘이 강하다는 이유로 지도자가 되었다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는 개새끼의 권세가 영원할 리 없을 터.”
전해가 그 말에 발끈하여 뭐라 떠들었지만, 그녀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유비는 전해를 상대하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바라보는 것은 이 땅에 발붙인 모든 천것. 백성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빼앗길 따름이었던 약자들을 향해 그녀는 연이어 선고한다.
“약자여, 고개를 들어라.”
하여 그녀는 고한다.
“성은 유 씨요, 이름은비. 자는 현덕. 이 이름을 기억하라. 너희의 삶이 피폐하여 주어진 숙명에 저항할 수 없을 때가 온다면 떠올려라.”
바람은 분다.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풍향. 지금껏 천하를 잠식하던 바람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그것은 매섭게 불어온다.
그녀는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너희의 왕이 왔노라.”
* * *
그 대담 이후로 전쟁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해는 유비를 미친년이라고매도하며 자리에서 떠났고, 유비 또한 아군 진영으로 복귀해서는 배시시 웃었다.
“어때요? 저도 한다면 좀 하죠?”
“……이봐, 유비 씨. 혹시 왕이 될 생각이요?”
유비의 말은 아마 이 전장 모두에게 전해졌을 터.
마지막 그 말은 너무나도 선명해, 잊고 싶어도 도무지 잊힐 것 같지를 않았다. 분명 무언가 속에 품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내가 상정하던 것보다 훨씬 웅장했으며 또한 광오했다.
“아, 그건 그냥 말 나오던 김에….”
“얼버무리지 말고.”
그 말에 그녀는 살짝 머리를 긁적이다가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꿈꿨어요.”
“왜?”
“이상하니까요.”
저 들판 중앙에서 소리치던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박하게 웃는다. 하지만 이미 그런 걸 들어버린 이상 그것을 그저 순수하게 만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길바닥에 보물이 굴러다니는데 아무도 그걸 주우려 하지 않아요. 그뿐일까요? 심심하면 그걸 걷어차고 노는데, 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보물이라.”
“제아무리 강한 이가 있다고 해도 그게 어찌 백성보다 강하겠어요? 그들의 힘과 저력은 너무 저평가됐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것을줍겠다고?
통치의 요지는 백성.
권력자라면 누구나가 이해하고 있을 것이었지만, 더욱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자아를 빼앗아 그저 부속품처럼 다룰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있는 법이다.
모자란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훨씬 편해 보였다.
백성을 존중하고 그 생명을 존중한다? 그렇게 다스리는 것보다 적당한 매질과 포상으로 하여 짐승처럼 다스리는 게 훨씬 편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런 이들에게자유를 부여하겠노라고 했다.
가장 밑바닥을 전전할 백성들을. 차마 인간이라 자칭하지 못하여 민초라는 이름 아래 잡초처럼 짓밟히던 이들을 인간으로 만들어주겠노라고 외쳤다.
“불경하고 불충한 말이지만, 저는 그들을 이끌겠어요. 그들이 주어진 힘을 몰라 활용하지 못한다면, 제가 올바른 곳에 풀어줄 생각이에요.”
“힘들 텐데.”
“힘들어도 그게가장 왕도니까.”
분명 평범한 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광오하여 야심 넘치는 인간으로 생각한 적도 없었다. 이렇게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닫는 게, 유비라는 인간의 야심은 어지간한 군웅에 비할 것이 아니다.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설마 웃는 얼굴 뒤로 감춘 게 이렇게 거대한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품어 제 수중에 차지한다.
하면 그녀가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곳은 어디인가. 천하의 모든 것은 천자의 것이요, 하여 이 제국 황제의 것임이라고 하는 마당에 그녀는 당당하게 황제에게서 그들을 약탈하겠노라 선포한 것과도 같았다.
“황제의 것을 빼앗는다니, 댁도 불충하네.”
“네?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전 물론 한 황실에 충성하죠. 제국이란 제게 있어서 떼놓을 수없는 요소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확실하게 단언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 제국이 본연의 역할을 못 한다면?”
유비는 내 질문에 그저 침묵으로 응했다.
그게 바로 그녀의 답이었다.
어이가 없네.
있기 편하기에 잠시 머무르려던 곳이 알고 봤더니 호랑이의 아가리였다. 이 여자는 분명 제 한 몸 불살라가며 언젠가 그 야욕을 터뜨릴 것이고, 그리하여 천하 패권에 도전할 여자다.
살아있는 한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천천히 제 욕망을 향해 나아갈 터.
이제야 그녀가 말했던 것을 조금은 이해했다.
그녀는 나와 또 다른 인간이었다.
저번 연회장으로 향하던 길, 유비는 내게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얘기했는데 그 말이 딱 적절했다.
나는 이 여자만큼의 야욕을 품었던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어째서인가.
“그럴 생각이라면 그 돌멩이, 잘 갈고 닦아.”
“네?”
“그거 댁말마따나 보물 맞으니까.”
지금껏 내가 보아왔던 지도자 중 이런 인간은 장담컨대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나 또한 밑바닥 병정의 삶을 전전하던 이라 많은 이들을 만나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감히 장담컨대 이 여자만큼 터무니없는 욕심쟁이가 또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모든 백성을 제 품에 끌어안겠다고?
그건 곧 천하를 제 것으로 삼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다.
서주라는 너른 땅을 가진 군웅이었지만, 이미 양쪽으로 원소와 조조라는 막강한 군웅이 양강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
그들에 비하자면 유비의 입지는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말이 내 가슴 한편을 자극한다.
나라는 뱁새가 유비라는 황새… 아니지. 봉황을 따라가다가는 가랑이 찢어지는 거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녀의 말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진짜 야망 하나는 끝장나는 인간이었네.”
“……혹시 실망하셨어요?”
실망?
이런 큰 인물을 보고 어떻게 실망하나.
“놀랐다는 뜻이야. 적어도 내가 본 이들 중 당신처럼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물론 그녀 또한 야욕을 품어 패권에 도전하는 이.
나와는 다소 맞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누군가가 정점에 서야 한다면 이런 여자가 서는 것이 나아 보였다.
어디까지 따라갈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래도 그녀가 그 뜻을 저버리지 않는 한.
버림받은 이들을 품고 나아가겠다는 이상을 마지막까지 간직하겠노라 한다면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보고 싶은 것도 진실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해봐. 나도 좀 궁금하네.”
“……네!!”
주제에 맞지 않게 큰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
천하를 통치하기에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한 가련한 여자.
하지만 그 뜻대로 마지막까지 관철해 승리할 수만 있다면 그 미래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문득 풍향이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카락을 스치며지나가는 바람에 살짝 돌아보니 그곳에는 드넓은 대지가 자리했고, 그 위로는 푸른하늘이 드리우고 있었다.